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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고독을 마주할 수 있는 자력

윤정인멜로디x프로젝트 1인실 <연결된 밤, 연결된 방>

정다현

209호

2021.11.11

객석에 착석하면, 공간을 구획해놓은 듯 바닥에 붙은 흰색 테이프들이 눈에 띈다. 한 치의 삐뚤어짐 없이 정확한 직사각형 모양의 ‘경계선’들. 좁디좁은 직사각형 안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앉아있다. 앞에 각각 다른 세 자릿수가 붙은 테이블에 앉아, 개인을 대변하는 오브제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 뒤 경계선의 밖에 존재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이내 연극이 시작되면 뚜렷한 흰색 경계선들은 고시원 방 한 칸, 벽의 기호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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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이면서 사적인, 사회적이면서 개인적인, 뒤엉킨 방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해설자는 작중 배경이 되는 고시원의 풍경에 대해 묘사한다. 고시원의 “멍처럼 푸르스름한 늦저녁의 복도”에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발자국들”이 자기 자신을 지워놓았다. 그 자리엔 방마다 다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타자를 치는 소리, 유튜브를 시청하는 소리 등. ‘경계 밖’ 내지 ‘경계에 있는’ 인물인 302호 입주자는 문을 나서고 복도에 들어서며 어디선가 들리는 “살려줘”, “살고 싶어”, “사랑해 줘”라는 목소리에 잠깐 멈춰 선다.
이처럼 기본적인 방음조차 안 되는 주거공간인 고시원에서는 개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 입주자들은 벽 너머로 서로의 존재를 소리로써만 확인할 뿐 서로에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딱 방 한 칸 크기만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한 건물 안에 밀도 있게 군집해 있지만,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문” 안에서만 생활한다. 고시원 내부에서 발화되는 언어는 거의 들리지 않고, 설령 언어가 발화된다 하더라도 다른 이의 귀를 거쳐 죽는 것이 아닌, 자신의 방 언저리에서 공중으로 흩어진다.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언어가 기능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고시원의 사람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각자의 ‘벽’ 안에서 나름의 사정대로 살아간다. 가령 202호는 방에 책을 가득히 쌓아놓고 웹소설을 쓰느라 방을 나오지 않고, 303호는 사람과 있는 것이 불편해 식물과 “사람보다 100배” 더 나은 햄스터를 키우고, 403호는 SNS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각자가 채택한 방식대로 그들은 삶을 유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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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세 인물은 고시원 전체에 만연한 불쾌한 냄새의 근원지를 찾다 서로를 마주한다. 벽을 지나 문지방을 넘고 방과 방을 오가면서. 이때 303호는 마침 곱창을 시켰다며 202호와 403호를 자신의 방에 초대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던 중 303호와 403호는 말다툼을 하게 되고, 303호는 고시원은 어떤 이유에서든 “조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202호는 정말로 고시원의 “모두가 조용하길 원하는지” 반문한다. 이는 곧 관객에게 각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의 여부’에 대해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타인을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지.
이 장면에서 배우들은 정면을 보며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연극적 거짓이자 약속을 보여준다. 하지만 곧 배달원이라는 경계선 바깥의 화자가 무대공간으로 침입한다. 배달원은 극이 만들어놓은 환상, 즉 흰색 선을 밟고 경계를 깨트린다. 이와 같은 메타-연극적인 방법으로 관객들은 흰색 테이프 밖을 응시하게 된다. 관객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극장임을 인식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극장 밖에 있는 현실의 공간을 성찰하게 된다. 또한 ‘입체낭독극’이라는 형식임을 관극 중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낭독극의 ‘거리두기’가 더 효과적으로 고립된 개인들이 보이게 했다. 탭댄스의 활용과 해설자의 구음, 소품의 활용으로 인한 앰비언스 사운드는 현장감을 높여줬다.
고시원은 이처럼 철저히 단절의 공간을 가시화하면서도, 모든 것들이 뒤엉킨 인간관계의 형상을 띤다. 외로움을 느끼는 303호와 403호는 화장실 변기를 통해 한밤중에 소통한다. 어쩌면 이들이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술에 취해 익명성에 기대어 대화하는 모습은 더 큰 공허함을 불러일으킨다. 물리적인 타인의 부재는 곧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변기라는 매개를 통해 타인과 대화를 하면서도 실은 자기 내면과 대화하게 되는 아이러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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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허물고, 선을 밟는 것을 공상하기

결국 이들은 벽을 뚫는 등의 방법을 고안하는데, 202호는 “괜히 나서서 실패”할 것을 걱정한다. 그러던 중 303호는 냄새의 근원지라 추측되는 302호가 건네던 고요한 안부와 위로를 회상하고, 403호는 인성 논란으로 SNS 라이브 방송을 한 후 알약을 가득 입에 넣는다. “살려줘. 살고 싶어. 사랑해 줘.”라는 외침은 또 다시 반복되고, 벽을 넘어 문과 문, 벽과 벽을 오가면서, 202호와 303호는 403호의 죽음을 목도한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자기장에서 자력을 행사하는 행성과도 같았다. 때로는 끌어당기거나 때로는 밀어내기도 하며, 각자의 궤도 속에서 공전하는 듯했다. 그 궤도 속에서 점증적으로 외로움을 분출하는 모습은 포개어지는 발자국, 곧 나의 궤적을 따라가게 했다. 방향성 없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고시원 바닥엔 첫 장면처럼 “방향 없는 발자국”들이 찍히고, 그 발자국들끼리 포개어지며 미미한 빛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다. 공연은 202호와 303호가 각자 자신의 방에서 조명의 모양새도, 켜는 방식도, 빛의 조도도 다른 조명을 함께 켜는 것이 아니라, 403호에서 자연광을 맞이하며 끝난다. 이는 그들이 단절, 고립된 개인이었을 때는 그곳이 밤의 공간이었다면, 함께 하기 시작한 순간 혹은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그곳이 낮의 공간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의 202호와 303호는 하얀색 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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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 혼밥 등의 용어가 판치는 우리는 격조의 시대를 겪고 있다. 설상가상 역병으로 인해 방에 갇힌 현실에, 더욱더 고립되어 가고 있다. 어쩌면 이 역병으로부터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용하지 않은 현실은 분명 있다고, 언젠가 우리는 만날 수 있다고 이 작품은 작은 한 마디를 건네는 것 같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치유받을, 함께 한파를 뚫고 따스한 햇빛을 맞을 날을 공상해 본다.

[사진출처: 윤정인멜로디]

윤정인멜로디x프로젝트 1인실 <연결된 밤, 연결된 방>
일시
2021.10.23.

장소
창작공간 탭스테이션

출연
오윤정, 박예소, 안주영, 우유진, 박마리솔
안무
오윤정
연출
임범규
극작·기획
김주희
음악감독
민혜리
주최·주관
윤정인멜로디
협력
프로젝트 1인실
관련정보
https://m.blog.naver.com/project1room/22253880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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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현

정다현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단단한 나의 언어를 가지고 싶습니다.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https://fhtu.notion.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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