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 계셨나 보군요. 아니요 조선에 있었습니다.
판, 소리내어 읽다 - 입체낭독극 <해녀탐정 홍설록>
김여진
212
2021.12.23
6개의 보면대 옆에 테왁1) 처럼 6개의 탐정 모자가 걸려있다. 여섯 소리꾼 중 모자를 쓴 사람이 1940년대의 사설탐정 ‘홍설록’으로 분한다. 설록은 제주의 귀신 테러 사건을 조사하다 해녀들이 독립을 위해 사건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들의 테러를 돕는 인물이다.
해녀항일운동과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의 만남. 이 낯선 이야기는 해녀들의 사후세계 ‘이어도’에서 시작한다. 죽은 해녀들의 목소리로 불리는 ‘이어도사나’ 서곡은 원곡 ‘이어도사나’2) 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모리 장단을 바탕으로, 특이한 베이스 리프에 신비로운 화음이 얹힌다. 아련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곡을 배경으로, 시간은 1932년으로 건너뛴다.
일본군 장교 고영태는 사설탐정이자 친구인 설록에게 조선총독부 제주 관저의 귀신 테러 사건을 맡긴다. 사건을 해결하러 제주에 도착한 설록은 일본의 수탈과 노동력 착취로 괴로워하는 해녀들을 마주한다. 한편 히로시 제주 지사는 사건을 담당한 설록에게 ‘ㅈㄴㄷㅁ’부터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과, 본인이 겪은 귀신 테러 사건을 전한다. 사건을 조사하던 설록은 갑자기 해녀가 되어야겠다고 선언하고 해녀들을 찾아간다. 설록은 해녀들에게 물질을 배우고, 오랜 시간 교류하며 귀신 테러 사건의 정체가 ‘잠녀동맹’ 해녀들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 설록은 다음 테러 작전을 말리지만 독립을 위한 해녀들의 다짐은 굳다. 그 다짐 속 테러 작전의 정체는 물질을 가장하여 제주 바다로 들어오는 일본 잠수함을 폭파하는 것이다. 해녀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바다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자, 설록은 해녀들을 도와 테러를 지휘한다.

소리꾼 여섯, 고수 다섯
극이 흘러가는 내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건반을 연주하는 김승진 음악감독을 중심으로 대금, 베이스, 국악 타악, 퍼커션으로 구성된 밴드가 ‘바닥소리’의 소리를 지탱한다. 판소리에서 고수가 하는 음악적 역할을 밴드로 확장한 것이다. “장단 주시오”라는 소리꾼의 부름에 고수가 아닌 건반 연주자가 타령 장단으로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타악 장단이 선율적 장단으로 진화함으로 서사의 분위기가 한층 살아난다. 설록과 와선, 영태 세 명이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인물마다 다른 장단을 사용하여 인물의 성격을 직감적으로 보여준다. 설록은 익살스러운 타령, 와선은 중후한 중중모리, 영태는 조마조마한 엇모리 장단으로 풀어냈고, 특히 설록이 영태를 짓궂게 놀리는 부분에서는 서도 민요 풍의 시김새가 절묘하다.
해녀들과 설록이 함께 마지막 작전을 펼치는 부분도 인상 깊다. 6인의 소리꾼은 보면대를 뒤로하고 관객 앞으로 한 발 다가와 긴박한 자진모리 장단을 탄다. 짧은 시간 안에 비밀 작전을 완수해야 한다는 초조함에 판소리의 빠른 말 붙임새가 더해져 듣는 이들의 긴장감도 상승한다. 철컥, 잠수함에 폭탄을 설치하고 나면 소리북의 온각점3)과 스네어 드럼으로 이뤄진 초침소리가 흐른다. 소리꾼들은 흐르는 시간 위로 긴 숨을 끌어 노래하고, 그 호흡을 따라 들으면 정말 바다 한가운데 숨이 차는 기분이 든다.

‘입체낭독극’이란 무엇인가
관람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공연이었다. 평범한 말들이 판소리 사설로 바뀌면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다. 그 사설에 제주 방언이 가미되고, 배우의 역할이 계속해서 바뀌기에 고도의 집중 상태가 지속됐다. 특히 제주 방언은 자문을 거친 전문 사투리였기에 더욱 생소했고, 오페라처럼 자막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작품은 주인공 홍설록을 포함하여 하나의 배역을 6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맡고 있는 독특한 형식을 띤다. 바닥소리 대표인 정지혜 연출은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풍자하고 표현한다. 그 매력적인 부분이 음악극 형식으로 오면서 역할이 분배가 되는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들이 제 안에 있었던 것 같다.”4)고 전했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각각이 연기하는 홍설록의 말투와 연기에 차이가 느껴져 몰입이 힘들었다. 판소리의 특성을 살리고, 모두가 주연 역할을 하겠다는 연출자의 의도를 담기 위해서는, 6명의 창자가 공유하는 각 역할의 페르소나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구축·분석하고, 인물이 가진 뉘앙스와 환경에 대한 치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관객이 색깔이 다른 소리꾼들 사이에서 살아나는 홍설록이라는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추리물이지만 관객에게 주어지는 힌트가 적다는 것도 아쉬웠다. 2016년에 초연하여 3년간 무대극이었던 작품을 낭독극 형식으로 올리면서, 미술과 움직임으로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의 틈이 느껴졌다. 차마 인지하지 못했던 설정이 튀어나와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설록의 사건 풀이는 쾌감보다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이 바닥의 소리
이날치 이후 최근 1년간 전통예술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대중이 전통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우려가 된다. 전통이 자신이 감상하는 ‘취향’의 영역에 있지 않고, 마치 도덕처럼 옳은 것,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할 생각은 없지만, 가끔 접하면 ‘국뽕’이 차오르는 음악!”이라는 태도가, 각각의 색깔로 활동하며 들어줄 이를 기다리고 있는 전통 예술 창작자들을 힘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 전통 음악이 추구하는 올바름이 있다면, 바닥소리의 정체성이 그 올바름에 가까울 것이다. ‘바닥소리’는 사회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목청 높여 세상에 외치자는 의미를 가지고 사회 문제와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한국의 노동 현실을 담은 <TALE>, 일제강점기 올림픽 선수의 도전기 <경성스케이터>, 제주 4.3사건 <살암시민 살아진다>, 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 이야기 <광주교도소의 슈바이처, 닥터2478>…. 판소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진지한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창극단’도 ‘이자람’도 ‘희비쌍곡선’도 아닌, ‘바닥소리’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다.
[사진 제공: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 일자
- 2021.12.8.
- 장소
- 서울돈화문국악당
- 원작
- 최용석
- 각색
- 정지혜
- 연출
- 이기쁨
- 작곡·음악감독
- 김승진
- 소리꾼
- 정지혜, 김부영, 김은경, 이승민, 강나현, 소장
- 연주자
- 김승진(건반), 설동호(베이스), 심운정(타악), 홍상진(타악), 이경구(대금)
- 기획
- 맹가희, 안유진
- 해녀가 물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을 뜨게 하는 공 모양의 기구
- 제주에서 해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부르는 느린 자진모리 장단의 구전민요이다. 이별이 없는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바다 여인들의 염원이 담겨있다. ‘이어도사나’는 노 저을 때 내는 여음을 의미한다.
- 소리북 통의 맨 꼭대기 가운데 자리이다. 딱딱한 소리가 난다.
- 권애진,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한국판 홈즈, 소리판 <해녀탐정 홍설록>」, 『뉴스프리존』, 2019.09.12.
- 김여진
- 주로 곡을 씁니다. 그러나 재밌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www.yeojink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