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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재구성되는 몸의 기억

장애인문화예술판의 <삐딱 선>과 극단 애인의 <1인 무대>

하은빈

제175호

2020.01.23

장애인문화예술판(이하 ‘판’)의 <삐딱 선>과 극단 애인(이하 ‘애인')의 <1인 무대>를 비슷한 시기에 관람했다. 두 작업 모두에서 장애는 공연의 주된 화두이자 예술의 형식으로서 주요하게 자리한다. 그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몸 특유의 물성과 움직임, 현존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몸의 기억과 역사를 재구성하는 순간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판의 <삐딱 선>에서는 개별 몸들을 예속시키는 주권적 ‘선’을 드러내고 재구획하고자 하는 시도가 두드러졌고, 애인의 <1인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직접 몸으로 만든 말과 움직임이 모여 다양한 색채의 공연을 이루었다.
정지하기, 재구획하기: 장애인문화예술판의 <삐딱 선>
“궤도를 벗어나 우주로 달려갈 수 있을까?” 판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질문으로 집약된다. 무대는 돌고 도는 장난감 기차의 궤도를 끊으며 시작되는데, 이는 어떤 정지의 계기를 마련한다. 나의 자리와 내가 향한 곳을 살피기 위해서는 달리는 것을 멈추는 일, 선을 벗어나는 일, 삐딱하게 서는 일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끊긴 궤도의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몸(들)의 역사와 기억”이다. 천자문을 익혔던 일에 대한 회상, 사고 이후 재활병원에서 보냈던 시간, 목욕탕에서 겪었던 일, 장애인-비장애인 연인 사이의 사건들이 불연속적으로 엮이며 전개된다.
이 이야기들을 매개하는 것은 각각의 몸들이다. 장애를 가지거나 장애를 가지지 않은, 걷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곧게 서거나 웅크린 몸들. 그 몸들은 무대에 올라와 말하고, 객석의 단층을 천천히 굴러 내려오며, 자신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춤을 춘다. 자신들의 "역사와 기억"을 조달하는 이 몸들은 재현의 권력에 예속되지 않아 각기의 시간성과 운동성으로 움직이며, 각자가 통과했던 경험적 사건들의 단면들을 드문드문 보여준다. 일련의 서사들은 성기고 느슨하게 흘러간다. 모호한 시작점에서 문득 펼쳐지다가 이렇다 할 끝을 맺지 않고서 다른 이야기로, 다른 지점으로 불쑥 건너뛴다.
반면 공연의 톤을 일관되게 조정하며 균일한 에너지로 전개해나가는 것은 저자-텍스트의 목소리다. 극 내내 배우들의 목소리에 의해 발화되는 이 텍스트는 일정하게 비판적 문제제기로 수렴한다. 요컨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일탈”을 상상하고, 나의 운동성을 지배하는 “관성”으로부터 탈피할 것. 이는 “내가 가진 생각이 확고하게 뿌리박혀 있을수록 가능성은 불가능으로” 사장되기 때문이며, “진실”은 “거꾸로 혹은 비스듬히 서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선을 거부하고 위반하며 넘어설 것을 표명하는 판의 공연은 단연 철학적이다. 그러니까 철학의 일이 비판임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가 밟고 선 지반의 조건과 토대를 살펴, 그것이 재고될 필요가 있는 상대적이고 임의적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러하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목소리에 부여된 권위는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저자-텍스트와 배우-몸은 무대에서 점점 분리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저자의 목소리가 상대성 이론을 비롯해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론적, 개념적 발화를 지속하는 것에 비해 개별 몸들의 이야기들은 더 진전, 구축되지 않고 텍스트에 환원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텍스트의 주장을 중심으로, 몸의 경험을 주변부로 위치시키며 양자의 관계를 불가피하게 위계화한다. 더하여 이러한 구성은 장애 정도에 따라 배우들의 비중이 분배되게끔 하는 결과를 낳는다. 저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길고 개념적인 대사들을 보다 분명한 발성과 딕션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배우들이므로, 결국 배우들의 비중은 장애의 경중에 따라 불균등하게 배치된다.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대안적 ‘삐딱-선'으로 제시되는 거대한 경사로가 다소 의문점을 남기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오로지 비장애 배우(로 패싱되는 몸들)에 의해 구축되는 그 선을 우리는 과연 비장애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긍정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공연이 시도하는 바가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는 선들로부터 밀려나고 배제된 몸들을 드러내는 일임은 분명하다. 바로 그 몸들에 의해서 전달되는 과거의 시간들은 거칠고 정리되지 않은 것일지는 몰라도 더 이상 타자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연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운동으로 세계에 나아갈 길을 탐색하면서 바로 그 몸에 의한 새로운 선 긋기를 고민한다. 극의 중반에서 무대 위에 생겨나는 긴 종이테이프 선은 그러한 고민에 의해 성취된 유의미한 실천일 것이다. 장애를 가진 배우가 온몸을 사용하여 무대를 가로질러 긋는 선은 바르지도 곧지도 않은 선이다. 그러나 그 선은 꺾이고 휘어짐으로써 외부에서 제시하는 매끄러운 선의 허위성을 거부하며, 세계를 주체적으로 재구획하는 시도에서 불가피한 저항과 분투를 기입한다.
1인칭으로서의 장애서사: 극단 애인의 <1인 무대>
한편 애인의 <1인 무대>는 장애를 가진 배우들이 공연의 저자이자 배우로서 직접 만든 1인극들로 이루어졌다. 하지성의 무대가 관객과의 관계맺음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낸다면, 강희철과 백우람의 무대는 자신의 장애를 배우의 정체성의 일부로서 고민한다. 그리고 강보람과 어선미의 무대는 직접적 발화 없이 행위 및 움직임만으로 관객에게 강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하지성 <나는 있다>
하지성의 <나는 있다>가 자신의 ‘있음’을 표명하는 방식은 ‘제4의 벽’ 속에서 약속된 말과 행동을 수행함으로써가 아니라 관객과의 직접적인 관계맺음을 통해서다. 그런데 이는 관객의 응시와 기다림 또한 공연의 일부로서 참여하도록 하는 독특한 효과를 이끌어냈다. 하지성은 공연 중에 관객을 위해서 좋아하는 노래를 선곡하고 객석의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데, 사뭇 단순해 보이는 두 가지의 행위를 수행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제법 상당하다. 그러나 그 시간을 함께하는 관객의 기다림에 모종의 행위성이 부여되는 것은 하지성이 앞서 무대를 관객과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규정한 까닭이다. 이를테면 타이머를 맞춰놓은 카메라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행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피사체의 몫을 해내는 능동적 행위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지성의 행동을 오랜 시간 지켜보는 것 또한 어떤 시간의 감내가 아니라 그가 제안한 관계의 나머지 한 축에 관여하는 일이 된다.
  • 강희철 <장애, 우습다>
  • 백우람 <침묵의 5,6초>
강희철과 백우람은 각각 <장애, 우습다>와 <침묵의 5, 6초>를 통해 자신의 장애가 무대에서 갖는 맥락과 특성에 새로이 접근하려 시도한다. 강희철의 <장애, 우습다>는 자신의 장애를 코미디의 주제이자 도구로써 내세우는데, 여기서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형식은 강희철이 가진 특유의 쾌활함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영민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장애인에게 덧씌워지는 타자화의 서사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고, 장애가 갖는 사회적 낙인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그 거부의 제스처를 더욱 극대화한다. 다섯 무대 중에서도 가장 에너제틱했던 강희철의 무대는 적재적소에 배치된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로 흥을 더욱 끌어올리며 객석으로부터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에 이어지는 백우람의 <침묵의 5, 6초> 또한 배우의 관점에서 장애가 갖는 특이성을 고민하고 활용한다. 언어장애를 가진 백우람에게 ‘말 막힘’의 순간은 양가적으로 경험되는 문제적인 시간이다. 발화가 지연되는 이 짧은 시간은 관객의 인내를 요할뿐만 아니라 배우 자신에게 큰 힘듦과 두려움을 안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시간은 백우람이 배우로서 가지는 고유한 매력이 잠재되어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발화 직전의 긴장하고 경직되는 근육, 예측불가능하게 생겨나는 운동과 리듬, 불시에 터져 나오는 폭발적 에너지 등은 바로 그 ‘침묵의 5, 6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백우람은 짧고도 고통스러운 그 침묵을, 무대 위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순간으로서 기꺼이 껴안는다.
강보람 <모래 위에 서다>
한편 강보람의 <모래 위의 서다>와 어선미의 <추억정리>는 모래를 흐트러뜨리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먼저 <모래 위의 서다>에서 강보람은 모래를 통해 놀이터와 바닷가라는 두 개의 상반된 공간을 환기시키고 자신의 몸이 각각의 공간과 맺는 관계를 보여준다. 무대가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놀이터일 때, 강보람의 몸은 모래를 거칠게 튀기고 어지르며 무대를 어지럽힌다. “가만히”, “똑바로” 있으라는 억압이 육박해올수록 그의 몸은 그러한 명령에 불화하여 진동하고, 모래는 강보람이 이렇듯 외부와 충돌하는 지점들을 표시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대가 놀이터에서 바닷가로 전환되면, 강보람의 진동과 불균형은 이제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춤추고 유희하는 몸짓이 된다. 이때에도 강보람의 몸은 무대 여기저기에 자취를 남기지만, 더 이상 그 자취는 강보람의 불화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증명하는 사물이 된다. 이렇듯 강보람의 공연은 자신의 몸과 그 몸이 놓이는 공간, 그리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어선미 <추억정리>
반면 어선미의 <추억정리>는 무대에 남은 모래를 어선미가 정리하고 지우는 과정을 드러낸다. 세트에서 오래된 옛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동안 어선미는 모래먼지가 남은 무대의 바닥을 공들여 걸레질한다. 아무리 걸레를 새로 빨아도 바닥에는 또 다른 자국이 남고, 어선미는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재차 지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자취를 다시 그린다. 지난날의 자국을 닦고 지우는 일, 그러나 완전히 닦이지 않는 흔적을 바라보는 일은 과거와의 또 다른 조우를 만들어내면서 다시금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 사건이 된다. 그의 공연은 장애를 대상화하는 비극과 숭고의 서사를 비껴가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감정적 파동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온 어선미가 걸레질만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삶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도 손 내밀어 어제의 흔적을 돌보는 삶이며, 거듭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지워지지 않는 어제를 오늘의 마음에 새기는 삶이다.

[사진제공 : 장애인문화예술판, 극단애인]

삐딱-선
일자
2019.12.25(수)~12.29(일)
장소
성북마을극장
안무/연출
장원정
배우
금민정, 김미란, 김진옥, 박미용, 박병호, 이학현, 정은혜, 최종철
조연출
김한솔
예술감독
좌동엽
조명
정유석
작곡 및 음악
이보람
음향오퍼
최수임
의상
조은영
무대
손인수
무대크루
권민희, 김현정, 주은아
장애인문화예술 판
관련정보
http://www.artpan.net/notice/?uid=205&mod=document
1인 무대
일자
2019.12.30.(월)~12.31(화)
장소
대학로 이음센터
총연출
강예슬
드라마터그
이연주
출연
하지성 강희철 백우람 강보람 어선미
무대감독
권지현
안무 코치
노경애
보이스코치
최정선
무대제작
서울무대
무대
디자인 김민지
조명
디자인 김종석
사운드/영상
디자인 목소
영상촬영
변자운
사진촬영
권기호
그래픽
황가람
동시자막
이현주
화면해설
사운드플렉스
오퍼레이터
강보름 권지현
의상
박인선
분장
남혜연
진행
김은정
기획/홍보
홍민진 조주희
극단 애인
관련정보
http://www.i-eum.or.kr/u2/ubitec/cop/bbs/anonymous/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43&nttId=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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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빈

하은빈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미학을 공부했으며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 <질문들>, <플루토>, <2020 메갈리아의 딸들>, <무용수-되기> 등에서 글을 썼다. <연인들은 바닥없는 호수에서 헤엄친다>, <공연장의 장애인 재난대피 워크숍>,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등에서 무대에 섰다.
https://blog.naver.com/bingguu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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