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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웃음, “시인의 마음으로” 귀가하던 날

<2020 코미디캠프 : 틈 X 김진아>

김미정

제183호

2020.07.23

웃음이라는 고도의 상호작용
마스크로 무장한 관객과 적당한 거리의 좌석들, “목숨을 걸고” 무대에 섰다는 배우의 너스레. <2020 코미디캠프 : 틈>으로 들어가는 초입은 확실히 우리가 어떤 시대에 무엇 때문에 모인 것인지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제목에서부터 웃음을 주제화한 장르임을 언표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흉흉한 시대의 우울과 긴장을 잠시 떨치고 정서적 무방비 상태를 맘껏 누려도 될 것이었다. 이 관객들은 다른 어떤 때보다도 더 웃을 준비가 된 이들이었다 해도 좋았다.
하지만 웃음이란 그렇게 쉽고 간단히 주고받아지는 것만도 아니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통념은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종종 웃음은 고도의 상호작용이며 일정한 회로, 메커니즘을 갖는다. 웃음은 무심코 터져 나오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어떤 해방감이 향유되기도 하지만, 그 무목적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호흡을 만드는 일이란 결코 녹록지 않은 것이다. 작품의 가장 큰 관건은 어쩌면 웃음을 만드는 타이밍, 방법, 윤리는 물론이거니와,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정동을 늘 매번 함께 만들어야 하는 현장감에 있었을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재현의 요구? 가로지르기!
스탠드업 코미디를 표방한 이 공연은 배우 신강수의 1인극으로 시작한다. 관객의 열기가 고조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스타로, 관객을 팬으로 규정하며 일종의 역할극을 제안할 때부터다. “난 너희들의 스타야.”라는 말은 주술이 되어 관객을 그의 팬클럽으로 전환시키며 실제 스타와 팬 사이 상호 열망의 지렛대로 작동한다.
신강수의 연기는, 신체적 특징, 장애와 같이 일상에서 민감하거나 정치적 사안과 결부되기 쉬운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소위 장애나 신체적 특징을 웃음의 소재로 다룰 때, 그것이 전형적인 대상화, 타자화의 폭력에 근거하여 유발되는 웃음이었음을 많은 이들은 기억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오늘날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재현의 요구와 결부되기 쉬운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강수는 그런 사정을 과감히 횡단한다. 웃음의 미학과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제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관객을 능수능란하게 움직인다. 이것은 당사자의 자기재현은 언제나 윤리적일 것일 것이라는 식의 다소 게으른 통념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유머는, 다루는 소재의 경험에 근거한 장악력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소재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통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령, 그가 코미디 배역에 대한 애환을 이야기하면서 코미디 연기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진지하게 토로할 때 관객은 함께 진지하고 숙연해진다. 그런데 신강수는 그 진지함과 숙연함의 정체와 복잡함을 이미 안다. 그리고 곧바로 폭소로 일갈한다. “(이렇게 숙연해지면) 내가 진짜로 코미디를 그만두기를 원하는 것이냐”고. 그는 코미디 소재에 대한 관객 안의 양가성(복잡함)을 간파하고 그것을 여러 번 반전시킨다.
그의 연기가 ‘테드(TED)’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강연 같다는 의견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관객들 스스로가 자기 웃음의 메커니즘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에서의 부수적인 자각일 따름일 것이다. 그의 너스레에 몰입한 관객의 폭소는, 사실 정상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우리가 은연중 어떻게 이중구속되어 있는지 스스로를 폭로시키는 웃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의 난장(亂場) : 카프카와 폭소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지인들과 낭독하며 종종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카프카 개인의 기질이나 작품의 숨겨진 비의(秘意)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어쩌면 향유방식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것인지 모른다. 요컨대, 묵독(默讀)이라는 근대적 향유 방식이 고독하게 읽는 개인의 내면에 상응한다면, 음성이나 몸짓 언어로 향유하는 방식은 타자들, 혹은 공동체의 정동과 직접 관련된다.
그러므로 두 번째 무대를 여는 배우 김은한이 코미디계의 소위 “틈새시장”을 노리겠다고 밝힌 농담 혹은 진심은 썩 일리 있는 것이었다. 그는 카프카의 짧은 우화소설들을 일종의 퍼포먼스 아트로 재탄생시킨다. 카프카의 소설이 인간의 실존과 불안, 세계의 부조리를 주제화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얼마나 유머나 웃음이라는 주제와 호환되기 쉬운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무대는 독수리에 발을 쪼이며 고통받는 이의 비명으로 시작한다. 지나가는 이가 총알 한 방으로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 가서 총을 가져와야 하고, 20분이 걸린다고 한다. 그 대화를 들은 독수리는 고통받는 이의 입안 깊숙이 부리를 찔러 넣는다. 그리고 “독수리가 내 몸 안에서 잠겨 죽어가는 걸 느낄 수 있다.”는 대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카프카-김은한’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독수리」에서 시작하여 「프로메테우스」, 「황새」, 「파발꾼」, 「황제의 전갈」, 「늙은 거지」, 「법 앞에서」로 이어지는 각 작품의 연쇄에는 어떤 연결의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 연쇄를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김은한의 자유 연상에 가까운 능청스러운 요설일텐데, 그것은 카프카라는 오리지널리티와 김은한의 픽션 사이 경계를 만들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는 역할도 한다.
카프카의 짧고 건조한 우화들이 김은한의 몸짓과 발성과 대사의 옷을 입으며 점점 피와 살을 갖게 되고 관객들은 눈앞의 장면들에 점점 동화되고 투항해버린 즈음, “20분 지났어. 독수리 어딨어요?”라며 총을 가지러 갔던 첫 장면 남자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리고 장전 후 “하나, 둘, 셋!” 카프카가 자기 글을 두고 “조잡하기 짝이 없으며 동시에 무의미하다.”고 했던 것에 대한 충실한 재창조. 그 의도를 배반한 관객의 왁자지껄한 폭소. 20분으로 예정된 그의 시간이 이렇게 끝난다.
한 유쾌한 차별주의자의 농담과 진심
낯선 장소에서 사적인 이야기나 농담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지 아닌지야말로 그곳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를 암시할 때가 있다. 말을 갖고 있다는 것, 말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곧 권력의 문제라는 것은 종종 비유가 아니다. 어쩌면 스타성에 기반한 최근 스탠드업 코미디도 구조적으로는 이러한 위계에 대한 암묵적 합의 없이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무대의 주인공이 충분히 유명하다고 가정된 상황이라야 사사로운 이야기들조차 공감대를 형성하고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무대에 등장한 안담이 다른 배우들과 달리 커다란 마이크를 들고 “제가 오늘 유명하기로 정했다.”며 관객과의 또 다른 역할극을 제안할 때, 이미 그녀의 극이 이러한 촌철 블랙유머로 가득 찰 것임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명명의 효과, 언어의 수행성은 그녀의 무대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집에서 키우는 화분의 개수, 불면증과 명상, 다양한 주변인들과의 에피소드 등이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쉬임없이 흘러나올 때, 관객은 그녀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픽션이고 어디까지 논픽션일지 가늠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게다가 그녀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이야기들이 언뜻언뜻 환기시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저 휘발적인 웃음으로 소비할 수만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예컨대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차별, 편애, 배제, 예외를 좋아한다’며 가뿐한 위악의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저는 차별을 좋아해서 2018 고용차별보고서를 봐요. 여성임금, 장애인임금 계산하니 지금 20분 말할 게 아니라 13분 45초만 말하면 되고...” 즉, 지금 ‘차별을 좋아한다’는 말은 그녀의 담화맥락에서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그 순간 터지는 관객의 웃음은, 발화된 말과 실제 의미의 불일치를 확인하고, 일상 속 통념이나 말이 재전유되는 통쾌함을 확인할 때의 웃음이다.
나아가 그녀의 발화는 더 적극적으로 관객을 그 웃음의 조건에 연루시킨다. 20분 주어진 그녀의 배역 중, 여성임금에 근거하여 산출된 휴식 시간 6분 15초는 실제 배우의 휴식으로 채워지고(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입담 노동의 휴식일 뿐 그녀의 연기 노동은 계속 된다) 관객 역시 그 과정에 함께 참여한다. 산업노동과 예술노동의 질적 차이가 거의 사라진 듯 보이는 시대의 예술, 예술인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시스템에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의 예술가... 배우 안담의 유쾌한 무대는 웃음의 잔상 뿐 아니라 이런 질문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판데믹 시대의 신(新)데카메론들
넷플릭스로 상징되는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가 현장감에 기반한 기존의 문화예술을 잠식하리라는 기대/불안조차 사실은 일면적인 진단일지 모른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대체될 수 없는 물리적 부대낌의 경험이 필요하고, 보이지 않는 숨과 기운을 주고받는 순간순간의 사건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든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무언가를 공유하게 한다.
중세, 창궐하던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근교 시골에 10명 사람이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바깥세상과 격리되었지만 매일 서로가 이야기를 풀어내며 근근이 날짜를 셈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지금도 곳곳에서 쓰이고 있을 것이다. 7월 초 신촌의 한 주택가 건물 4층도 그러했고, 그곳에서 관객, 배우 모두 경험한 것은 이 어렴풋한 연결의 든든함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야기와 웃음은 곧 연결이고, 그것은 힘이 세다. 오랜만에 “시인의 마음으로”(김은한) 흐뭇하게 귀가한 이는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한 책 : 프란츠 카프카, 이준미 옮김, 『여행자 예찬』, 하늘연못, 2011.

[사진 제공: 지금아카이브 ⓒ이종우]

2020 코미디캠프: 틈 X 김진아
일자
2020.07.02.(목) ~ 07.11.(토)
장소
신촌극장
작/출연
김은한, 신강수, 안담
음악
배선희
기획/예술감독
김진아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theatresinchon/posts/358616136807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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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김미정
주로 문학, 예술 관련 작업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움직이는 별자리들』(201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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