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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차] 의제화의 딜레마

<디디의 우산>, <환희, 물집, 화상>

김민조_연극평론가

제159호

2019.05.15

소수자의 모습은 종종 ‘의제’의 형태를 경유해 무대에 드러나곤 한다. 여성 문제, 장애 문제, 디아스포라 문제, 퀴어 문제 등등.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를 위한 프레임을 설치한다는 측면에서 의제화는 중요한 과정이지만 그것은 종종 그 안에서 이야기되는 당사자의 삶을 납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른바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의적이고 의미 있는 의제를 다루는 연극일수록 당사자 재현의 정치성(政治性/精緻性)에 대해 유심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소수자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욕망은 의제라는 틀거리의 범위를 가볍게 초과하기 마련이다. 복잡하고 풍부한 당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극을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의제화에 가로질러 도달해야 하는 어떤 지점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을 안고 <디디의 우산>, <환희, 물집, 화상>을 보았다.
<디디의 우산>

(사진제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7기동인 ⓒ이영건)

‘세월호 2019 ― 제자리’ 페스티벌의 기획초청공연 <디디의 우산>은 한국사회에서 ‘혁명’이라고 불려온 어떤 국면들을 소수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려 한 연극이다. 김소영-서수경이라는 여성 퀴어 커플의 축과 d-dd라는 남성 퀴어 커플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은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가시화되지 않은 존재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세월호로 인해 혁명의 가능성이 배태되었다, 라고 말하는 대신 혁명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슬픔을 경유하여 다시금 세월호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정교하고도 무자비한 핀셋’에 의해 집어 내던져진 듯한 감각. 세월호와 퀴어를 연결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실과 배제의 감각이다.
<디디의 우산>에서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 혁명과 한 사람이 경험한 상실 사이의 온도를 견주는 기법이다. 수십만 명이 운집한 거대한 광화문의 열기와 아주 작은 오디오 진공관 속의 열기가 대조된다. 그것은 광장의 함성 사이를 흐르고 있는 미세음을 듣고자 하는 노력이거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정지에 이르고 있는 누군가의 동작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아주 천천히 달려오는 서수경의 모습을 바라보는 김소영, 그리고 진공관의 데일 듯한 열기를 통해 어릴 적에 dd와 함께 보았던 번갯불 자국을 떠올리는 d는 서로 닮아 있다. 연극은 그렇게 두 개의 축 사이를 연결하며 의제 정치 속에서 망각되곤 하는 미세한 슬픔의 영역을 그물처럼 펼쳐 놓는다. 김소영과 서수경의 축이 1996년 연세대 항쟁에서 2016년 촛불 집회에 이르는 긴 시간을 살아낸 퀴어 연인의 구체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반면, d와 dd의 축은 연인을 상실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후자의 축에서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상징적인 무대 연출이다. 번갯불 자국을 함께 보았던 때를 그림자놀이로 표현하는 도입부, 그리고 d가 연인을 그리며 조명 서스펜션에 매달린 빨간 우산을 바라보는 장면 등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상실의 풍경들을 사진화한다.
<디디의 우산>이 거대한 애도의 현장에서 배제된 소수자로서 퀴어를 지목한 것은 여러모로 시사 하는 바가 깊다. 다만, 무대 위에 있는 인물들을 퀴어로 보도록 지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인물들이 퀴어처럼 느껴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d와 dd의 이야기 자체가 연인 간의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어렵도록 짜여 있기는 하나, 무대에서 마주보고 있는 d와 dd가 퀴어 연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는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그들의 퀴어성은 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틀 바깥에서 부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간극 속에서 퀴어가 다시 의제의 차원으로 환원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환희, 물집, 화상>

(사진제공: 프로덕션IDA)

2018년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으로 첫 선을 보였던 <환희, 물집, 화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등장해 결혼과 육아의 문제를 놓고 토론한다는 점이 새로웠고, 강론 형식의 지적 대화와 블랙코미디류의 우스꽝스러운 상황 연출이 한 작품 안에 유쾌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 또한 관심을 일으키는 부분이었다. 연극은 여성들의 슬픔과 고통으로 수렴되는 작품만이 페미니즘 연극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여성은 악하고 찌질할 수 있으며 폭력적일 수도 있다. 여성이 인간인 한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인간적 가능성을 불편하게 희화화하지 않고서도, 한 편의 근사한 페미니스트 코미디가 완성될 수 있다. 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요구되는 시점에 적절히 도착한 <환희, 물집, 화상>은 바로 그러한 점들을 증명해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초연 당시에 운위되었던 의의를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본다면, 이 연극이 여성 주인공들을 그리는 방식에는 불편한 점들이 많다. 여성학자 캐서린과 전업주부 그웬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두 여성은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에 대한 자긍심과 회한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물이며, 그 양가적인 감정들 사이의 팽팽한 장력이야말로 황당무계한 코미디가 펼쳐질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캐서린과 그웬에게는 그러한 입체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캐서린과 그웬은 각각 ‘학자’와 ‘주부’에 대해 통념적으로 갖는 이미지의 한도 내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평면적인 캐릭터성의 문제가 본격화되는 것은 그들이 역할을 바꾸는 모험을 감행하는 중반부터이다. 캐서린과 그웬이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던 인물임을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녀들의 모험은 단지 어리석은 판단에 의한 해프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과 안티 페미니스트 필리스 슐래플리의 입장이 신속하게 결투를 나누는 강의 장면의 신선한 에너지와 비교했을 때, 메인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중반부 이후부터 급격히 에너지가 저하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러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단지 극적 완성도의 부족으로 수렴되는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의제적 논의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비해, 여성 인물을 복잡하고 풍부한 존재로 구축해본 경험은 상대적으로 더디게 축적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지체 상태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연극이 설정하는 의제는 신선하고 흥미롭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이야기되는 인물들이 진부하고 납작하게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의제를 생산하되 의제에 갇히지 않는 연극을 꿈꾼다면, 더욱 그렇다.
디디의 우산
일자
2019.4.18(목) ~ 4.28(일)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원작
황정은
연출
임성현
출연
김은한, 백소정, 양대은, 이은조
각색
신효진
드라마터그
최하은
조명
김진우
의상
임누리
무대감독
이성직
음향오퍼
이서연
사진
이영건
임성현X쿵짝프로젝트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hhdlab/posts/2251927541696493
환희, 물집, 화상
일자
2019.4.17(수) ~ 5.5(일)
장소
소극장 산울림
지나 지온프리도
번역
정윤경
연출
김희영
무대디자인
모재연
조명디자인
한원균
영상디자인
하트피플
음악
루크사운드
분장디자인
임영희
조연출
곽정화, 이도연
그래픽
황가림
기획
나희경
프로덕션IDA+극단 기일게
관련정보
http://www.sanwoollim.kr/xe/NOTICE/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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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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