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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프로토 휴먼의 고고학적 미래

권병준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 (로보트 야상곡)>

김정현

제176호

2020.02.20

인간의 얼굴에서 내면을 읽는다는 생각은 휴머니즘의 시대에 법칙과도 같이 전해져 왔다. 진실한 감정의 리트머스로서의 얼굴은 연극 무대에서, 아니 그보다 더 얼굴의 이미지가 압도적인 영화에서 중요한 담론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영화학자 자크 오몽에 따르면 얼굴이 투명한 인간성의 표현적 증거로서 인식되는 관념은 영화보다 앞선 회화의 역사에서 이미 한 세기 전에 굴절되었다. 얼굴은 해체되었다. 인간성의 표지를 벗고 사물이 되었다.
‘얼굴 오브제’라는 구상에서 기계 인간, 로봇의 존재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인간의 능력을 재현하여 그 기능을 주로 산업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로봇 개발에서 종종 로봇의 얼굴이 화두가 되는 것은 그러한 로봇의 발상 기원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닮은, 단지 기능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차원에서 모방하는 존재. 기능적 기계 장치가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상상은 수많은 픽션의 원천이 되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가상의 로봇은 현대화 과정에서 상실되고 훼손된 휴머니즘의 이상을 낭만적으로 촉구한다. 얼굴 오브제로서의 로봇이 역설적으로 얼굴의 인간성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권병준이 최근 플랫폼엘 라이브에서 선보인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 (로보트 야상곡)>에 등장하는 로봇들 역시 고전적 휴머니즘의 대리인처럼 보인다. 이 공연에는 무대 위에 배우 대신 총 열두 대의 로봇이 나온다. 모든 기계 장치가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사전 조작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두 사람이 수동으로 장치를 조작하는 인형술사 역할을 맡았다. 권병준이 제작한 로봇에서 인간 형상을 암시하는 요소는 크게 머리와 팔(외팔)이다. 손전등을 개조해 만든 머리로 인해 애니메이션 영화사 픽사의 로고인 탁상 전등 로봇의 2.0 버전과 같은 인상을 준다.
공연 시작 전 안내 방송을 기계음에 영어로 처리하여 거리감을 조성하나 했더니, 1번 로봇 ‘드로’의 서정적인 노랫말을 전반부에 곧바로 들려줌으로써 이 로봇들이 인간적 감정을 소외시키지 않을 것임을 일찌감치 밝힌다. 드로, 오트, 필립, 니엘, 고스 등. 작품 소개 글에 따르면 모든 로봇에는 고유의 이름이 있고, 노숙자, 거리의 악사, 밤의 정령과 같은 역할이 있다. 공연 안에서 이름이나 캐릭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손전등 머리를 기본으로 조금씩 설정이 다른데, 눈에 띄는 차이를 만드는 건 인간의 음성을 전자음과 섞은 노랫소리나 인형술사가 조작하는 사자 춤 같은 복잡한 움직임이 있는 경우다.
손전등은 권병준의 지난 작업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이라는 화두가 유행하며 많은 사람이 최첨단 기술, 특히 VR이나 AR에 주목하는 반면, 권병준은 일상적으로 익숙하고 저렴한 간단한 기계 장치에 주목해서 건축적 공간이나 주변 환경을 환기하는 작업을 보여 왔다. 2014년에 먼저 발표한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에는 손전등을 개조해서 만든 악기로 빛을 비추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손전등에 연결한 헤드폰을 통해 전자 사운드를 듣게 했다. 또한, 이번과 달리 무대 위에 퍼포머가 등장하여 직접 고안한 다양한 전자 악기와 장치를 조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 퍼포머가 등장하지 않는 이번 작업이 가장 반(反)기계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기계 장치는 그것을 ‘조작’하는 인간과 대비될 때 기계적 사물의 성격에 어떤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연주를 위한 악기로써 존재하던 때에는 인간 형상을 모방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보트 야상곡’에서 기계는 인간 형상을 지니고 서로 다른 인격적 개성을 부여받아 상호 관계를 형성하면서 존재론적 위상이 강조된다. 로봇만의, 기계만의 퍼포먼스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차원일 뿐,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 작업은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가치를 고수하는 인간 극장이다.
공연 후반, 무대 배경에 비친 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이 줌 아웃되며 화면에 나타나는 양팔 로봇은 이 공연의 주인공인 외팔 로봇과 대비되며, 그들의 미래 - 싸구려 인조인간이 값비싼 인조인간으로 대체되는 시대 - 를 지시할 수도 있고, 외팔 로봇의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과 동기화되어 싸구려 인조인간의 타자성을 환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권병준의 설명에 의하면 열두 대의 로봇은 “90년대 홍대 클럽신을 함께 한 동료들과 서울역 광장을 유랑하는 사람들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와 정상적 삶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 ‘12’라는 숫자는 의미심장하게 종교적 암시를 품고 있다.
로봇 시연회를 신기해할 사람이 아니라면 로봇의 등장 자체에 감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아방가르드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기치 아래 만들어진 수많은 지원 사업이 양산한 최근의 신기술 기반 멀티미디어 퍼포먼스도 공허한 기술 시연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예술이 로봇과 기계 장치를 통해 던지는 질문의 특수성은 무엇일까. 혹자는 기술 중심적인 사고, 또는 포스트 휴먼이라는 논의에 실려 오는, 인간에게 강제되는 경이롭거나 두려운 기계 장치의 존재에 손사래를 친다. 인간을 닮게 설계하였으나 인간을 뛰어넘거나 배반하는 기계 장치의 존재는 미학적 윤리에도 변화를 부를 것이다. 인간의 은유와 기계의 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사이. 양자의 모순을 발생시키는 섬뜩한 공연은 오고 있는가.

[사진 : 박태호]

권병준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 (로보트 야상곡)>
일자
2020.01.31 - 2020.02.02
장소
플랫폼엘 플랫폼 라이브
음악/연출
권병준
크리에이티브팀
문두성, 박태호, 오로민경, 이민경, ABJ
디자인
이강원
기술지원
김건호, 이다영
의상협찬
워킹클래스히어로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관련정보
https://platform-l.org/performance/detail?performanceNo=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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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김정현 미술비평가
동시대 미술의 수행적 측면,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기획을 한다. 2015년 동시대 퍼포먼스 예술에 관한 글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한 제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1세대 한국 미술 퍼포먼스의 반-재연 공연 <퍼포먼스 연대기>, 제작 조건과 과정에 반응하는 비평적 기획 연작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등을 발표했다. 아트인컬처, 미술세계, 월간미술, 퍼블릭아트, 다수의 도록에 비평문을 기고했다.
https://www.facebook.com/0.kimjung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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