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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정수 사이 소수점을 욕망하는 일

박은호 <240 245>

조주영

제205호

2021.07.29

<240 245>는 경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240은 작고 245는 큰, 애매한 신발 사이즈를 지닌 배우 박은호가 지나온 숱한 경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극의 대사를 빌리자면, “한 정수와 다른 정수 사이”에 존재하는 “242.5 또는 243.1, 244.005”와 같은 “무수히 많은 유리수와 무리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240과 245라는 신발 사이즈는 숫자를 넘어 언어적, 문화적 차원으로 번역되어 한국인과 중국인, 아마추어와 프로, 헤테로섹슈얼과 퀴어 라는 두 ‘정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박은호라는 한 개인의 정체성으로 확장된다. 극 중 대사처럼 대부분의 경계는 넘고 있을 때는 잘 알지 못하기에, 그는 사후적으로 자신이 속하기와 벗어나기를 반복하던 세계(들)의 안팎과 그 언저리에 남겨진 발자국이자 소수점을 되짚어보기로 한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의 그는 자신이 지나온 삶이라는 메타연극 속의 ‘배우’라는 점이고 그 앞에는 ‘관객들’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경계 안 또는 밖에 속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신촌극장 무대의 옆문이 열리고, 맨발의 박은호는 무대에 놓인 신발을 신는다. 관객인 나에게 포착된 그의 맨 처음 표정은 마냥 편치만은 않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이내 자신이 ‘제일 어렵게’ 생각하는 자기소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 떨어지지 않는 신발 사이즈와 마찬가지로 키, 혈액형, 별자리, MBTI 등은 엄연히는 키가 163.2이며 T나 F가 반반 섞여 있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소개’가 되지 못하며 늘 누락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느낀 것은 아니다. 이는 이제껏 수없이 많은 경계-넘기를 하며 습득된 것으로, 그는 지금과 달리 자기소개를 어렵지 않게 술술 하곤 했던 때를 소환한다. 어릴 적 가족들을 따라 중국 연태(Yantai,烟台)로 갔던 그는 경계의 내부에 위치하는 ‘그곳 사람’이 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곳에서 그는 ‘훌륭한 소년 대원’이 되기 위해 홍령건을 쓴 채로 각 잡힌 동작을 따라하며 “不怕困难, 不怕敌人, 顽强学习, 坚决斗争。… 向着胜利勇敢前进, 我们是共产主义接班人(곤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완강하게 배우고, 결연히 투쟁한다. … 승리를 향해 용감하게 전진하며, 우리는 공산주의 후계자이다)”와 같은 구령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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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계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첫 번째 경계에 해당하는) ‘국경’을 넘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할수록,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체감했다고 말한다. 장소만 달라졌을 뿐, 돌아온 서울에서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신발로 갈아 신은 그는 케이팝이 들리는 한 가운데서 내부로 가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역할놀이’가 수반되는데, 하이힐을 신은 그는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되어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여성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신발로 바꿔 신은 후에는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을 연기하며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수녀원으로 가!”라는 대사를 흠칫하지 않고 내뱉는 햄릿이 ‘되기’도 한다. 내부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연기 연습 도중 “에너지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중립’을 유독 어려워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강조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자신은 “지독하게 속하고 싶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연태에 이어 서울에서까지, 그는 ‘언젠가는 어딘가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계속해서 경계 안으로, 그 안의 안으로 들어가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납작해져만 간다.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인지를 묻는 이들, 자신과 자신의 연인의 관계를 ‘찐우정’으로 정의하는 이들 앞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거나 호탕한 척 웃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죄송합니다”를 반사적으로 내뱉는 아마추어와 ‘준’프로의 경계에 자신을 위치 시키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무력하게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맞지 않는 옷과 신발을 갈아입기를 반복하는 이러한 역할놀이의 굴레 속에서, 그는 자신이 새롭게 배워왔던 언어들도, 머물렀던 세계들도, 즉 “그 어느 쪽도 내 것이 아님”을 느낀다. 경계 안의 이들이 정해 놓은 경계에 맞추고자 할수록 그것이 결국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오필리아의 마지막 대사를 읊은 직후 도착한 자신의 장례식에서, 그는 이제껏 240과 245 사이의 소수점들을 지워온 무리의 한가운데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황스러우리만큼 신속하게 진행되는 장례식을 지켜본 후 관에 누운 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으며 원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믿음으로서 ‘무해’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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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깨달은 배우가 들려주는 2막의 이야기는 1막의 것과 사뭇 다르다. ‘15초’의 짧은 인터미션 후에는, ‘경계의 안 또는 밖에 속하느냐’ 혹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아닌 이제까지의 한없이 축소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만이 “진짜 진짜 문제”로 남는다. 그러기 위해 그가 가장 마지막에 넘어선 경계는 바로 ‘자신’이라는 경계이다. ‘아마추어와 준프로 사이’라는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던 그는 이제 자신을 배우, 웬만하면 “프로 배우,” “직업 연극인”이라 호명하고,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허물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가 뒤섞인 문장을 발화한다. 그 과정에서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질을 견디는 것! 또는 고난의 바다에 무기를 들고 맞서는 것! 어떤 게 덜 비참한가! 덜 부끄러운가!”를 고뇌하는 다분히 ‘비극적’이며 ‘영웅적’인 ‘주인공’ 햄릿의 대사는 ‘햄릿비언’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비극적이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은, 왠지 모를 명랑함이 묻어나는, 기꺼이 주연과 조연을 오가는 이 배우는 “거창하고 비장한” 운명이 아닌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툭”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원하는 가장 먼 곳까지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 여정에서 ‘20XX년 백상 연극부문 수상자’로 호명된 그는 수상소감으로 이 상을 원했고, 너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고백한다. “주인공의 대사”로만 여겨졌던 “원한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반복해서 흘러나올 때, 나는 그 말이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고 몇 번이곤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배우는 자신이 여태까지 가장 어려워했던 ‘중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지방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연극의 후반부에서 박은호는 처음 등장했던 때처럼 맨발의 모습을 한다. 그리곤 서서히 붕대로 자신의 발을 감싼다. 이때, 스피커로부터는 과거 박은호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관객들의 앞에 위치한 현재 박은호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죄송한 거 아니라고, 전공도 하지 않았는데 그 정도 (연기)하는 것은 대단한 거라고, 안에 있는 거, 더 높아 보이는 거 그거 다 그냥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경계에선 튕겨 나가지도 않고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냥 가”라고. 그 말을 들은 과거 현재 미래가 뒤얽힌 ‘박은호’는 “한국인, 짱깨, 퀴어, 헤테로, 여배우, 아마추어, 준-프로, 무해한, 부끄러워하는, 죄송해하는 사람” 등 이제까지 자신을 수식했던 단어들을 쭉 나열한 후, 그 끝에서 “그 모든 게 나는 아니에요”라는 말과 함께 붕대가 감긴 두 발로 문을 나선다. 15분의 인터미션이 주어지는 연극을 향후 3년간 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양성애자가 내릴 수 있는 열차의 문이 없을지라도, 연태의 사람들처럼 매일 환승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될지라도, 앞으로 신을 꼭 맞지 않을 신발들로 인해 발이 변형될지라도, 그는 “그어진 어떠한 선도 철책도 없는 곳”인 동시에 “너무도 수많은 경계선 위”를 “관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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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역할놀이’가 끝이 난 커튼콜에서, 박은호라는 배역에서 ‘우아하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그가 백상예술대상을 받은 배우들의 얼굴에서 등대를 보았던 것처럼) ‘등대’를 보았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점선을 실선으로, 너무나 쉽게 반올림되곤 하는 소수점들을 소거하지 않고 그대로 비추는 그러한 등대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러한 등대가 주어졌다면, 그의 ‘관객’이었던 나와 우리의 역할은 그처럼 (오필리아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햄릿이 아닌)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나를 믿으라고 말하는 햄릿비언의 대사를 기억하고 따라 하는 ‘배우’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만의 240과 245 사이 존재하는 무한대의 소수점들을 더욱 길게 늘어뜨리고 욕망하는 배우 말이다. 그가 넘어선 ‘자신’이라는 가장 마지막 경계를 이제는 우리가 그와 ‘함께’ 넘어야 할 차례였다. 관객들의 (기립) 박수가 그 첫걸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극장의 문지방 앞에 섰다. 그리고 230와 235 사이에 있는, 나의 발을 들었다.

[사진제공 : 공남희, 시현수]

박은호 <240 245>
일자
2021.07.01. ~ 2021.07.03.

장소
신촌극장

전서아
대본도움 연출 출연
박은호
드라마터그 단막극영상연출
공남희
조연출 PD
고재혁
시노그라퍼
시현수
조명디자인 오퍼레이팅
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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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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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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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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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영

조주영
좋은 인간-동물이 되고 싶은데 매일같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앞두고 연극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jin021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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