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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차] 모험하는 몸을 위해

<김신록에 뫼르소, 870 × 626cm> <메갈리아의 딸들>

김민조_연극평론가

제157호

2019.04.11

연극in은 지난 공연을 기억하고, 다시 보고, 발견하는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다양한 형태의 리뷰를 제안합니다. [세대교차]는 세대가 다른 두 비평가가 공연 서너 편을 관람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읽어 보는 리뷰 코너입니다. - 연극in 편집부
<김신록에 뫼르소, 870 × 626cm>(김신록 구성·실연)라는 공연 제목은 회화의 도판 정보를 연상시킨다. ‘김신록’은 도화지나 아크릴 등 그림이 그려지는 질료에, ‘뫼르소’는 수채나 드로잉 등 그림을 그린 기법에, 870 × 626cm는 도판의 스케일에 각각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범위가 정해진 공간 내에서 운동하는 김신록이라는 질료에 뫼르소라는 표현 기법을 도입한 것’이라는 도판 정보 자체가 제목을 대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신록이 캔버스인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점이다. 연기하면서 연기되는 몸. 세계를 표현하면서 세계로 돌아가는 몸. 어쩌면 머리가 꼬리를 물고 있는 그런 원환적 관계야말로 이 움직이는 그림의 주제일지도 모른다.
연극은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텍스트를 하나의 미적 구성물로서 완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이방인>은 말 그대로 관찰되고 기억된 ‘이방인들’의 몸을 표현하기 위한 에튀드 악보처럼 쓰이고 있다. 연극에서는 두 가지의 층위가 함께 움직인다. 뫼르소라는 가상의 몸에 접근하는 김신록, 그 뫼르소가 기억과 회상을 통해 접근하는 어떤 낯선 사람들의 몸. 감옥에서 ‘회상하는 법’을 터득한 뫼르소는 기억 속에 투영되어 있는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간다. 그 어두운 수면 위에는 뫼르소가 엿보았거나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형상이 천천히 떠오르고, 김신록은 <이방인>의 구절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천천히 뫼르소의 몸으로, 또 뫼르소가 이야기하는 타인들의 몸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수압으로 이루어진 층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사진:이승희)

  • (사진:임승태)

인상적인 것은 김신록 배우가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이행하기 위해 일종의 ‘접촉 지점’을 만들어내는 기술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호흡 변화와 신체의 중심 이동이다. 관찰하는 몸에서 울부짖는 몸으로 이행하기 위해, 또 과거에 속한 몸에서 적과 대치 중인 현실의 몸으로 돌아오기 위해 김신록 배우는 호흡법을 바꾸고 무게 중심을 옮긴다. 이 변화의 기술적 정확성이 주는 쾌감은 그 자체로 상당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공기를 내쉬고 들이쉬는 행위, 그리고 중력과 어울리는 행위가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다른 몸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속에 섞여드는 공기의 규모와 비율을 바꿔야 하며 몸에 가해지는 힘과 저항의 배치를 바꿔야 한다. 개성(personality)은 그처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과정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공연 이후에 마련된 워크 데몬스트레이션(work demonstration)에서 김신록 배우는 자신의 연기 방법론을 몇 가지의 명제와 개념으로 정리한 바 있다. “나와 세계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다” 라는 메를로-퐁티의 명제를 언급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내가 의자를 끌고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자가 나를 데려가는 것이기도 하다. 몸은 나와 세계가 뒤섞이는(ambiguous) 장소일 수밖에 없고, 세계와 관계를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무한히 다른 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처럼 완수되지 않는(unfinished) 몸의 성질이야말로 연극을 모험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험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다른 몸들’ 사이에 펼쳐진 지대는 결코 평평하지 않다. 어떤 몸들을 향한 접근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때로 권력의 문제를 수반한다. 가령 뫼르소에게 총을 맞아 죽은 그 아랍인의 몸, 당대 프랑스 사회의 소수자에 해당했던 어떤 남자의 몸은 어떻게 구성되거나 재현될 수 있는가? <이방인>에서 아랍인의 몸은 단지 뫼르소의 시선에 의해 관찰된 몇 가지 속성들의 합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김신록 배우는 워킹 데몬스트레이션 자리에서 카뮈의 텍스트에 나타난 소수자 차별의 문제를 스스로 지적했지만, 어쩌면 이 문제는 연기자가 다른 몸들 사이를 모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

페미니즘 연극팀 메두사의 <메갈리아의 딸들>(공동창작, 지안 구성·연출)은 몸의 정치성이라는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2015년 이후에 등장한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의 ‘고향’, 메갈리아를 정확히 발음하고 기념한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메갈리아를 거점으로 여성대중의 자기계몽운동이 급격히 확산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혐오의 언어를 그대로 뒤집어 반사하는 ‘미러링’ 전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메갈리아의 딸들>의 배우들은 인터넷상에서 오가던 언술의 차원을 넘어 연기 행위의 차원에서 미러링에 도전하며, ‘권력적인 몸’을 입고 벗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갈등과 혼란을 표현한다.

(사진제공: 페미니즘 연극팀 메두사)

연극은 메타연극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메갈의 후손을 자처하는 여성 배우들은 그녀들의 ‘조상’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지 토론한다. 고민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미러링의 효력이다. 배우들은 미러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형식을 찾기 위한 실험을 벌인다. 성별 권력의 구도를 정반대로 뒤집은 <이갈리아의 딸들>(1977)을 차용하여 가모장제로 재편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재현해보기도 하고 페미니즘 SF 소설 <블러드차일드>(1995)를 차용하여 남성들이 임신의 고통과 공포를 느끼는 상황을 재현하기도 한다. 성별 권력이 전복되면서 여성의 몸이 권력적인 것으로 전시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매우 강력하다. 배우들은 남성에게 허락된 제스처들을 마음껏 흉내 내는 동시에 그것을 희화화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퍼포먼스에 다른 몸(남성)으로 옮겨가는 감각과 원래의 몸(여성)을 기억하는 감각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중극에서 빠져나온 배우들은 미러링 행위가 본래의 의도대로 ‘남자를 패는’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몸으로 그것을 수행하는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고 진술한다. 김신록 배우의 표현에 따르면 미러링이 약속하는 자유와 해방 속에는 여전히 잔류하는(remaining) 몸의 기억이 남아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약자성을 이해하기에 권력적인 몸을 연기할 때조차 일정한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몸. 그렇지만 여성들만 그러한 윤리적 제약을 고민해야 하는 불평등한 상황은 또다시 배우들을 가혹한 분노로 이끈다.
연극은 미러링의 딜레마라는 경계선 위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여성들의 몸을 보여준다. 새로운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고양감을 느끼다가도 이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우울감으로 빠져들곤 하는 동력과 탈력(脫力)의 연대기. 연극은 그것을 온전히 기록하는 것이 메갈 조상들을 기념하는 방법이며, 완수될 수 없는 미러링의 모험을 통해 얻은 넓은 전선이야말로 ‘메갈리아의 딸들’이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김신록에 뫼르소, 870x626cm
일자
2019.3.13(수) ~ 3.23(토)
장소
신촌극장
원작
알베르 카뮈 <이방인>(김옥진 역, 심야책방)
각색
김연재, 김신록
드라마터지
임승태
무대·조명
김형연
음악
김재훈
무대감독
박경찬
구성·실연
김신록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theatresinchon/posts/2571646439529283
메갈리아의 딸들
일자
2019.3.21(목) ~ 3.23(토)
장소
서울대학교 14동 인문소극장
공동창작
구성·연출
지안
조연출
승연
출연
예빈, 지연, 희진, 영채
제작
메두사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1660092277439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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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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