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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머리를 늘어트리고 당신을 바라보면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콜드슬립 <이인환각연쇄고리>

이지현

제211호

2021.12.09

서울 강북구 4.19 거리에 위치한 콜드슬립(koldsleep). 이곳 연구소에서는 꿈의 주파수를 들을 수 있는 ‘채널헤드’를 찾고 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해가 진 시간 동안에만 공연이 진행되며, 한 시간 간격의 회차마다 한 명의 관객만이 채널헤드가 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심지어 새벽 2시, 3시 타임도 있다.) 콜드슬립 내부 공간은 ‘차가운 잠’이라는 제목을 반영하듯 벽면이 새하얗게 칠해져 있고, 하얗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하얀 테이블 위에 하얀 컴퓨터가 하얀 조명을 받고 놓여 있다.
내가 예약한 시간인 저녁 7시가 되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자신을 연구원 3이라고 소개한다. 연구원 3은 말을 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대신하여 휴대폰에 입력된 메시지로 내용을 전한다.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채널헤드가 되기로 약속한 나는 벽면에 설치된 투명한 라디오 기기로 다가가 투명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지지직. 주파수를 몇 번 오가면서 맞추자 음성이 흘러나온다.

“내가 당신의 정체성을 수렴하는 단어를 이미 정해버린 것을 부디 용서하세요. … 꿈은 좌표를 가져야만 몸 밖에서도 살아남는다. 좌표를 발생시킨 꿈은 목소리로 변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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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슬립 전경. 우연히도, 고운소리 오디오 판매점이 나란히 있다. (사진 설명 및 제공: 필자)

‘꿈은 좌표를 가져야만 몸 밖에서도 살아남는다.’ 이 매력적인 결연함을 전해 듣고는 한순간에 설렜다. 만약 꿈이 좌표를 가진다면, 매일 밤 부유하는 나의 꿈을 붙잡아 현실로 들이는 것도 가능할까. 이를테면 지하철 2호선 외선순환을 타고 몇 개의 역을 지나면 뉴욕에 도착해 있는 꿈 같은 것.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말 그대로 꿈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요즘 더욱 자주 등장하는, 상상 속 여행지도 어쩌면 꿈의 좌표를 통해 현실로 가져올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온갖 몽상이 부유하는 가운데, 나는 이어폰 속 음성의 안내에 따라 냉장고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의 CD들을 20분 이내의 분량으로 고른다. 검은색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갑게 보관 중인 CD들 가운데 세 장을 고른다. 연구원 3은 내게서 CD를 건네받아 기계가 담겨 있는 반투명 아크릴 박스에 담는다. 연구원 3은 하얀 패딩점퍼를 입고, 나는 내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드디어 ‘이인환각연쇄고리’가 될 준비를 마치고, 이제 우리는 산책길을 나선다.

따듯하고 부드럽게 뛰는 저녁 식사

연구원 3은 꽤나 빠른 걸음으로, ‘고운소리’ 오디오 판매점 쪽으로 올라가 골목을 지난다. 한적한 주택가 사이에서 ‘바미건푸드’라는 상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크고 평화로운 건푸드 전문점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지만 나중을 기약하자. 모든 풍경들이 낯선 동네에서 연구원 3의 뒤를 따르며 방향도 알지 못한 채 걷는 이 시간이 비현실적인 꿈처럼 느껴진다.
골목을 지나 큰길가에 도착했다. 연구원 3과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가게와 가게 사이로 들어가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공터에 멈춘다. 우리는 마주보고 서서 나는 헤드폰을, 연구원 3은 이어폰을 끼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신선한 CD를 듣는다. 처음 고른 CD의 제목은 어렴풋이 기억나기로 ‘당신의 심장을 한순간에 엉망으로 만드는 소리’와 같은 것. 잠이 들락 말락 한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질감으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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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을 걸 때면 심장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아요. … 당신이 버튼을 누르냐, 누르지 않느냐에 따라 내 심장은 빵! 하고 터져버릴 수도, 이전보다 더 따듯하고 부드럽게 뛸 수도 있어요. 물론 나는 나의 이 작고 따듯한 심장이 항상 더 따듯하고 부드럽게 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데요. 왜냐하면 …”

첫 번째 꿈의 주파수가 들리는 동안, 연구원 3과 나는 지나온 길가 쪽이 아닌 건너편 동네를 바라보며 서 있다. 건너편 주택의 통유리창으로 비치는 아이와 엄마의 저녁식사에 시선을 빼앗긴다. 마치 섬유유연제 CF에서 그려지는 전형적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처럼, 아이는 가볍게 뛰놀고 엄마는 그런 아이를 다정하게 바라본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풍경이 먼 과거의 액자 속 그림처럼 느껴진다. 떨림과 불안의 마음이 공존하는 음성이 헤드폰으로 전해지는 동시에, 평온한 저녁식사 장면이 눈에 담기며 두 가지 감각이 겹친다. 그러다 어느 샌가, 일상의 조각을 염탐하며 꿈의 주파수와 연결시키고 있는 ‘나’를 자각한다. 소리가 멈추고, 연구원 3이 다음 길을 안내한다.

누군가 머리를 늘어트리고 당신을 바라보면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두 번째 꿈의 주파수를 찾기 위해 연구원 3이 이끈 곳은 커다랗고 긴 돌기둥들이 세워진 공원. 연구원 3은 내 몸과 시선을 기둥과 기둥 사이로 안내하고 CD를 재생한다.

“수로의 관리자로 채용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피핑 톰입니다. … 다른 경로가 보인다면 무시하십시오. 우리의 수로에는 직선 외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눈 앞에 보이던 보도블럭이 물처럼 보이기 시작해도 당황하지 않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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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핑 톰의 수로 (사진제공: 필자)

시선을 고정하자. 다른 길은 무시하자. 어쩐지 직선으로 가득 채운 공간에 서게 된 나는 더듬더듬, 주파수가 전하는 의미를 헤아리는 참이다. 그런데 잠시 후, 공원 오른쪽 길가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는 한 사람과, 그를 제지하는 두 명의 경찰관이 등장한다. 그래, 이상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해도 당황하지 말아야지. 연구원 3의 눈동자도 약간 흔들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꿈의 주파수를 따라가야 한다.

“… 눈을 올바른 방식으로 감았다 뜨면 원 위에 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안쪽에 누운 사람은 원의 중점 위치에 길게 누워있고 당신 쪽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

눈을 감았다 뜸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이가 이번에는 길게 누워서 발을 구른다. 경찰관 두 명이 제지해보려고 애쓰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누워 있다. 어쩐지, 꿈의 주파수와 지금 이 순간의 접점이 아주 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 그는 머리를 검은 원과 물로 길게 늘어트리고 있습니다. …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려고 하는 것 같으면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그이가 점점 공원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우리 곁으로 비틀비틀 다가온다. ‘꿈의 주파수는 분명, 당황하지 말고 눈을 감았다 뜨면 된다고…’ 라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견디던 순간, 연구원 3은 나를 빠르게 잡아 왼쪽의 냇가로 급히 이동시킨다. 수로에서의 꿈은 현실의 장면과 너무도 가까운 주파수로 접근하여 무척이나 끈끈한 연쇄고리를 이룬다.

마침내 우리는 마지막 꿈의 공간에 도달한다. 콜드슬립 연구소 앞 길가에 있는 자전거 보관대. 이번에도 나란히 서서 건너편 건물을 바라본다. 마지막 CD의 제목은 ↯로, 지그재그 화살표 기호이다. 횡단보도를 지나 한 사람이 수레를 끌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지만, 아마도 이번에는 평화롭게 들을 수 있으리라.

“이 회의실은 벽의 한 면이 통창이다. … 유리창에는 버섯구름과, 수면 위로 뛰는 날치떼처럼 번들거리는 유도탄들이 보인다 …”

맞은편 GS25 편의점을 나온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구름을 만들어낸다. 유리창에는 버섯구름. 자세히 보니 그중 한 사람은, 조금 전 내가 콜드슬립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내 앞으로 차를 너무 바짝 세워 부딪힐 뻔했던 사람이다. 아직도 여기 있네. 꿈과 현실을 또 다시 엮어보려는 중, 조금 전 수레를 끌고 오던 한 사람이 우리 옆에 수레를 세워놓고, 자전거를 한 대씩 한 대씩 옮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틈에 서 있다. 횡단보도 옆 길가의 한 구석에 연구원 3과 나, 그리고 자전거를 옮기는 사람 세 명이 한동안 붙어 있다.

“… 이후에도 끊임없이 선물을 하였다. 중독이었다. 히스가 필요로 하지도 않는 룸 스프레이, 망고 비누, 쉽게 따끈따끈해지는 그루프 … 불타는 유리창을 배경으로 히스는 나를 보고 있다 …”

편의점이 있는 건물 위층의 창문 가운데 하나가 붉은빛으로 빛난다. 불타는 유리창. 히스가 원하는 것을 편의점에 가서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선물을 주면 히스가 좋아할까. 이윽고 꿈의 주파수가 사라진다.
채널헤드로서 임무를 마친 우리는 콜드슬립으로 돌아온다. 나는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 연구원 3의 안내에 따라 나의 꿈에 대해 기록한다.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게 하는 행동을 동사로 표현하고, 꿈의 암호를 정한 뒤, 그림을 그리고, 녹음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연구소를 떠날 시간. 아쉽지만 연구원 3이 다음 채널헤드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2호선 외선순환 뉴욕에서의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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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 뉴욕역 바미건푸드 (사진제공: 필자)

분명 처음 도착했을 때는 콜드슬립 앞 길가에 집으로 직행하는 버스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좋아했었는데, 연구소 밖으로 나온 나는 어째서인지 고운소리를 지나 연구원 3이 안내해주었던 꿈의 주파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골목을 꺾으니 바미건푸드가 나온다. 바미건푸드는 마치 예전 내 꿈에 등장했던, 2호선 외선순환을 타고 도착한 뉴욕에 있을 법한 가게이다. 2호선 뉴욕역에서 마른 멸치와 반건조 노가리를 구입한다. 봉지를 손에 들고 나와 피핑 톰의 수로 공원을 향해 걸어간다. 그곳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누워 발을 구르던 사람의 흔적은 어느새 사라졌다. 어쩌면 그 장면은 꿈이었을까.
<이인환각연쇄고리>에서 내가 남기고 간 꿈의 기록은 이후 작업에서 소설의 일부로 활용된다고 한다. 각각의 채널헤드들이 남긴 기록의 완성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연구원 3을 따라 낯선 동네에서 생생하게 경험한 꿈과 현실의 얽힘이 아주 강렬한 감각으로 남아 있다. 이 기묘한 경험이 버섯구름이 되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그날의 주파수를 좌표로 남겨본다.

[사진 제공: 콜드슬립, 필자]

콜드슬립 <이인환각연쇄고리>
일자
2021.11.13 ~ 2021.11.21

장소
강북구 인수봉로 301

1차 연쇄고리
김선오, 박하늘, 백열, 서이제, 윤은성, 이아름, 장수양, 호저, 홍세영, B
2차 연쇄고리
위지영, 불특정 다수의 ‘채널헤드’
3차 연쇄고리
한주연
기획/연출
김미현
드라마트루그
한주연
사운드디자인
위지영
그래픽디자인
루드너드리드
주최/주관
koldsleep
후원
강북문화재단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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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 illa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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