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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경로, 혹은 길잃기의 경로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추락 II>

박종주

제205호

2021.07.29

거의 아무런 잠정적 결론에조차 이르지 못한 채, 혹은 않기로 한 채 쓴다. <추락Ⅱ>는 긴장의 극이었다.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해서 혹은 어떤 일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서 긴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것도 해석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긴장, 내 나름의 소소한 의미화조차 허락지 않는 ― 미리 밝혀두자면 역사와 개인 사이의, 또한 어떤 몸들과 배역 사이의 ― 긴장, 그런 긴장의 극이었다. 줄곧 길을 잃으며 보았다.
“쉰두 살의 대학 교수 루리는 학생인 멜라니 [아이삭스]와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권고사직 당한다. 학교를 떠난 루리는 딸 루시가 개척한 농장으로 먼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친다”는 시놉시스를 보면 주인공은 루리인 모양이다. “수치스러운 상태로 추락”하는 것 역시 루리다. 루리의 선택과 루시의 선택, 타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렇기에 서로 만날 수도 없는 두 선택이 극의 중심에 있다. (단, 루리는 루시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루시 역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교수, 이로써 루리는 지금껏 쌓아온 것들을 잃는다. 그야말로 추락이다. 그러나 표면상 그럴 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아이삭스의 진술을,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겠노라 말한다. 진술서는 읽지 않는다. 아이삭스가 왜 그렇게 진술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도 위원회의 존재 의미에 의구심을 표한다.
형식적인 사과만으로도 적당히 무마할 수 있다는 동료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그는 대학을 떠나기로 한다. 형식적으로만 잘릴 뿐이다. 아이삭스의 진술, 혹은 필요하다면 본심은, 관객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루리의 일방적인 주장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끝이 좋지 않게 되어버린,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머지않은 50대 이혼남이 아니라 에로스의 노예였다는, 그러나 절제할 수 없어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는 그는 유죄를 인정하고 항변하지 않음으로써 이를테면 사회, 제도, 문화 같은 것들을 단번에 비웃는다. 역시나 그를 통째로 의심하지 않는다면, 제도든 문화든 아무런 의미 없는, 적어도 진정한 의미를 낳는 데에는 방해가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것이 그의 ― 적어도 표면상의 ― 추락인 것일까. 물론 이 일로 “수치스러운 상태로 추락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루리 자신이다. 하지만 저 행위와 이 추락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기는 무언가 마뜩잖다.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무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서 택한 일이다. 아이삭스와의 관계도, 교수직 사임도 말이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제도를 거부하고 비웃는 자의 자유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추락은 거짓이거나 다른 사건을 경유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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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이해하기

선택을 이해하기, 라고 적었지만 다시 한번 고백건대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루리의 경우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신뢰하지 못한다고 쓰는 쪽이 낫겠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거나 진상조사위원회를 보고서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삭스의 부재에서 멈추는 것이다. 이 같은 판단 유예를 덮어둔다면, 동료들로서는 납득하지 못한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자유를 택한다. 그뿐이다.
이제는 전직 교수가 된 데이비드 루리의 딸 루시 루리. 이주해 들어온 이들의 공동체가 붕괴된 후에도 마을의 유일한 백인으로 남아 개척 농장을 운영하는 젊은 여성. 그의 선택이야말로 어렵다. 루리가 찾아와 함께 지내던 중 그는 집을 습격한 괴한들 ― 후에 정체를 알아내지만 끝내 처벌하지는 못하는 ― 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경찰에는 강도가 들었다고만 신고한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냐면서도 사랑이 싹틀 거라고, 낳겠다고 말한다. 모성애라는 게 있을 거라고 믿어야 한다. 땅을 노리는 옆집의 페트루스와 결혼하기로 한다. 세 번째 부인쯤이다. 땅을 주고 안전을 사는 거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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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가 진정으로 추락하는 것은 아마 이 대목에서다. 딸을 “존중”해 농장을 마련해 주었던, 이제는 농장을 접고 안전한 곳으로 떠나도록 딸을 설득해내지 못하는 아버지로서의 추락. 더 깊이는, 제도를 비웃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되었지만 다른 개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실패한 개인으로서의 추락. 루시는 “나한테 일어난 일은 순전히 나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유는 의미심장하다. “여긴 남아프리카고 난 여기 살고 있으니까요.” 루리가 비웃을 수 있었던 세계가 루시에게는 비웃기는커녕 맞서 싸울 수조차 없는 상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루시에게 세계는 기댈 수 있을 만한 제도로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흑인 지역사회의 경찰이 외부인인 젊은 백인 여성을 위해 애써주지는 않을 것이다. 싸울 상대도 기댈 곳도 없는 루시는 무력하다. 어쩌면 루리의 말대로 이것은 역사가 그들을 통해 ―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죄악의 역사”가 살아남은 흑인들을 통해 ― 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써 무력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게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누군가에게 증오의 상대가 되었다는 게 너무 큰 충격이어서 그 충격이 가시질 않아요.”1)
루리가 역사 밖의 개인으로서 사태를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할 때, 루시는 역사 속의 개인으로서 사태를 경험한다. 루시는 보다 외롭고 보다 철저한, 자유롭지 않고 힘없는 개인이다. 역사 속에 있지만 역사의 일부는 아닌, 역사 속에 있지만 자신의 자리는 갖지 못한, 하지만 언제나 개인 대 개인으로서 역사를 겪는. 그렇다면 내가, 혹은 루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루시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존재 지평 그 자체다. 외로워 본 적 없기에 외로움을 좇을 수 있는 이로서는 경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지평.
루시는 좀 더 안전한 세상이 될 때까지 유럽으로든 어디로든 떠나라는 루리의 제안을 거절한다. 지금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철저히 혼자일 이곳에 남기로, 철저히 혼자서 결정한다. (철저히 혼자일 땐 대개 선택의 여지가 없다.) 페트루스와의 거래를 받아들이며, 땅은 넘겨도 좋지만 집만은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낯선 곳으로 들어와 직접 일군, 유일한 자신의 자리다. 어쩌면 외로워도 괜찮은 유일한 자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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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를 방해하는 몸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본다. 진상조사위원회. 가운데에는 루리가 앉아 있다. (그를 비난하는) 한 조사위원의 말에 따르면 “백인 남성”이다. 주위에 있는, 그러니까 세 조사위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들을 연기하는 것은 여성의 몸이거나 남성의 몸, 장애인의 몸이거나 비장애인의 몸, 한국계의 몸이거나 외국계의 몸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러한 몸인지는 물론 알지 못한다. 내가 배워 온 기준으로는, 겨우 외관만을 참조해 판단하기로, 그렇게 분류될 법한 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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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남성으로 그려지고 한국인 비장애 남성으로 보이는, 그러니까 가장 정상의 기준에 가까운 몸을 그렇지 않은 몸들이 심문한다. 몰래 혹은 공공연히 그를 응원하는 것 역시 그런 몸들이다. 이 몸들이 무엇을 연기하고 있는지 ― 어떤 인종과 성별과 나이를 연기하고 있는지, 그 몸의 장애 여부는 어떠한지 ― 는 적어도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대 위에 제시되는 것들은 이 짐작에 쓰기에는 부족하거나 넘친다. 판단을 유예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다. 저 극중 인물이 어떤 몸을 가졌는지를 식별하려 들지 않거나, 상상된 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거나.
또 한 번 꼬인다. 루시의 농장에는 개가 많다. 누군가가 집을 비우며 맡긴 개, 혹은 루시가 거둔 유기견들이다. 조금 떨어져 사는 베브도 유기견을 돌본다. 무대에는 수많은 개가 등장한다. 앞에서와 같은 몸들이 이 개를 연기한다. (루리와 루시 정도를 빼면 모든 배우가 여러 사람을 연기하기도 한다.) 달리 표식은 없다. 사람인지 개인지를 알고 싶다면 이들이 무언가 말을 하기를, 혹은 스피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사람이 침묵하거나 개가 말을 한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가게 되고 말 것이다. 예컨대 한 번은 유기견 케이티가 사람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자막에3) 이름이 뜨지 않았다면 아마도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사람으로 생각했을 테다. 자막을 빠짐없이 보지는 않았으니 사람을 개로, 개를 사람으로 착각한 대목이 얼마든지 있을지도 모른다.
유예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금세 나는 혼란에 이른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개들은 차례로 주사를 맞는다. 머리에 검은 천을 쓰고 혈관에 독극물이 들어오기만을,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는 이 몸들을 보며 매번 사람과 개를 함께 생각했다. 이따금 슬퍼하는 얼굴이 보일 때면 슬픈 사람과 슬픈 개와 슬픈 배우를 모두 생각했다. 명료한 세계를 읽어내는 데에, 혹은 세계를 명료하게 읽어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이 모호함 혹은 풍성함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지평에 가닿을 기회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러지는 못했다. 사라지는 몸들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말했듯 무대에서 아이삭스를 찾기는 힘들다. (아이삭스를 연기한 배우는 무대에 오르는 시간 대부분을 케이티로 보낸다.) 루리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루시의 결정이 관객에게 세세히 알려지기 얼마 전에, 루리는 아이삭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또 물으며 그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고 집에 초대받는다. 아이삭스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말수가 적다. 아버지들끼리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다. 고백이든 사과든, 용서든 비난이든, 아버지들끼리의 대화다. 루시가 홀로 삼키고 홀로 고민하고 홀로 결정하는 사이 루리는 범인을 찾고 항의하고 싸운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몸들을 생각했다. 무대에 모습은 비치지만 제 언어를 갖지 못하는 몸들, 무언가 말해도 언제나 다른 이의 다른 말이 따라붙고 마는 몸들을.

[사진제공 :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보통현상_김솔)]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추락II>
일자
2021.7.09(금) ~ 7.18(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J.M.쿳시-DISGRACE
번역
황은철
각색,연출
김한내
출연
이윤재, 이세영, 윤현길, 마두영, 신강수, 이송아, 김민희, Anupam Tripathi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강지혜
의상디자인
홍문기
음악,음향디자인
배미령
음향감독
김나연
영상감독
김성하
그래픽 디자인
황가림
조연출
이효진 김민희
사진촬영
김솔 영상활영 김지은
프로듀서
김민솔
배리어프리공연
(주)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ages/Perf/Detail/Detail.aspx?IdPerf=257658
  1. 나는 이 대사를 짚어내지 못했다. 이 대사에 주목한 것은 (이 지면에 〈추락Ⅰ〉의 리뷰를 쓰기도 한) 하은빈과의 대화 덕이다.
  2. 또 한 가지 고백을 덧붙인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의 흑백 대립을 다룬 원작을, 혹은 공연 소개에 차별금지법과 트랜스젠더 혐오 등을 언급한 이 공연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좀 더 구체적인 현실과 개인의 대립 같은 것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고했던 힘의 질서가 휘청일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단 혐오와 증오들이 날을 세워 일상 가득 금을 긋는다. 그어진 경계를 허무는 일은 위협과 공포로 다가온다. 지금의 우리는 그 때의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공연 소개의 질문을 마주하며 어떤 의미에서의 ‘우리’에 나를 대입해야 할지 확정하지 못했다.
  3. 극장의 배리어프리 정책에 따라 수어통역과 함께 자막이 제공된다. 작품의 일부로 연출되었는지 사후에 별도로 추가된 것인지를 명시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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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주

박종주
대학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같은 기간 동안 몇몇 사회단체와 진보정당 등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몇 개의 창작집단과 사회단체를 통해 창작자나 연구자,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주로 예술과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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