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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꽃길의 양쪽 끝

글과무대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김은한

제176호

2020.02.20

12살 때 학교에서 장래의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짝꿍은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세계를 여행할 것이고 자식은 입양할 것”이라고 했다. 겸상하는 집안이라서 어머니와 둘이서 따로 밥을 먹는다고 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할 때 “결혼하면 사랑은 차후에 따라오는 거야.”라는 대사에 관객이 많이 웃었다. 나는 매번 그 대목이 심란했다.
법적 파트너와 영속적인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만드는 것, 결혼이라는 제도다. 각자가 떠올리는 것도, 무게도, 선택의 이유도 제각각이다. 느낌이 와서, 당연한 과정이니까, 행복을 위해, 주거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협동조합을 만드는 생존 전략으로서. 그런데 그 관계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2020년 두산 아트랩 선정 작품인 글과무대의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결혼을 둘러싸고 관계를 고민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글과무대의 세 극작가 황정은, 진주, 최보영은 인물의 관계를 나누어 갖고 집필한 뒤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극장에는 길이 하나 있다. 신랑 신부가 지나가는 이 꽃길은 어느 곳으로도 이어져 있지 않다. 그 길의 끝에는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 관계를 맺게 될 배우가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관객은 길 양쪽에서 모든 과정을 바라본다.
희수(37세 영화 폴리 아티스트)는 남일(40세 건축사)과 불같은 사랑을 하고 결혼 4년 만에 이혼한다. 9년 뒤, 딸 수이는 12살이 되었다. 희수의 아버지 갑구(75세 여행사 운영)와 그 애인 윤숙(57세 부동산 중개업)은 희수의 결혼에 관심이 많다. 남일은 애인 여은(35세 시간강사)과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한편, 희수의 애인 재훈(34세 교사)은 결혼 생각이 없는 희수에게 매달린다.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기 때문에 인물관계도를 보지 않으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각 인물을 뚜렷하게 구별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민조차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고민은 계속 점멸하며, 흐릿하고 명확하고, 당연하고 생소해진다.
1. 희수와 재훈과 지나의 이야기
재훈이 원하는 것은 (희수와의) 결혼이다. 희수는 다신 결혼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정의할 수 없는 관계에 굳이 무거운 추를 다는 행위가 결혼이 아닐까? 서로를 번갈아 안아 들며 한쪽 끝으로 나아가는 안무는 동등한 힘과 중심으로 서로의 무게를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희수는 수이를 돌봐야 하기에 재훈과 밤을 보낼 수 없다. 재훈은 결혼을, 상대의 시간이 산사태처럼 자신에게 쏟아지길 원한다.
재훈에게 다가오는 지나(33세 교사). 이 작품에서 ‘바람’, ‘불륜’, ‘양다리’ 등으로 불리는 행위는 갈등요소라기보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다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다. 지나 역시 결혼을 원하지만 지나와 재훈은 결혼 비용 문제로 갈등한다. ‘네이트판’을 즐겨보는 관객이라면 서늘한 기운을 느낄 것이다. 감성적이고 예민한 재훈은 어느새 ‘무시당하지 않기’, ‘도리를 지키기’를 지나, ‘하여간 기분이 별로’를 넘어 ‘사랑한다면 어른들께 점수 좀 따’에 도달한다. 결혼 비용을 공평하게 부담하기 위해 고민하는 지나는 차분하게 “결혼은 현실이야, 동의해?”라고 묻는다. 재훈의 가문이 1년에 제사를 6번 지낸다는 사실은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극 전체를 둘러싼 촘촘한 대사가 배우들의 리듬과 만나 깊이 몰입하게 된다.
2. 남일과 여은과 선웅의 이야기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남일은 늘 심신이 조급하다. 여은은 교수에게 시달리는 시간강사로 주거가 고민이다. 행복주택 퇴거일과 함께 불안함은 점점 다가온다. “네 곁에 내가 있다”고 큰소리쳐봤자, 네가 내 몸 뉠 곳은 될 수 없다. 여은은 선웅(29세 대학원생)에게 끌린다. 선웅은 심신이 건강하며 기술적 측면에서 배려심도 있다. 하지만 그는 선배 작업실 구석에서 라꾸라꾸를 깔고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여은은 아기가 생기면 경력이 단절될까 두렵다. 두 사람은 위태로운 미래를 애써 내쉬며 지금만을 생각한다. 위기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강의가 줄고, 카드빚을 제때 막지 못해 수이와 함께 먹을 족발 보쌈세트도 간신히 계산한다. 선웅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지갑도, 의복의 통일성도 없이 맨몸으로 달려오는 수밖에 없다. 왜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느냐는 수이의 질문에 선웅은 ‘그건 미래를 가져다 쓰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여은은 속이 쓰리다.
여은은 딸기가 좋고 딸기우유는 별로다. 거기엔 향만 남아있다. 행복은 없고 행복한 느낌만 남아있는 관계처럼. 남일은 여은에게 돌아와 결혼과 주거를 제안한다. 그는 ‘실존적 욕구불만’으로 오로지 자신과 잠자기만을 원하는 시무룩함을 솔직히 드러낸다.
3. 희수와 윤숙과 갑구와 남일의 이야기
희수의 작업실 겸 집에 불쑥 찾아온 윤숙은 갑구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이 거슬린다. 윤숙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걸 대량의 정돈된 어휘로 승화시키는데 뛰어나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상처에 흙발로 들어온다. 곧 희수의 어머니 문자의 기일. 문자도 희수도, 갑구와 윤숙이 불륜으로 만났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와 있을 때 제일 나 다울 수 있었지?”라는 희수의 자문자답은 자신에게 수많은 관계의 이름과 역할의 가면을 씌운다. 아주 오랜만에 불쑥 찾아온 남일. 왜 올해는 문자의 기일이 특별히 기억이 났을까? 남일의 아버지가 위독한 탓일까?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서 서로를 다시 본다는 건 무거운 숙고가 필요하다. 희수는 폭발한다. 왜 다들 항상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가? 상황에 맞춰 살아왔을 뿐인데 왜 ‘변했다’라며 이혼해야 했을까? 왜 염치도 없이 찾아와서 ‘예쁜 일’을 요구하는가? 짐을 버려도 되냐는 재훈의 연락은 희수를 더 몰아넣는다. 물론 이 상황에 통렬한 위로를 던져보는 것은 우리의 자유분방한 피터 팬, 갑구다.
이 작품에서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고민에는 결말이 없고 다만 소강상태에 접어들 뿐이다. 수이에게는 이들의 고민이 아직 멀거나 존재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수이의 연애는 독점적이지도 않고 항구적이지도 않다. 갑구의 입으로 전달되는 수이의 말은 아주 오래 마음에 남으며 생각하게 한다. “섣부른 약속은 관계의 본질을 흐리는 법이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일자
2020년 2월 13일~2020년 2월 15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황정은 진주 최보영
연출
이인수
출연
박세정 차은수 김수아 양나영
기획·제작PD
전민서
조연출·조명디자인
송진주
무대디자인
송지인
음악·음향 디자인
이승호
조명오퍼레이터
이한다
음향오퍼레이터
조원재
움직임
권영호
글과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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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3년 남은 계획

8~9월 스튜디오 나나다시와 <스탠드업 씨어터> 진행 중
10월 신작 구상 중
12월 지금 아카이브와 코미디 캠프를 궁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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