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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고통, 매혹하는 공포

허니듀 <정물화 서곡>

김소연

208호

2021.10.28

극장 한가운데, 매끈한 표면이 반짝반짝 빛나는 흰 비닐이 덮여 있는 무언가가 놓여 있다. 각진 네 모서리가 적지 않은 넓이를 만들면서 바닥에서 띄워져 드러나 있고 사각의 평면 한가운데가 솟아 있다. 저 비닐 아래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것 같다. 테이블을 주위로 의자가 떨어져 놓여 있다. 등받이 없는 의자다. 의자에 앉으려면 무릎을 접어 다리를 지지대 위에 얹어야 한다. 우리, 아니 ‘나’는 의자에 앉는다. 문이 닫히고 극장은 어둠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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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안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소리의 ‘나’는 좁고 캄캄한 트렁크에 갇혀 있다. 벌거벗은 채 눈은 가려져 있고 수갑과 쇠목줄이 채워져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후회하고 있나. 자동차 엔진 소리와 진동만이 전해질 뿐이다.
극장에 있는 ‘나’ 역시 어둠에 휩싸여 있다. 저 ‘소리’, 저 ‘말’, 저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결박된 것은 아니지만 다리가 의자에 감긴 채 허리를 곧추세우고 테이블을 향하고 있다. 어둠은 시각을 차단하는 대신 여러 감각들을 비정상적으로 예민하게 작동시킨다. ‘소리’, ‘말’,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속삭이다가 선명해지고 왜곡된다. 소리만이 아니다. 시각조차도 어둠 속에서 결박되지 않는다. 온전한 어둠이었다가 희미한 빛이 스며들고 사라진다. 그렇게 스며들고 사라지는 빛에 테이블을 덮고 있는 흰 비닐의 윤곽은 드러났다가 지워지고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극장에 있는 ‘나’는 드러나고 지워지는 윤곽을 탐욕스럽게 쫓는다. 어둠은 감각을 결박함으로써 감각을 일깨운다. 어둠은 감각의 향연의 장이다.
물론, 어둠만은 아니다. 소리의 ‘나’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빠져있다. 폭력은 점점 심각해진다. 플레이인지 범죄인지 알 수 없는 의심 속에서 두려움은 더욱 커져 간다. 소리의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그러나 공포 속에서도, 아니 공포와 함께 쾌락은 부풀어 오른다. “24시간 통제는 삶”,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는 삶”, “감각들이 토막토막 절단된 삶”, “정신과 육체가 이용당하는 삶”, “인간보다는 오브젝트로 여겨지는 삶”. 소리의 ‘내’가 꿈꾸어왔던, 상상 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키우며 흥분과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극한의 공포가 ‘내’ 몸을 통해 쾌락”이 되었던 바로 그 “판타지가 현실이 되려는 순간”이다. 두렵다. 하지만 “두려움은 분열되어 공포와 쾌락으로 커져 간다”.
바로 그때, 극한의 폭력에 신체가 사물화되어가는, 아니 신체를 사물화하는 극한의 폭력의 한복판에 다다른 그때,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의 한 가운데에서 흰 비닐이 수축하며 테이블 위의 오브제가 드러난다. 바닥을 향해 엎드린 몸, 얼굴은 바닥에 밀착된 채 두 팔이 뒤로 몸을 감싸고 그 끝 두 손은 위로 들려 있는 둔부를 잡고 있는 몸, 폭력에 제압된 것일지도 모를, 그런데 쾌락의 절정인 것 같은 몸이다. 공포와 고통과 쾌락에 사로잡힌 신체의 생생함, 그러나 눈부시게 희고 매끈한 비닐로 감싸인 사물의 반짝임. 사물-신체가 떠올라 테이블 바닥에 처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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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여기서 멈추길 바랐다. 여기서 멈추어도 될 것 같았다.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았다. 금기에 대한 욕망, 그 욕망의 매혹이라면 처박힌 몸, 제물처럼 받쳐진 몸, 저 매혹하는 사물-신체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폭력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더 이상 공포는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공포는 폭력의 강도나 가혹함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아니다.
<정물화 서곡>은 허니듀의 개인전 <친애하는 공포에게>에서 발표한 사운드 설치 작품 <세레모니>를 극장으로 ‘소환’한 작품이다. 전시의 오브제와 사운드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재배치되고 퍼포먼스의 시간으로 재구축된다. 소리의 ‘나’가 결박당해 있는 것처럼, 극장의 ‘나’ 역시 극장 문이 닫히면서 퍼포먼스의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다. 물론 극장의 ‘나’는 퍼포먼스를 중단시킬 수도 있고 혹은 의자에 감긴 다리를 풀고 극장을 나갈 수도 있다. (관습을 거스르는 약간의 혹은 조금 큰 용기가 필요하긴 하다.) 그리고 극장의 ‘나’는 이것이 플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픽션이냐 논픽션이냐와 무관하게, 극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재현된 것이다. 이야기는 끝날 것이고, 극장 문은 열릴 것이며, 극장의 ‘나’는 저 문을 나가 가을 오후 햇살이 비추는 한가로운 골목길을 따라 되돌아갈 것이다. 소리의 ‘나’가 플레이와 범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극장의 ‘나’에게 혼란은 없다.
또한 소리의 ‘나’가 겪고 있는 사건의 공포와 쾌락은 ‘전이’되지 않는다. 극장의 ‘나’는 소리의 ‘나’가 묘사하고 서술하는 것을 통해 사건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소리의 ‘나’는 결박당한 채 의지가 제거된 사물화된 신체의 폭력을 서술한다. 극장의 ‘나’는 소리의 ‘나’가 재현하는 것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재현되는 사건에서 소리의 ‘나’는 학대받는 피억압자의 위치에 있지만 재현의 행위에서 소리의 ‘나’는 사건을 묘사하고 서술하고 분석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다. 도리어 극장의 ‘나’는 소리의 ‘나’의 재현 행위에 무방비하게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극장의 ‘나’의 혼란은 재현되는 사건의 가혹함이 전이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현 행위에서 ‘나’의 수동적 위치에서 비롯된다. 극장의 ‘나’는 소리의 ‘나’의 욕망과 고통과 쾌락에 전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퍼포먼스의 시간과 공간에 결박되어 있는 ‘나’는 감각의 제한과 억압 속에서 탐욕스럽게 감각을 작동시킨다. 그렇게 확장된 감각은 흰 비닐이 수축하며 떠오르는 처박힌 사물-신체의 매끈한 반짝거림에 매혹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 놀라운 매혹에는 가혹한 폭력과 금기의 위반에 대한 욕망과 쾌락이 배면에 놓여 있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 공포와 고통과 피학의 매혹 앞에 끌려와 있다. 여기까지였다면, 극장의 ‘나’는 극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현의 행위에서 나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의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재현의 행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도드라지게 한다.

“친애하는 공포에게”

<정물화 서곡>은 가학과 피학의 서사로 전개된다. 그러나 가학과 피학의 사건을 재현하고 그 사건의 정동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퍼포먼스는 아니다. 소리의 ‘나’는 재현되는 사건과 재현의 행위에서 수동과 능동, 주체와 객체의 위치를 동시에 점유한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퍼포먼스의 시공간에서 관객은 제한당하지만 결박당함으로 인해 탐욕스럽게 감각한다. 그런 점에서 퍼포먼스에는 가학 피학의 플레이의 기제가 작동된다고 할 수 있다.
허니듀의 개인전 <친애하는 공포에게> 서문에서는 금기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퍼포먼스에는 피학과 가학의 사건의 강렬함 만큼이나 사건을 재현하는 행위자의 존재가 뚜렷하다. 소리의 ‘나’는 재현하는 사건과 재현하는 행위에서 각각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자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자의 위치를 동시에 점유하고 있다. 이 위치는 공존하고 충돌한다. 그렇다고 관객은 결박된 피동적 주체가 아니다. 이러한 중층의, 충돌하는 위치성은 관객에 의해 플레이되는 것이다. 관객 역시 플레이의 행위자다.
<정물화 서곡>은 가학과 피학의 사건과 퍼포먼스에서의 행위를 겹쳐놓음으로써 끊임없이 경계를 흔든다. 이 퍼포먼스가 사로잡고 있는 그것을 ‘공포’라고 한다면, 공포는 경계의 지워짐에서 비롯되고 그 지워짐의 인식에서 부풀어간다. 경계에 육박하고 때로는 위치의 전위로 흔들리는 경계에서 느끼는 공포는 우리는 매혹시킨다. 바로 그 경계가 존재가 분투하는 생(生)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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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양승욱]

허니듀 <정물화 서곡>
일자
2021.10.3 ~ 2021.10.9

장소
신촌극장

기획
최윤석
각본
허니듀
연출
허니듀, 최윤석
목소리출연
허니듀
연기자문
배선희
조명
서가영
사운드
날씨
사진
양승욱
영상기록
최윤석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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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좋은 공연을 함께 보기 위해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인스타그램 @sweetdream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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