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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지키는 것 말고, 비평이 지키는 것

[메타비평] <물고기로 죽기> 공연에 대한 '안팎'의 비평을 경유하여

김민조

제199호

2021.04.29

지난 학기의 일들

연극비평장 내에서 퀴어/트랜스 담론의 자리는 여전히 협소하다. 필자가 과문한 탓일지 모르겠으나, 협회 차원에서 발간되는 비평지는 물론 대안적인 비평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는 여러 웹진들에서도 퀴어/트랜스 연극에 관한 주제비평, 기획연재, 인터뷰, 대담 기사 등을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개별적인 공연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리뷰는 축적되고 있으나 퀴어/트랜스 연극 만들기와 보기를 둘러싼 비평적 개입의 가능성은 여전히 희미한 전조로 떠돌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2010년대 후반 이후 퀴어/트랜스 연극이 꾸준히 확장과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점과 대비했을 때 이 괴리감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서언으로 적은 말은 비평가의 롤을 입고 활동해온 필자 본인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3년간 쓰고 발표해온 비평의 목록을 점검해볼 기회가 생겼을 때 퀴어/트랜스 연극에 대한 글을 이다지도 적게 썼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응원과 연대의 제스처에 안주한 흔적들이 역력하다는 사실에 대해 착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후자의 안일함은 ‘당사자에 의한, 당사자의 연극’에 대한 호응이 늘어나면 뭐라도 바뀌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기대의 흔적이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창작계의 추이를 살펴볼 때 그 전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해 의제를 갱신해야 할 비평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성찰한다면 이제 지난 학기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연극in 편집부로부터 “매체에 발표된 비평문”에 대한 메타비평을 의뢰받았을 때, 필자는 개인 블로그에 올라온 글도 그 조건에 포함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전문매체’의 범위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제외하고 있는 비평지원사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적절하지 않은 생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기고가 청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비평장 시스템 내에서 ‘매체’ 혹은 플랫폼이 선택하지 않은 의제에 대해 쓰고자 하는 필자는 어디에 글을 올리게 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퀴어/트랜스 담론의 기획과 생산에 관해서라면 이 문제는 퍽 중요하다.

몸의 능력과 연극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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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물고기로 죽기>포스터

하여 이 글은 2008년부터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의 시선으로 공연예술, 문학, 시각예술 등을 감상하고 개인 블로그에 기록과 비평을 축적해온 필자 안팎이 <물고기로 죽기>(김비 작/정은영 연출)에 대해 쓴 블로그 비평문에 대한 응답으로 구상되었다. 안팎의 비평문 <존재하고 변하고 사라지는 몸에 반응한다는 것,>은 연극의 미학과 윤리성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성찰해온 필자가 현재 경과하고 있는 고민의 지점들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그 고민은 소수자 정치학이 정교하고 예리하게, 교차성을 띠며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연극이라는 예술형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다.
비평문의 서두에서 그는 아토 퀘이슨이 저술한 『미학적불안감: 장애와 재현의 위기』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연극 공연은 우리를 물질적인 인간 신체―한숨을 쉬고 분통을 터뜨리고 쓰러지고 다시 떨쳐 일어나고 절망으로 탄식하고 웃는 몸, 그 몸짓과 행동에 현실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 몸―이 있는 곳으로 데려 간다.” 얼핏 연극개론서에 나올 만한 당연한 내용처럼 보이는 이 대목은 ‘우리는 개념이 아니다’라는 소수자 운동의 슬로건과 교차시켜 보았을 때 사뭇 다른 무게감을 얻게 된다. 안팎은 이 대목을 읽으며 “책 한 권 읽으면 될 것을 왜 시간과 수고를 들여 극장을 오가야 하느냐는 푸념을 적었던” 본인의 연극리뷰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러게, 퀴어 장애학과 트랜스페미니즘에 관한 지적인 성찰로 가득한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왜 시간과 수고를 들여 극장을 오가야 하는 것일까.

안팎은 <물고기로 죽기> 공연을 보며 ‘몸’의 현존성과 실체성을 부여잡고 있는 예술형식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된 것 같다. <물고기로 죽기>가 맞닿은 몸을 반응하게 하는 정동적 능력을 촉발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는 이 공연이 “내가 속한 이 세계에 나와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몸이 있음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고 쓴다. 단지 보여지기 위해 기능하는 몸이 아니라 관객이 쳐다보지 않을 때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몸, 사라지지 않고 한쪽에 서 있는 배우들의 몸에 그는 눈길을 준다. 이처럼 안팎은 작가 김비를 비롯한 트랜스젠더들이 허구적 개념이 아니라 “한숨을 쉬고 분통을 터뜨리고 쓰러지고 다시 떨쳐 일어나고 절망으로 탄식하고 웃는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하는 <물고기로 죽기>의 전언 속에서 연극의 현존성이라는 고전적인 테마를 다시 사유하고 있다.
그러나 몸의 능력이 연극의 능력과 곧바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몸의 지워질 수 없는 현존성을 드러내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연극예술이 역사적으로 발달시켜 온 문법과 기술을 버리고 당사자가 직접 발화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지도 모른다. 안팎의 글은 이 지점에 이르러 미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고 있다.
“한편 무대 위의 두 몸은 어쩌면 뜬금없다. 그들은 김비가 아니다.(…) 요컨대 저 모든 말은 익명의 몸을 통해 나온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창작물임을, 더욱이 제작 과정에서 연출가와 배우들이 함께 수정했을 것임을 생각하면 저 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 몸들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1) 안팎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 그는 물리적 현존성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연극성’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언어로 안팎의 언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이것은 김비의 진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김비가 아닌 다른 몸들로부터 나온다.
<물고기로 죽기>가 트랜스젠더 가시화 운동의 차원을 넘어 퀴어/트랜스 연극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가 아닐까. 현실과 허구의 이분법을 넘어 양안(兩岸)에 위치한 복수의 몸을 매개하는 능력. 저 몸들로부터 구성해내는 능력. 우리가 연극에 감명을 받는 순간들은 바로 그런 전이의 순간들일 것이다. 내가 여전히 다른 몸으로 전이할 수 있고 전이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되찾으러 가는 공간. 허구와 현실이 서로를 보호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 극장의 효능을 묻는 안팎의 질문에 대해 필자가 떠올려본 대답은 그러한 것이었다.

비평이 지키는 것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애틋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몸의 현존-대면-감응이라는 보편적 특성에 호소함으로써 우리가 극장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좋은 연극과 나쁜 연극에 대해 더 나은 논쟁을 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퀴어/트랜스 연극의 정치적 의의만을 중점적으로 상찬하는 것은 도리어 예술적 실천으로서 이해받고 평가받을 권리로부터 그 연극들을 소외시킬 것이다. 비평은 각각의 공연이 어떤 몸들을 매개하는가, 몸을 ‘어떻게’ 현존하게 하는가를 둘러싼 실정적 기술의 차원을 보다 끈덕지게 심문할 필요가 있다.
<존재하고 변하고 사라지는 몸에 반응한다는 것,>처럼 퀴어/트랜스 연극을 예술의 차원에서 고민하는 글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퀴어/트랜스 연극 담론의 생산을 안팎과 같은 소수의 ‘잘알’에게 의존할 때 씬이 게토화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2) 비평이 리액션의 차원을 넘어 연결과 매개의 장을 구축하는 사회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혹은 ‘여기에서 더 나가도 된다’고 독려하는 무언의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면, 지금은 퀴어/트랜스 연극에 더 많은 비평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문 바로가기 >>> https://slowlyaspossible.net/1540/

※ [메타비평]은 연극계 혹은 예술계의 여러 ‘매체’에 발표된 ‘비평문’에 대한 추가적인 ‘비평’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시각에 대한 비평적 발언이나, 불안정한 의제의 수정 및 새로운 의제 도출, 다양한 관점의 제시 등을 목적으로 합니다. 연극in은 작품에 대해 이어지는 대화와 토론을 적극적으로 장려합니다. 취지에 공감하는 필자들은 webzine@sfac.or.kr 로 ‘비평에 대한 비평’을 보내주세요. [리뷰]코너를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 연극in 웹진
  1. 볼드체는 인용자 강조.
  2. 이는 연극계 미투 이후 3년이 지난 현시점에 페미니즘 연극이 당면한 상황과도 유사하다. 씬이 게토화되는 현상, 소수의 활동가들에게 페미니즘 의제를 외주화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관측되고 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과 KTS 워킹그룹이 진행한 좌담에서 임인자는 공동체의 약속을 다시 만들어가는 일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우리의 약속을 함께 바꿔갈 수 있다. 연극사회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논의해 나가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는 안전한 창작환경의 조성이 일부 연극인들에게 위임된 사업이 아니라 연극사회 공통의 과제로 인식될 수 있을 때 공동체가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 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미투 이후 3년, 우리의 연극을 돌아보다>, 『연극in』 제198호, 2021.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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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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