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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비늘, 생각의 편린들

연극연습 프로젝트 <연극연습 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

손옥주_공연학자

제197호

2021.03.25

- 리뷰를 쓴답시고 어떤 단어를 선택하든, 그 오밀조밀한 말의 연쇄 안에 어떤 느낌을 담아내든, 이번 <물고기로 죽기> 공연을 보며 시시때때로 경험한 감각의 더께를 소생시키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생각을 어쩌지 못한 채, 글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중이다. 말과 글에 담긴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 한계를 예상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고기로 죽기> 공연의 관객석에 앉아 몇몇 개념적 단어들로 성취될 수 없는 절대적인 혼돈의 과정, 그리고 정체됨 없이 이리저리 흐르는 시간과 마주하며, 이미 그때부터 ‘이 작품에 대한 리뷰란 대체 어느 정도의 깊이감 안에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일까’, 필자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와 같은 경험은 어떠한 동질화된 스테이트먼트로 표방되는 사회운동으로의 귀결과는 분명 다른 맥락과 다른 이해, 무엇보다도 다른 마음의 상태를 요청하는 듯하다. 어쩌면 <물고기로 죽기>에 대해 ‘MTF 트랜스젠더인 50대 소설가 김비의 자전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 다원예술 공연’ 정도로 꽤나 명료하게 요약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그와 같은 설명의 발화 지점에서 슬며시 드러나는 괄호들의 존재와 그 안에 가까스로 욱여넣어지는 개인의 공유 불가능한 절대적인 시간까지도 되비춘다는 점에서 ‘문학적이며’(“나는 나를 쓴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쓴다.” - <물고기로 죽기> 대사 중), 그런 만큼 리뷰의 범주는 여느 공연작과는 달리 공연 장면의 구체적 묘사나 공연 구성 기호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와해된 어느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그러므로 이번 리뷰에서는 필자의 심상에 여전히 생존 중인 감상의 나열(+‘연극연습 프로젝트’에 대한 간략 소개)을 짧게나마 시도해보고자 한다.
- 독서를 하듯, 공연을 본다. <물고기로 죽기>는 소설도 희곡도 에세이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특정한 언어의 형식을 체현해낸다. 독립적으로 자생하던 자음과 모음이 만나 만들어내는 문장 체계 안에서 리듬이 생성되고 그 흐름이 어느 순간 문득 의미가 되어 솟구치듯, ‘대사’와 ‘배우의 움직임’과 ‘사운드’와 ‘배경영상’과 ‘조명’과 ‘화면 상단의 자막’과 ‘라이브 수어 통역’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무대 위 환경을 매개로 어느 날의 기억과 또 다른 어느 날의 심상이 불쑥 휘파람처럼 가늘고 길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책의 모서리를 잡고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듯, 키라라의 음악 혹은 배우들의 대사와 동작을 기점으로 전환되는 장면의 버석거리는 질감을 듣거나 본다. 몸 안팎을 넘나드는 비트 속에서 듣고, 세밀한 움직임의 언어 너머에서 본다. 그러다가 공연 말미에 지금껏 아무도 모르게 객석 한구석에 앉아있던 작가가 무대로 나와 ‘혼란의 바다 속에서 온 힘을 다해 헤엄치는 사람’임을 소리 높여 천명하던 순간, 들리는 문장을 그 즉시 머릿속에 새겨넣으며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힘껏 하이라이트 해보기도 한다. 형광색을 덧입은 문장 몇 개가 만 가지 스펙트럼을 지닌 반짝이는 비늘이 되어 머릿속을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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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비 작가와 황순미, 양대은 두 배우, 그리고 김보석 수어통역사가 서로 등을 맞댄 채 외치던 “퀴어漁 만세!”라는 마지막 대사에 맞춰 나오는,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듯한 느낌의 엔딩곡 제목은 <사별(死別)>이다. 그러나 정작 무대 공간 전체를 쿵쿵 울리는 비트가 은유하는 죽음과 이별이란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삶에 대한 맹목적일 정도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가깝다.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장(場)으로서의 트랜지션된 몸.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져 온 죽음과 삶을 하나의 몸 안에서 동시에 온전한 과정으로 겪어내는 시간은, 물살에 몸을 맡겼다가도 일순간 그 물살을 거스르며 생의 의지만으로 호흡하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닮아있다. 작가는 그토록 꿈틀거리는 시간을, 몸을 맞대기도 하고 서로 멀찍이 떨어져 내달리기도 하는 두 남녀 배우의 대사 속으로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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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이번 공연의 극작을 맡았던 김비 작가의 대본이야말로 그 자체로 공연의 계시이자 공연의 현재이자 공연에 대한 가장 좋은 리뷰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순히 이번 공연에 작가의 지난날과 지금과 앞으로 도래할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집결되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극작 연습’을 표방한 이번 공연이 진행되는 70분의 시간을 이루던 매 순간에 작가의 실존이 투영되어 있었기에, 공연이라는 형식을 매개 삼아 무엇을 대표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일말의 강박 없이 ‘아무렇지만 아무렇지 않기도 한 물고기로서의 삶’이 대사에 스며들고 있었기에, 그리하여 배우들의 몸을 통해 내일 발화될 대사에 어제와 오늘의 감정 시차(視差)가 고스란히 흔적을 남길 것이기에, <물고기로 죽기> 공연은 회차가 이어질수록 점차 그 자체로 가장 적합한 형식의 메타-공연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싶다. 메타-공연, 공연에 대한 공연이자 공연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공연으로서의 자기 리뷰.
- 이번 공연은 공연예술 독립 프로듀서로 활동해온 고주영 프로듀서의 기획 연작 ‘연극연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표되었다. “연출, 희곡, 연기 등 연극을 이루는 요소에 변수를 인풋하여,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 함수 프로젝트”(출처: <물고기로 죽기> 프로그램 안내문)를 표방하는 작업인 만큼, 프로젝트 첫해인 2018년 12월에는 <연극연습1. 연출 연습-세 마리 곰>이라는 제목의 작업이, 이듬해인 2019년 12월에는 <연극연습2. 연기 연습-배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작업이 발표되었다. 연극을 연극이라 인식시키는 정형화된 기호들에 변수를 가함으로써 일종의 돌연변이를 만들어내는, 그리하여 아웃풋으로 발생된 바로 그 돌연변이를 통해 역으로 국내 연극계를 지배하는 전형성과 정형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바로 그 지점이 ‘연극연습 프로젝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첫 번째 작업에서는 안무가이자 퍼포먼스 작가로 무용계와 시각예술계에서 더욱 큰 주목을 받아온 정세영 작가를 텍스트 기반 작업을 위한 연극연출가로 호명해, 연극연출가의 역할과 연극이라는 장르의 경계에 대해 되물은 바 있다. 뒤이어 0set프로젝트와의 협업 형식으로 진행된 두 번째 작업에서는 세월호 유가족이자 각자 노래강사와 유튜버를 꿈꾸는 이미경, 김성실 두 중년여성이 공연의 배우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프로젝트 진행 과정 중에 실제로 노래 가르치는 법과 유튜버 되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실제 이미경 배우는 노래강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김성실 배우는 ‘졸싸맘’이라는 닉네임으로 유튜브 채널을 오픈했다.) 그리고 연출 연습과 연기 연습에 이어 약 1년 3개월여 만에 다시 공연된 이번 연극연습 프로젝트에서 고주영 프로듀서는 구성 및 연출을 담당한 정은영 작가와 손잡고 희곡, 더 나아가 극작이라는 수행적 여정의 참여자로 트랜스젠더 소설가 김비를 초대한다. 이로써 텍스트로서의 희곡, 그리고 창조적 행위이자 생산적 행위로서의 극작을 넘어서서 극작가의 자율성과 실존, 생존의 문제로까지 관점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 팽팽한 확장감 속에서 관객은 대사 이전에 극작의 과정을, 극작 이전에 극작가의 오늘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꽤나 분명히 남아있는 사진이 하나 있다. 작가가 처음으로 구입했다는 지프차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직장 앞마당에 주차된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 무대 뒤편의 배경벽에 투사되자 그로부터 흘러나온 지난 시간이 배우들의 대사 한 줄 한 줄 안에 용해되어 다시 그들의 입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수술을 마친 후, 면허 딴지 1주일여 만에 지프차를 구입해 그 차를 타고 시골집 꼬불길을 달렸노라고 했다. 눈이 펑펑 쏟아졌어도 사이드미러를 볼 줄 몰라 앞만 보고 달렸노라고도 했다. 사진을 보며 모든 것에 의연했을 그날을, 그날의 마음 모양을 상상해보았고, 어쩌면 자유로움이란 본래 그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다. 시골집으로 향하던 비포장도로 위에서도, 면허 딴지 1달 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낯선 곳의 터미널을 찾아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을 때도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마침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중력에 가늠되는 무게를 상실함으로써, 걷는 대신 춤을 춤으로써, 그리하여 결국 어떠한 절대적 무게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 이번 <물고기로 죽기> 공연의 대본은 전반적으로 유언의 형식을 띤다. 공연 중에 가장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애인이라는 물고기에게 남기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당신의 물고기 삶은 충분히 위대하니 / 자책하지 말고 자학하지 말고, / 다시 또 비겁하게 도망치고, / 두려워 도망치면서, / 아주 조금만 꿈틀거리면서, / 그렇게 남은 생을 끝까지 살기를 바랍니다. / 그러다가 이 다음에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 다시 또 물살에 몸을 싣고 흔들리다가, / 만납시다. / 물살을 따라 같이 헤엄치다가, / 어느 가을 날 다시 또 / 서로 지느러미를 맞대봅시다. / 제일 가까운 곁을, 지나칩시다. / 물고기로 다시 만납시다.

(출처: ‘연극연습 프로젝트’ 공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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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 : 원준혁 ⓒ 연극연습 프로젝트]

연극연습3.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
일자
2021. 3. 4(목) ~ 2021. 3. 14(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구성 연출
정은영
출연
황순미 양대은
음악
KIRARA
움직임
이윤정
수어통역
한국농인LGBT
조명
강지혜
음향
최환석
영상
이희인
조연출 무대감독
박진아
드로잉
박조건형
캘리그래피
김비
그래픽디자인
제로랩
운영
이도원
기획 제작
고주영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ages/Perf/Detail/Detail.aspx?idPerf=25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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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옥주

손옥주 공연학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 무용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무용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포스트닥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현재 학술 연구와 동시에 리서치 파트너와 드라마터그로 공연 현장에서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춤의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은 서로 맞닿아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춤을 닮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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