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완성되지 않을 유언장과 계속될 농담을 위해

여기는 당연히, 극장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장영_극작가

제185호

2020.08.20

이 연극을 채우는 농담이 아닌 농담들은, 아주 복잡한 결을 지닌 이 농담들은, 소수자로 살아온 사람이 가진 깊은 상처의 역사 속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관객석에 앉아서 여섯 편의 희곡에 등장하는 이 농담들이 아주 단단하고 영민하게 자라났다고 느꼈습니다. 이 연극의 농담들은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상대를 끌어안으려 했습니다. 극장을 나설 때쯤에는, 이 연극의 농담 아닌 농담들이 꼭 웃으면서 하는 기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신(神)이 아니라, 혐오하고 배제하는 신이 있다면―정말로 그런 신이 있다면―그런 신에게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차라리 우리에게 하고, 우리가 듣는 그런 기도일 겁니다.
배제하지 않겠다는, 오래 준비된 마음
이 연극에서는 공적 영역에서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겠다는, 오래 준비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이 공연이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시스젠더, 모든 소수자에게 닿았으면 좋겠다’(작가의 글, 이은용)는 작가의 마음, 이 공연이 닿는 ‘우리’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려는 마음이 충분히 전해지는 물리적 환경을 만났습니다.
장애학자인 로즈메리 갈랜 톰슨은 장애와 장애를 둘러싼 환경의 물질적 배치로서의 상호 불일치에서 미스핏(misfit)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미스핏은 보통의 몸(normate)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계된 물리적 환경이, 몸의 형태와 기능을 뒷받침하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점자 보도블록이 부재한 인도, 자막이나 수화통역이 없는 방송 등이 그 예가 됩니다. 반면 핏(fit)은 몸에 조화롭고 적절한 환경 조건이 제공될 때 발생하며, 인간이 세계에 방해받지 않고, 시각적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생활할 수 있게끔 합니다. 로즈메리 갈랜 톰슨은 장애인이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도 핏(fit)의 상태에 놓일 수 있도록, 몸이 아닌 물리적 환경을 바꾸어놓는 것을 장애 정치학의 기본적 전제로 둡니다.1)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연극은 배리어 프리 공연을 꾸준히 시도해왔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핏(fit)의 상태에 놓일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이르러, 배리어 프리 공연을 위한 수어 통역, 자막, 음성해설 등은 연극의 내용과 분리되지 않는 예술 형식으로서 협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무대에는 큼지막하게 자막이 제공되고, 수어 통역사 두 명이 무대에 있습니다. “저는 전박찬입니다. 아아! 머리는 밝은 색으로 염색했고 의상은 올 블랙입니다. 라운드 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있고 레깅스 위에 치마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등장한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과 목소리를 들려주고, 의상 소개를 합니다. 장면이 진행될 때는, 장면에 개입하지 않는 배우(들)가 장면 속 배우들의 행동을 음성 해설해줍니다. 예를 들어 “가슴을 편다” “상체를 위아래로 꿀렁인다” 처럼요.
2장 <월경>에서, 계속 여행 중인 에프티엠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 트랜스남성) 진희는 4주에 한 번씩 맞아야 하는 테스토스테론을 그만 ‘깜빡’해, 월경(月經)하며 월경(越境)합니다(농담). 마침내 진희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는 순간, 배우들의 댄스가 시작됩니다. 이때 수어 통역사들도 댄스 실력을 드러냅니다. 점점 수어 통역사들의 움직임과 존재감이 이 공연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미스핏(misfit)을 겪는 몸들이 핏(fit)해질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고 상상하다 보면, 공연 형식에서도 매우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에프티엠트랜스젠더’의 생활 체험을 외치고, 듣다
로즈메리 갈랜 톰슨에 따르면 미스핏(misfit)의 상황은 인간의 잠재적인 취약성이 발현될 수 있는 상황으로, 여성혐오자로 가득한 회의실, 질병 혹은 상해를 입은 상황, 백인만 참여 가능한 컨트리클럽 등으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2) 지금 한국에 사는 에프티엠트랜스젠더 당사자인 작가 이은용의 희곡 여섯 편을 연극으로 만들었을 때, 이 캐릭터들이 말하고 있는 생활 체험은 끊임없는 미스핏(misfit)의 연속처럼 느껴집니다. “몇 년 전까지는 -아직도 그런가요?- 정신과에 먼저 가서 한 이십만 원 하는 검사를 받아 진정한 트랜스젠더임을 인증 받으면 성전환증 진단 서류가 나왔습니다”라는 진희의 말(<월경>) 혹은 “이 서류가 말하길 당신은 여성이라고 하는데요, 실례지만, 당신은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데, 이게 본인이 맞나요?” 라는 공항 직원의 말(<월경>), “내가 남자 병동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환자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대. 내가 다른 환자들에게 위험할 수도 있고, 내가 다른 환자들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고”(<이인실>) 그런 이유로 정신병동 2인실에 들어와 핑크색 환자복을 입게 된 에프티엠트랜스젠더 D의 말, 장례식에 내 부모나 가족들이 개입할 경우, 절대로 내 세례명(김 레지나)을 장례식에 쓰지 않기를 바란다는, 굳이 남성형으로 바꿔 부르지도 말라고 하는 에프티엠트랜스젠더 C의 유언장에 적힌 말(<우리는 문을 두드린다-부제-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등에서, 캐릭터들이 매 순간 겪는 미스핏(misfit)한 체험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인실>에서 캐릭터들이 당연하다는 듯 외우고 있는 아빌리파이정, 자나팜정과 같은 구체적인 정신과 약물의 이름들이나 “트랜스젠더인 걸로도 부족해서 정신질환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D의 말은 정신장애 당사자로서의 생활 체험 묘사에서 드러나는 가장 생생하고 아픈 감각일 겁니다. 
에프티엠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생활 체험이 드러난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연극은, 트랜스젠더를 ‘연기’할 수 없다는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며 출발합니다. 그래서 동물 소리를 내거나, 끊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대사를 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다큐멘터리적 재현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거절하는 것 같습니다.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계속 함께입니다. 극장의 벽을 뚫고 극장의 바깥까지 뻗어나갈 것 같은 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소수자의 생활 체험이 담긴 말들과 만났을 때 갖는 힘은 놀라울 정도로 컸습니다.
온통 검은색으로 된 무대에는 ‘여덟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 하나가 있습니다. 배우들이 일렬로 앉아 트랜스젠더 캐릭터의 말들을 극장이 터져나가도록 외치고 있는 모습은, 들리지 않았던 소수자의 말들을 공적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발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때 생활 체험의 부분들과 (농담이 아니기도 한) 농담들은 경중 없이 존중되는 것 같습니다.
장면에 개입하지 않는 배우들은, 장면 속 배우들의 행동에 대한 음성해설자이면서 동시에 장면의 말들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들의 말을 경청하는 배우(들)의 존재는, ‘공적 발화’에 대한 연출적 고려가 ‘듣기’에 대한 고려로 확대되는 지점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적 공간에 어렵게 모습을 드러낸 소수자, 발화 주체에게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3)기 때문입니다. 이 연극에는 더욱 잘 듣기 위해 먼저 말을 거는 타인의 존재도 있습니다. <이인실>에는 자신을 개라고 생각하라고, 그럼 자신에게 온갖 말을 다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하는 E,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에프티엠트랜스젠더 D에게 말을 걸어오는 E가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아주 건조하게 소리치는 두 사람의 어려운 대화, 너무 깊이 묻고 너무 많이 듣는 것만 같은 대화가 끝날 때, 극한까지 몰려 머무르게 된 정신병동에서까지 차별을 당했던 D는 ‘너랑 얘기하면 도움이 돼’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저는 이 연극들의 농담들에, 슬픔과 분노의 역사에 대한 증언이 겹쳐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너무나 많이 받다 보니, 에프티엠트랜스젠더 진희는 첫음절만 듣고도 질문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호) 아, 호르몬의 작용. 일단 목소리가 낮아져요.”라는 식으로요.(<월경>) 이런 진희가 ‘암 언 아티스트 앤 트렌스젠더’가 국경을 통과해 월경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라고 말할 때, 자신을 또 다시 문 앞에 세우고야 마는 공항 직원에게 ‘암 언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 라고 말할 때, 이 되받아치는 듯한 농담 아래에도 증언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편견과 배제가 만들어온 슬픔과 분노,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본 사람의 역사가 그 농담 같은 뉘앙스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들을 듣고 관객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웃을 수 없었던 역사를 농담으로 가시화하겠다는 결심까지도 전해 받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속 문을 두드리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감각이며, 자신의 장례식장에 무지개 깃발을 걸어 달라고 유언하는 사람의 감각입니다.
저는 이 연극이 두려움 속을 살고 있는 누군가의 삶의 궤도를 조금씩 수정해놓았을지 모른다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계속 고치고 싶다고 말했던 에프티엠트랜스젠더 C의 유언장이 완성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의 농담이 계속되기를 희망하며, 장맛비 속에서 춤추고 있는 변신한 소년을 꿈꾸며 이 글을 씁니다. 죽지 않고, 계속 고치는 삶을 위해서도요.
#참고한 글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 봄, 2019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 박씨, 2020,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손홍일 옮김, 『보통이 아닌 몸』, 그린비, 2015
이선민·송지은, 「문학적 장애재현의 물질성과 생성력 -미스핏(misfit)과 비체(abject)이론을 중심으로」, 『장애의 재해석』(2018) : 2-45
일라이 클레어, 전혜은 · 제이 옮김, 『망명과 자긍심』, 현실문화, 2020
  1. 이선민·송지은, 「문학적 장애재현의 물질성과 생성력-미스핏(misfit)과 비체(abject)이론을 중심으로」, 『장애의 재해석』(2018), 2-45쪽.
  2. 위의 글.
  3.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 박씨, 2020, 216쪽

[사진 제공: 여기는 당연히, 극장/ 성북문화재단 ⓒ혜영]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일자
2020.07.23. ~ 2020.08.02
장소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이은용
연출
구자혜
출연
최순진, 조경란, 전박찬, 이리, 성수연, 박수진, 나경호, 김효진
수어통역
김홍남, 최황순
음성해설대본
강내영
무대/조명
여신동
사운드
목소
의상
우영주
분장
장경숙
조연출
조민영
무대감독/조명오퍼레이터
박진아
자막제작/오퍼레이터
이효진
디자인
파이카
영상
삼인칭시점
사진
혜영
기획/홍보
협동조합 고개엔마을, 희왕, 이채원(홀연), 이민영
주최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주관
성북문화재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련정보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roupCode=20005052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장영

장영
극단 프로젝트 414 연출부, 독립연극잡지 이화연극의 필진으로 활동했다. 2018년 국립극단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 희곡공모에서 『G의 영역』이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 playplayghost@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