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차] 젠더 게임의 효력
<드랙 나라의 앨리스>, <마트료시카>, <줄리엣과 줄리엣>
김민조_연극평론가
제163호
2019.07.11
가을방학이라는 인디밴드의 첫 정규앨범 [가을방학](루오바 팩토리, 2010)이 나온 것은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싱어송라이터 정바비와 보컬리스트 계피가 의기투합해 만들었던 이 앨범에 대해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작사자인 정바비의 성별과 보컬인 계피의 성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젠더 게임’의 양상에 주목한 바 있다. 실제로 앨범의 타이틀곡 <취미는 사랑>을 들어보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화자의 성별을 하나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화자의 성별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져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성별을 지닌 두 명의 화자가 겹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여성인 계피의 목소리이지만 그 가사를 쓴 것은 남성인 정바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청취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가을방학]의 젠더 게임은 텍스트 층위와 퍼포먼스 층위 사이의 긴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종류의 미학적 구조를 지닌 예술에서 전자와 후자는 늘 불편한 힘겨루기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 차우진은 예의 [가을방학] 앨범에 대한 평론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맺고 있다. “따라서 이 도발적 놀이엔 근본적인 질문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음악적 완성도란 거의 전적으로 송라이팅에 있다고 믿는 ‘비평의 규칙’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음악비평은 ‘작가의 신화’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1) 젠더 게임의 양상에 대한 분석이 작가/퍼포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만약 이러한 관점을 다양한 종류의 젠더 게임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2019년 현재의 연극계에 적용시켜 본다면 어떨까.
최근 연극계에서 힘을 얻고 있는 ‘젠더프리 캐스팅’은 이른바 포스트드라마(post-drama) 담론과 친연성을 맺고 있다. 원본으로 간주되는 텍스트의 권위로부터 무대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은 텍스트에 지정되어 있는 성별을 무화, 해체, 변형하는 전략과 잘 맞아떨어지곤 한다. 그런데 젠더 프리(gender free)가 “X든 Y든 무관하게 실천한다”에 가깝고, 젠더 벤딩(gender bending)이 “본래 X인 것을 Y로 실천한다”에 가까운 모드라고 한다면 현재 한국 연극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공연 사례들은 대체로 젠더 프리보다는 젠더 벤딩의 효과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유형과 성격은 각기 다르나 <비평가>(극단 신작로), <함익>(서울시극단), <묵적지수>(극단 달과아이) 등의 공연에 관객들이 반응하는 주요 포인트 역시 남성의 것으로 상정되어 왔던 요소들을 여성이 수행할 때 나타나는 전복적 효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의 현상들을 ‘작가의 신화’에 대한 퍼포머의 승리, 혹은 X-되기에 대한 Y-하기의 승리로 진단할 수 있을까? 선언적으로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앞에 열거한 사례들만 보더라도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쓰인 텍스트의 한계를 “여배극”(여성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는 연극)의 힘으로 돌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젠더 게임이 의도와 효과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실패하는 사례들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마트료시카>(이소연 작)라는 작품의 공연 이력은 이러한 지점에 대해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가을방학]의 젠더 게임은 텍스트 층위와 퍼포먼스 층위 사이의 긴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종류의 미학적 구조를 지닌 예술에서 전자와 후자는 늘 불편한 힘겨루기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 차우진은 예의 [가을방학] 앨범에 대한 평론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맺고 있다. “따라서 이 도발적 놀이엔 근본적인 질문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음악적 완성도란 거의 전적으로 송라이팅에 있다고 믿는 ‘비평의 규칙’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음악비평은 ‘작가의 신화’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1) 젠더 게임의 양상에 대한 분석이 작가/퍼포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만약 이러한 관점을 다양한 종류의 젠더 게임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2019년 현재의 연극계에 적용시켜 본다면 어떨까.
최근 연극계에서 힘을 얻고 있는 ‘젠더프리 캐스팅’은 이른바 포스트드라마(post-drama) 담론과 친연성을 맺고 있다. 원본으로 간주되는 텍스트의 권위로부터 무대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은 텍스트에 지정되어 있는 성별을 무화, 해체, 변형하는 전략과 잘 맞아떨어지곤 한다. 그런데 젠더 프리(gender free)가 “X든 Y든 무관하게 실천한다”에 가깝고, 젠더 벤딩(gender bending)이 “본래 X인 것을 Y로 실천한다”에 가까운 모드라고 한다면 현재 한국 연극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공연 사례들은 대체로 젠더 프리보다는 젠더 벤딩의 효과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유형과 성격은 각기 다르나 <비평가>(극단 신작로), <함익>(서울시극단), <묵적지수>(극단 달과아이) 등의 공연에 관객들이 반응하는 주요 포인트 역시 남성의 것으로 상정되어 왔던 요소들을 여성이 수행할 때 나타나는 전복적 효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의 현상들을 ‘작가의 신화’에 대한 퍼포머의 승리, 혹은 X-되기에 대한 Y-하기의 승리로 진단할 수 있을까? 선언적으로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앞에 열거한 사례들만 보더라도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쓰인 텍스트의 한계를 “여배극”(여성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는 연극)의 힘으로 돌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젠더 게임이 의도와 효과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실패하는 사례들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마트료시카>(이소연 작)라는 작품의 공연 이력은 이러한 지점에 대해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는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단막극은 제각기 세대와 국적이 다른 여성들 사이에 교감이 싹트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린 남자아이를 제외하면 모두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지난해 봄 신춘문예 단막극전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공연팀은 주요 배역들에 대해 젠더프리 캐스팅을 감행한 바 있다. 남편의 언행에 환멸을 느낀 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은 한국인 중년 여성 송윤경, 자발적으로 한국을 떠나 카자흐스탄으로 향하고 있는 고려인 3세 여성 아델리아, 우즈벡 출신 여성 이주노동자 딜퓨자를 모두 남성 배우가 연기하도록 한 것이다. 남성 배우들은 연기자 자신과 다른 성별 정체성을 표현하려 노력하는 대신 성 중립적인 태도로 각각의 인물을 연기했다. 그밖에도 비좁은 3등석의 전경을 몇 개의 사다리로 유연하게 해체하여 제시하거나 러시아어가 발화되는 장면에서 한국어 자막을 별도로 사용하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무대 언어의 모호성을 극대화하는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을 드러낸 공연이었다.
포스트드라마적 실천은 종종 텍스트의 층위에서 이미 분배되고 결정되어 있는 기호들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전략을 취하곤 한다. 이러한 전략은 이분화된 젠더 구조 너머를 사유하는 트랜스 정치의 문제의식과 상통할 때가 많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체성의 블럭들을 횡단하는 미지의 기호로서 ‘몸’을 발견하는 것은 낯설고 규정되기 어려운 체험이 도래하는 장소로서 ‘무대’를 창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여성들의 이야기로 세팅된 원작 텍스트로부터 젠더와 관련된 식별 표지를 의도적으로 교란시킨 <마트료시카> 초연이 포스트드라마적 지향에 닿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화된 사유는 어디까지나 더 유효한 가설을 세우기 위한 도구일 뿐, 공연의 실물적인 효과들을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마트료시카> 초연에서 감행된 젠더 게임은 신선한 비주얼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젠더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분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젠더 구조를 가로질러 그 너머를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의 ‘혼합’ 상태에 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성 중립적 태도를 표방하는 미적 실험에서 흔히 발생하곤 하는 오류이다. ‘여성적인 것’의 외부에 쇄도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젠더 구조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며, 무대 위에서 ‘여성적인 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지워낼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 탐구가 동원되어야 한다. 젠더는 테크놀로지의 효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잘 고안된 테크놀로지 없이 젠더 너머를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포스트드라마적 실천은 종종 텍스트의 층위에서 이미 분배되고 결정되어 있는 기호들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전략을 취하곤 한다. 이러한 전략은 이분화된 젠더 구조 너머를 사유하는 트랜스 정치의 문제의식과 상통할 때가 많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체성의 블럭들을 횡단하는 미지의 기호로서 ‘몸’을 발견하는 것은 낯설고 규정되기 어려운 체험이 도래하는 장소로서 ‘무대’를 창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여성들의 이야기로 세팅된 원작 텍스트로부터 젠더와 관련된 식별 표지를 의도적으로 교란시킨 <마트료시카> 초연이 포스트드라마적 지향에 닿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화된 사유는 어디까지나 더 유효한 가설을 세우기 위한 도구일 뿐, 공연의 실물적인 효과들을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마트료시카> 초연에서 감행된 젠더 게임은 신선한 비주얼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젠더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분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젠더 구조를 가로질러 그 너머를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의 ‘혼합’ 상태에 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성 중립적 태도를 표방하는 미적 실험에서 흔히 발생하곤 하는 오류이다. ‘여성적인 것’의 외부에 쇄도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젠더 구조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며, 무대 위에서 ‘여성적인 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지워낼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 탐구가 동원되어야 한다. 젠더는 테크놀로지의 효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잘 고안된 테크놀로지 없이 젠더 너머를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진제공: 최하은)
<마트료시카>는 지난 6월 다시 여성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상자무대에서 최하은 연출로 상연된 <마트료시카>는 여성 배우들의 연기로 채워졌다. 비좁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칸의 모습을 재현한 무대 위에는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접촉하게 되는 여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러시아어 화자와 한국어 화자가 작은 단서들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읽고,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너머의 타인을 응시하게 되는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들 사이를 반짝 스쳐 지나가는 교감의 순간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각자의 삶, 특히 여성으로서의 공통감각을 표현하는 데 공을 들인 연출선(線)과 연기선이다. 특히 극 중 내내 밝은 성격을 보여주던 송윤경(조윤지 분)이 억눌러왔던 고통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기억과 경험에 반응하는 ‘여성의 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낙지를 게워내는 몸의 요동과 유산 경험에 대한 회고가 서로 연결되고, 그러한 신체적 기억들은 아름답지만 공허한 녹색 조명으로 표현된 바이칼 호수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관극의 경험은 ‘촉각적’이다. 관객은 자신의 몸을 통해 사물과 신체의 관계성을 지각한다. 연극은 그동안 접촉된 적이 없었던 잔여적인 몸의 감각에 접촉함으로써 수없이 다양한 몸들을 구제하는 장소로 기능할 수 있다. 이번 <마트료시카> 공연이 조용히 헤치고 들어간 것은 바로 그런 차원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아델리아(우정아 분)의 방어적인 눈빛과 말투, 예정된 상실을 견디고 있는 딜퓨자(나유미 분)의 고요하고 균형 잡힌 자세, 삶의 종착지에 다다른 회한과 홀가분함을 한쪽씩 짊어진 듯한 나쟈(김도연 분)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등등. 여성의 삶에 내재한 공통성과 개별성을 가로지르는 배우의 몸들은 ‘여성적인 것’을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인식 범주 자체의 경직성을 성찰하게 만든다. <마트료시카> 초연이 실패했던 지점을 이번 공연이 정반대의 방향에서 성취했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텍스트냐 무대냐, 재현이냐 변형이냐 등등의 관념적인 대립항을 양쪽으로 밀어놓은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극의 경험은 ‘촉각적’이다. 관객은 자신의 몸을 통해 사물과 신체의 관계성을 지각한다. 연극은 그동안 접촉된 적이 없었던 잔여적인 몸의 감각에 접촉함으로써 수없이 다양한 몸들을 구제하는 장소로 기능할 수 있다. 이번 <마트료시카> 공연이 조용히 헤치고 들어간 것은 바로 그런 차원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아델리아(우정아 분)의 방어적인 눈빛과 말투, 예정된 상실을 견디고 있는 딜퓨자(나유미 분)의 고요하고 균형 잡힌 자세, 삶의 종착지에 다다른 회한과 홀가분함을 한쪽씩 짊어진 듯한 나쟈(김도연 분)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등등. 여성의 삶에 내재한 공통성과 개별성을 가로지르는 배우의 몸들은 ‘여성적인 것’을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인식 범주 자체의 경직성을 성찰하게 만든다. <마트료시카> 초연이 실패했던 지점을 이번 공연이 정반대의 방향에서 성취했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텍스트냐 무대냐, 재현이냐 변형이냐 등등의 관념적인 대립항을 양쪽으로 밀어놓은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최하은)
<줄리엣과 줄리엣>
한편 작년에 산울림 고전극장을 통해 주목받는 레퍼토리로 부상한 <줄리엣과 줄리엣>(한송희 재창작/이기쁨 연출)의 경우에는 공연 텍스트의 차원에서 이미 젠더 게임이 수행된 사례라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 이전에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캐플렛이라는 두 여성 간의 사랑이 있었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누이’라는 가공의 인물에 대해 상상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게 한다. 셰익스피어에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누이가 있었다면 그녀는 세계적인 문호가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울프의 질문을 <줄리엣과 줄리엣>은 이렇게 변형하고 있는 듯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들이 이성 커플이 아닌 동성 커플이었다면, 과연 세계적인 비극이 될 수 있었을까.
(사진제공: 창작집단 LAS)
<줄리엣과 줄리엣>의 문제의식은 탁월하고 텍스트는 원전에 대한 패러디 이상의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 줄리엣 몬테규(한송희 분)와 줄리엣 캐플렛(김희연 분)의 사랑은 명백히 여성 동성애로 규정되어 있으며 극 중 인물들은 망설임 없이 그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두 인물이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성 연인에 대한 성애적 끌림에 의혹을 품지 않는 인물들의 태도, 나아가 그녀들의 선택을 올바른 것으로 지지하는 텍스트 자체의 태도로 인해 퀴어 연극으로서의 특징을 띠기도 한다. 말하자면 <줄리엣과 줄리엣>은 역사 속에서 지워진 여성의 이야기를 허구적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여성 서사의 정치성과 젠더 규범에 맞서는 동성 커플의 사랑을 올곧게 지지하는 퀴어 서사의 윤리성이 결합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줄리엣과 줄리엣>의 서사는 그것을 ‘정상적인’ 연애 서사 속에 흡수하려는 젠더 규범의 압력 내에 놓여 있다.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캐플렛의 사랑을 한순간의 실수나 착오로 만들려는 극중 남성 인물들의 행동은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역사화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메커니즘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메타적이다.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이 가문, 사회, 국가, 종교는 물론 역사 자체의 반대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수난이 태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줄리엣과 줄리엣>의 백미는 원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공연에서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은 줄리엣 몬테규의 남동생 로미오 몬테규(조용경 분)가 위기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티볼트 캐플렛(김연우 분)에게 줄리엣 캐플렛을 사랑한 것은 사실 누나가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둘러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연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로 흡수될 위험에 놓인다. 그러나 재창작인 한송희를 비롯한 창작진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원전이 진실을 회피하기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선택하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했던 것 같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줄리엣 몬테규가 허위 진술을 통해 살아남는 길을 버리고 줄리엣 캐플렛과의 사랑을 시인하는 장면은 이 연극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장면인 동시에 가장 <로미오와 줄리엣>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줄리엣과 줄리엣>의 백미는 원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공연에서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은 줄리엣 몬테규의 남동생 로미오 몬테규(조용경 분)가 위기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티볼트 캐플렛(김연우 분)에게 줄리엣 캐플렛을 사랑한 것은 사실 누나가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둘러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연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로 흡수될 위험에 놓인다. 그러나 재창작인 한송희를 비롯한 창작진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원전이 진실을 회피하기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선택하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했던 것 같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줄리엣 몬테규가 허위 진술을 통해 살아남는 길을 버리고 줄리엣 캐플렛과의 사랑을 시인하는 장면은 이 연극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장면인 동시에 가장 <로미오와 줄리엣>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창작집단 LAS)
버지니아 울프가 그러했듯이 <줄리엣과 줄리엣>은 젠더적 상상력을 통해 고전의 역사적 주소지를 묻는다. 셰익스피어가 상상하지 못했을 지점에 서서 셰익스피어적으로 말한다는 것.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줄리엣과 줄리엣>은 젠더 게임의 효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유형으로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퀴어 연극으로서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 미심쩍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없지는 않다.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캐플렛은 서로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지닌 연인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기묘하게 성애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황홀감이나 동일한 운명 속에 놓인 여성들 간의 동지적 연대 같은 감정이 아닌, 순전히 두 인물 사이의 신체적 교감을 통해 표현되는 성애적 끌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애는 진실이나 운명에 대한 숭고한 감정들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 성적 긴장감, 공기의 떨림, 호흡과 눈빛의 변화, 스킨십의 동선 등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었던 디테일이 투박하게 처리되곤 하는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간간이 나오는 퀴어 연극들에서 유독 성애적 교감을 나누는 장면들에서 경직된 분위기가 흐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것이 이성연애를 다루는 연극이었다면 과연 나타났을 문제인지를 의심해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민한 일이 될까.
<드랙 나라의 앨리스>
젠더 게임이 젠더 구조 전체의 지형 속에서 일어나는 놀이라고 한다면, 이 놀이의 성패는 구조에 대한 민감성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식별된 성별이나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과된 성별 너머의 리얼 월드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반적’ 실천이 어떠한 배치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섬세하게 자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드랙(drag)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드랙을 사회적으로 지정된 성별 범주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것, 그러나 당사자가 아름다운 것으로 지향하는 섹슈얼한 표현들을 공개된 장소에서 당당히 드러내는 실천 행위라 정의해보도록 하자. 섹슈얼리티 다양성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는 한국 사회에서도 드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진제공: 극단 Y)
극단 Y의 <드랙 나라의 앨리스>는 관객을 그러한 드랙의 세계로 초대하는 공연이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콘셉트와 결합된 이번 공연은 관객이 예술청(구 동승아트센터) 지하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곳곳에 설치된 드랙 존을 방문하는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관객은 원작에서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초대하는 ‘토끼’의 역할을 맡은 퍼포머(강윤지 분)의 지시에 따라 작은 병에 담긴 드링크를 마심으로써 입장 준비를 마치게 된다. 드랙 존은 ‘황야의 무법자’(김소영 분), ‘하얀 여왕’(변승록 분), ‘붉은 여왕’(썸머 분), ‘미스터 버틀러’(연혜원 분)가 담당하는 4개의 스팟으로 구성된다.
드랙은 정치적 실천이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결정이지만 공개적으로 젠더 규범을 해체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는 것은 더욱 강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드랙이 남성성에 대한 선망을 드러낸다거나, 여성성을 과장함으로써 그것을 희화화한다는 명목으로 비판하곤 한다. <드랙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준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퍼포머들이 그러한 시각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었다는 점에 있다. 드랙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추종을 바탕으로 하나 드랙을 통해 표현되는 모습이 반드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연기의 해방적 성질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드랙 퍼포머가 추하거나 악한 모습을 전시하기도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협소한 틀을 부숴낸 자리에서 드랙은 연극의 오래된 가능성들과 조우한다.
첫 번째 존을 관할하는 ‘황야의 무법자’는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른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다. 퍼포머는 관객이 질 수밖에 없는 결투를 신청해놓고는 연신 자신의 승리에 도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핏 보기에는 과잉된 남성성을 풍자하는 데 목적을 둔 드랙처럼 보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예컨대 퍼포머가 분명 자아도취에 빠진 터프가이를 모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불쾌감은 신기하리만큼 느껴지지 않는다. 카우보이의 과시적인 언행은 그것을 유발하는 심리적 동기나 사회구조적 원인들과 절연되어 있는 어떤 것, 순수하게 짜여진 ‘표면’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허용된 적이 없었을 법한 젠더 롤을 마음껏 표현하는 퍼포머의 즐거운 에너지가 관객들에게 전염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도입부를 맡은 첫 번째 존에서 드랙이라는 안전망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면,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이 거소하고 있는 드랙 존에서는 사회적 시선에 의해 상처받은 소수자들의 내면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금발에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하얀 여왕은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는 사람들로 인한 슬픔을 연기한다. 반면 붉은 여왕은 가부키가 연상될 만한 강렬한 분장에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두 개의 존을 거쳐가며 관객은 지하로 점점 하강하는 구조로 짜여 있는 공간성의 의미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 공간에 초대된 이들은 젠더 규범에 의해 억압된 욕구들이 상징화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아카이브를 탐험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을 놀라게 하며 위협적으로 등장했던 붉은 여왕은 이내 자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시선을 피해 지하 깊숙이 숨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연장 입구부터 길게 이어져 있는 다양한 색깔의 실들이 사실은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친구, 즉 관객들을 위해 남겨놓은 초대장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마지막 존을 지키고 있는 것은 남성 교수 역할을 수행하는 ‘미스터 버틀러’이다. 백발에 검은 코트 정장을 차려입은 퍼포머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이 판서된 블랙보드 앞에서 젠더 강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미스터 버틀러의 드랙 퍼포먼스는 목적이 약간 다르다. 퍼포머는 강의 중에 ‘여자는 결혼을 해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둥의 불편한 발언을 내뱉다가 관객들의 반발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말하자면 풍자 내지 비판의 의도가 강한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야의 무법자의 경우처럼 미스터 버틀러의 퍼포먼스 역시 현실에서 부여받은 적 없는 강자성을 실현하고, 그것을 도로 박살내는 쾌감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드랙적이다.
드랙은 정치적 실천이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결정이지만 공개적으로 젠더 규범을 해체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는 것은 더욱 강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드랙이 남성성에 대한 선망을 드러낸다거나, 여성성을 과장함으로써 그것을 희화화한다는 명목으로 비판하곤 한다. <드랙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준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퍼포머들이 그러한 시각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었다는 점에 있다. 드랙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추종을 바탕으로 하나 드랙을 통해 표현되는 모습이 반드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연기의 해방적 성질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드랙 퍼포머가 추하거나 악한 모습을 전시하기도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협소한 틀을 부숴낸 자리에서 드랙은 연극의 오래된 가능성들과 조우한다.
첫 번째 존을 관할하는 ‘황야의 무법자’는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른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다. 퍼포머는 관객이 질 수밖에 없는 결투를 신청해놓고는 연신 자신의 승리에 도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핏 보기에는 과잉된 남성성을 풍자하는 데 목적을 둔 드랙처럼 보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예컨대 퍼포머가 분명 자아도취에 빠진 터프가이를 모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불쾌감은 신기하리만큼 느껴지지 않는다. 카우보이의 과시적인 언행은 그것을 유발하는 심리적 동기나 사회구조적 원인들과 절연되어 있는 어떤 것, 순수하게 짜여진 ‘표면’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허용된 적이 없었을 법한 젠더 롤을 마음껏 표현하는 퍼포머의 즐거운 에너지가 관객들에게 전염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도입부를 맡은 첫 번째 존에서 드랙이라는 안전망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면,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이 거소하고 있는 드랙 존에서는 사회적 시선에 의해 상처받은 소수자들의 내면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금발에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하얀 여왕은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는 사람들로 인한 슬픔을 연기한다. 반면 붉은 여왕은 가부키가 연상될 만한 강렬한 분장에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두 개의 존을 거쳐가며 관객은 지하로 점점 하강하는 구조로 짜여 있는 공간성의 의미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 공간에 초대된 이들은 젠더 규범에 의해 억압된 욕구들이 상징화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아카이브를 탐험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을 놀라게 하며 위협적으로 등장했던 붉은 여왕은 이내 자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시선을 피해 지하 깊숙이 숨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연장 입구부터 길게 이어져 있는 다양한 색깔의 실들이 사실은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친구, 즉 관객들을 위해 남겨놓은 초대장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마지막 존을 지키고 있는 것은 남성 교수 역할을 수행하는 ‘미스터 버틀러’이다. 백발에 검은 코트 정장을 차려입은 퍼포머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이 판서된 블랙보드 앞에서 젠더 강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미스터 버틀러의 드랙 퍼포먼스는 목적이 약간 다르다. 퍼포머는 강의 중에 ‘여자는 결혼을 해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둥의 불편한 발언을 내뱉다가 관객들의 반발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말하자면 풍자 내지 비판의 의도가 강한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야의 무법자의 경우처럼 미스터 버틀러의 퍼포먼스 역시 현실에서 부여받은 적 없는 강자성을 실현하고, 그것을 도로 박살내는 쾌감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드랙적이다.
(사진제공: 극단 Y)
물론 공연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관객이 각각의 존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은 그중 하나이다. 특히 붉은 여왕의 존에서 관객이 퍼포머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짧게 지나가 버렸다는 점은 아쉽다. 이것이 비교적 사소한 문제에 해당한다면, 젠더 게임을 수행하는 공연의 측면에 있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도 있다고 여겨진다. 가령 미스터 버틀러의 경우 ‘남성 교수’가 아니라 ‘여성 교수’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였다. 차별 내지 혐오 발언을 수행하는 주체가 공연 현장에서 어떤 성별로 패싱되느냐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한 효과를 산출한다. 그것은 ‘교수’라는 지위에 부여된 일반적인 강자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인다. 젠더 구조에 대한 민감성이 돋보이는 공연일수록 디테일한 터치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도 높아질 것이니 말이다.
- 차우진, ‘정바비와 계피의 젠더 게임’, [WEIV], 2010. 11. 13. http://www.weiv.co.kr/archives/6146
- 물론 광의의 개념으로 해석하면 고정된 젠더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실천을 젠더 프리로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젠더 벤딩은 젠더 프리의 하위 유형이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협의의 개념으로 해석해 젠더 프리와 젠더 벤딩을 서로 차이를 지닌 동등한 실천 전략으로 파악한다.
마트료시카
- 일자
- 2019.06.13(목) ~ 06.15(토)
- 장소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상자무대2
- 작
- 이소연
- 연출
- 최하은
- 출연
- 조윤지, 우정아, 나유미, 최세경, 김도연 조연출 김진희
- 기획
- 이윤진
- 드라마터그
- 임성현
- 무대디자인
- 김승환
- 조명디자인
- 임정필
- 소품디자인
- 김도빈
- 의상디자인
- 정해리
- 그래픽디자인
- 신아현
- 음악디자인
- 정규원
- 음향디자인
- 이규원
- 러시아어 지도
- 이사샤
- 움직임 지도
- 김도연
- 촬영
- 유다은
- 프로필 촬영
- 박형남
- 포토콜 촬영
- 정길우
- 무대감독
- 손청강
- 객석감독
- 강의정, 이솔, 이요셉, 이지원, 김현재
- 제작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줄리엣과 줄리엣
- 일자
- 2019.06.14(금) ~ 07.07(일)
- 장소
- 콘텐츠 그라운드
- 원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재창작
- 한송희
- 연출
- 이기쁨
- 출연
- 한송희, 김희연, 조용경, 김연우, 이동준, 김하리, 장세환
- 무대
- 서지영
- 조명
- 정유석
- 의상
- 강기정
- 음악
- 김희은
- 음향
- 윤찬호
- 의상
- 오수현
- 분장
- 이지연
- 안무
- 손지민
- 그래픽
- EASThug
- 사진
- IRO(박일호)
- 무대감독
- 이다빈
- 기획
- 품 Theatricals (김언)
- 음향오퍼레이터
- 손유진
- 조명오퍼레이터
- 송유정
- 주최/주관
- 창작집단 LAS
드랙 나라의 앨리스
- 일자
- 2019.06.29(토) ~ 06.30(일)
- 장소
- (구) 동숭아트센터 1층 나선형 계단 앞
- 연출
- 강윤지
- 출연
- 김소영, 변승록, 연혜원, 썸머
- 특별출연
- 아장맨
- 제작
- 극단 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