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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 탐사 시뮬레이션의 하드코어한 진화

콜렉티브 뒹굴 <오퍼튜니티: →→ort→→>

김민조_연극평론가

제176호

2020.02.20

고도로 발달된 게임은 삶과 구분할 수 없다
컴퓨터 게임은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DB에 저장되기 때문에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롤플레잉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난이도를 가진 스테이지를 ‘세이브 앤 로드’ 신공으로 겨우겨우 격파하곤 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컴퓨터 게임은 인생과 결정적으로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지점으로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 게임은 혹독한 경쟁 사회를 표류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부활과 재도전의 환상을 선물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그라이크(Rogue-like)라는 게임 장르가 있다. 이 장르의 게임들은 잔인하게도 그러한 장밋빛 환상을 박살내곤 한다. 1980년에 출시된 게임 로부터 파생된 이 하위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영구적 죽음(permanent death)이라는 개념에 있다. 쉽게 말해서 한번 죽으면 끝이라는 것이다. 세이브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유저는 시스템을 해킹하는 반칙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이미 진행된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로그라이크는 유저에게 마치 인생을 플레이하는 듯한 긴장감과 신중함을 요구한다. 이 영구적 죽음이라는 요소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훗날 후배 격인 RPG 게임들에 하드코어 모드(hardcore mode)라는 이름으로 계승되기도 했다. 인생의 결함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컴퓨터 게임이 다시 그 결함의 상품성에 주목하는 아이러니한 양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콜렉티브 뒹굴의 <오퍼튜니티: →→ort→→>가 여타의 관객참여형 공연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로그라이크 장르에 비견되는 영구적 죽음에 있다.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을 지향하는 관객참여형 공연은 대개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창작자들이 설계한 공간, 상황, 세계에 관객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무언가 유의미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용자 경험(UX)에 대한 강도 높은 고려와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1회의 시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이런저런 안전망을 만들어두는 것도 그러한 배려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실패가 용인되거나 권장되는 환경, 관객이 자신의 주체적인 능력을 발휘할 여지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환경을 창안하는 것이야말로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전유하는 공연들의 이상적인 목표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콜렉티브 뒹굴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퍼튜니티: →→ort→→>가 구축하는 세계는 관객의 실패를 질책하고 심문에 붙이며, 그들의 ‘주체적인 무능력’을 들추어내는 세계이다. 관객은 인사미술공간의 지상층과 지하층을 오르내리며 디바이스를 통해 송달되는 미션을 수행하다가 갑작스러운 죽음(sudden death)을 맞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역할로서 수행하고 있던 로버가 다른 관객들의 투표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기업에서 날리는 해고 문자처럼 일방적이고, 로그라이크 게임처럼 비가역적이다. 소명이나 항변의 기회조차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폐기 처분을 받은 관객은 인사미술공간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퍼튜니티: →→ort→→>는 공연 내부에서 메시지를 생산하는 종류의 공연이라 볼 수 없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공연장에서 쫓겨나는 경험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적 사건으로 각인된다고 말하는 편이 타당하다. 물리적인 외력에 의해 쫓겨났다면 모를까, ‘다른 로버들의 민주적인 결정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알리바이가 엄연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제작진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관객은 로그라이크 게임이 남기는 것과 유사한 교훈을 쓰게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인생은 원래 이런 거였지.
탐사의 기쁨과 피로 사이의 막간극
<오퍼튜니티: →→ort→→>는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공연이 아니다. 2019 인사미술공간 주제기획 프로젝트 <막간극>(carpenter’s scene)에 참여한 다른 창작팀들처럼 콜렉티브 뒹굴은 기존에 수행해온 작업들을 메타적으로 전유하는 작업으로서 이 공연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공연에는 2019년 동안 콜렉티브 뒹굴이 ‘화성 탐사 로버’라는 공통된 소재를 두고 상연했던 여러 차례의 공연들, 그리고 각각의 공연에서 식별되었던 이질적인 기조와 목적들이 다채롭게 얼비치고 있다. 그 두꺼운 맥락의 층을 한번 탐사해보도록 하자.
첫 단추는 2019년 5월 10일에 있었던 워크숍 공연 <화성 탐사선, 오퍼튜니>였을 것이다. [화학작용 4] 페스티벌의 연습실 오픈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이 참여형 워크숍은 관객들이 청년청 건물 내부를 오르내리며 여러 가지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객이 스스로를 화성 탐사를 위해 파견된 쌍둥이 로버들과 동일시하며 주변 공간들을 관찰하고 탐험해나간다는 콘셉트는 이때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시리즈에도 동일하게 계승되는 양상이지만, <화성 탐사선, 오퍼튜니>는 기계-로버의 관점과 인간-예술가의 관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자에 초점을 둔다면 낯선 공간을 탐사해나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설렘과 기쁨이, 후자에 초점을 둔다면 언제 끝날지도 모를 탐사를 기약 없이 반복해야 하는 창의노동자들의 피로와 허무가 도드라지게 된다.
2019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상연된 <오퍼튜니티>와 그 부대 행사로 기획된 <스피릿-되기>는 이 구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다. <오퍼튜니티>는 숙련된 퍼포먼스를 통해 주어진 환경 공간을 느끼고 탐색하고 표현하는 인간 신체의 역량을 최대치로 뽑아낸 공연이라 할 수 있다. 창의노동자들의 피로와 허무라는 테마는 디오뉘소스적인 제전의 열기가 사그라든 직후, 마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뒤늦게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1) 이와 대조적으로 참여형 워크숍 <스피릿-되기>는 <오퍼튜니티: →→ort→→> 공연에 가장 근접한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목상으로는 문화비축기지 T2 일대의 공간을 탐사하며 감각을 일깨워가는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실상 탐사 본부에서 하달되는 미션을 완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관객은 마치 침묵하는 세계 앞에서 창의노동자들이 부딪힐 법한 난경의 순간에 반복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오퍼튜니티보다 먼저 화성에 파견되었으나 성능 면과 성취 면에 있어 오퍼튜니티보다 못하다고 평가된 탐사 로버 스피릿의 처지를 관객이 ‘몸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퍼튜니티: →→ort→→>는 화성 탐사 로버 시리즈에 내속해온 테마들 중 가장 크리티컬한 지점, 하지만 래디컬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지나쳐야 했던 ‘막간’의 시점으로 부득부득 돌아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루인은 <오퍼튜니티: →→ort→→>에 대한 리뷰에서 그 막간의 지점을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논리 앞에 선 개인이 ‘당혹감’을 사유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2) <오퍼튜니티: →→ort→→>이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잔인한 경쟁 사회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 논리에 연루되어 있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들추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관객참여형 공연이라는 ‘게임화된’ 연극이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안전하고 아름다운 교감만을 추구한다면, 시원찮은 로버를 폐기하는 데 찬성 버튼을 누른 손가락(의 주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오퍼튜니티: →→ort→→>는 연극에서 말하는 ‘소격 효과’가 관객참여형 공연 버전으로 나타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게임(연극)에 대한 몰입을 깨뜨리는 순간 리얼리티의 침범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게임을 인생의 도피처로 생각할 수도 있고 공연예술을 현실의 안전한 모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콜렉티브 뒹굴이 선택한 것은 공연이라는 불투명한 껍질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냉엄한 논리, 너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지만 유독 공연을 볼 때만은 모른 척했던 그 잔인한 논리에 의해 이 예술 사회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오퍼튜니티: →→ort→→>의 의도와 맥락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마지막으로 공연에 참여했던 한 명의 관객으로서 말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필자는 <오퍼튜니티: →→ort→→>의 모든 미션을 완수하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부끄러운 쾌거(?)가 가능했던 이유는, 탐사 도중에 디바이스를 통해 날아온 폐기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탐사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감히 탐사 본부의 명령을 무시한 로버를 체포조가 잡으러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점이 나는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오퍼튜니티: →→ort→→>는 분명 불친절한 공연이다. 그러나 콜렉티브 뒹굴이 수행해온 일련의 작업들을 보더라도 그렇고, 이번 공연 역시 모종의 츤데레 끼를 느끼게 하는 면이 있다. 콜렉티브 뒹굴은 함부로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나약한 휴머니즘이나 얕은 수준에서 달라붙을 수 있는 위로성 공감 같은 것을 냉정하게 배척한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많다. 나는 그러한 태도가 좋은 의미에서(두 번 강조) 힙스터적 윤리에 근접한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고, 각자의 짐과 고독은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맞다. 만약 당신과 내가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사건일 것이다. 콜렉티브 뒹굴이 디자인하는 관객참여형 공연에서 관객은 대개 헤드폰을 끼고 디바이스를 들여다보는 ‘고립’의 상태 속에서 각자의 미션을 수행하게 되며, 관객 간에 서로 의논하거나 상의하는 행위는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필자는 그것이 콜렉티브 뒹굴이 관객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세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뒹굴식 공연의 지향점은 궁극적으로 혼자됨의 시간 속에서 사회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통감각에 이르는 순간들을 창조해내는 데 있는 것 같다.
<오퍼튜니티: →→ort→→>는 ‘민주적인 동의’를 통해 누군가를 폐기하는 이 잔인한 사회를 시뮬레이션하는 공연이 맞다. 그러나 필자가 느낀 것은 그 잔인성에 대한 공통감각 너머에 있는 모종의 갈망이었다. 만약 콜렉티브 뒹굴이 보다 공리적인 이벤트를 추구했다면 공연 이후에 폐기된 로버들의 감정을 수습해주는 시간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콜렉티브 뒹굴은 현명해지는 대신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는 태도를 지키는 선택을 한 것 같다. 필자는 그것이 바로 힙스터적 윤리에 속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탐사 본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반에 가까운 생존을 선택한 것은 이 공연의 제작진이 ‘네가 어떻게 대응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나올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퍼튜니티: →→ort→→>가 관객의 대응 가능성을 더 열어놓는 방식으로 고안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절한 게임의 문법을 혁파하는 것을 넘어서 불친절한 게임의 문법을 제안하는 공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어쭙잖은 희망을 내려놓고 너와 내가 놓여 있는 동종의 외로움을 감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새롭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오퍼튜니티: →→ort→→>에서 간취했던 것은 이 꽉 짜인 사회에서 관객이 자기 자신으로서 사고하고 결정하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그러한 욕망의 동일성을 경유해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아이러니한 갈망이었다.
* 리뷰의 제목인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는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대사에서 차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사진제공 : 인사미술공간]

  1. 김민조, 「탐사하는 기계, 인간의 공진화(coevolution)」, 인디언밥, 2019. 10. 10.
  2. 루인, 「당혹감을 사유하기: 참여형 공연 “Opportunity: →→ort → →”」, 드라마인, 2020. 2. 6.
인사미술공간 “막간극” 콜렉티브 뒹굴 <오퍼튜니티: →→ort→→>
일자
2019년 12월 28일(토) 1, 3, 5 PM
장소
인사미술공간
퍼포머
콜렉티브 뒹굴(김정은, 부진서, 성지수, 유솔범, 김건우, 이준영)
제작
콜렉티브 뒹굴
관련정보
https://www.arko.or.kr/infra/pm1_04/m2_02/m3_02.do?&mode=view&page=&cid=537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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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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