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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웅덩이의 무지개도 그 나름

극단 경험과상상 <낙원喪가 –종묘랩소디->

김은한

제214호

2022.02.24

요즘은 부쩍 ‘닳는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지구의 자원이 무한하지 않으며 언젠가 완전히 소진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그때그때 있는 걸 소모하면서 시간이 전부 흘러갈 때까지 작동하는 게 삶이다. 하지만 오래 쓰며 조금씩 작아진 부엌칼은 여전히 날카롭다, 몇몇 석상은 사람들의 마음과 함께 반질반질해진다. 물론 연극을 보는 마음, 연극을 하는 마음도 점점 닳는다. 부쩍 자신의 사랑이 관성이 아니었는지 점검하는 동료가 늘었다. 노련해지고, 교활해지고, 익숙해지는 것의 대가는 확실히 지불하고 있다. 계속 줄어든다.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살면 좋은가? 너무 많이 지나와 도달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빠르게 휘발하는 예술인 연극을 리뷰하는 일 역시 만사를 유예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번에 살펴볼 작품은 2021 원로예술인지원사업 선정작, 극단 경험과상상의 <낙원喪가>이다. 작중 무대는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이다. 종로에 자주 놀러 가던 시기가 있었다. 낙원상가에서 영화를 보고 부근에서 지나치게 저렴한 국밥과 포장마차 안주를 먹고 귀가하는 게 즐거움이었다. 늘 노인들이 모여 독특한 활기가 있는 곳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곳은 나름의 생태계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렀다. 제목은 낙원과 상가(喪家)를 함께 배치하여 두 이미지를 함께 연상케 한다. 작품의 정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다만 여기의 낙원은 살아서 도달한 낙원이니, 이상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이리라. 모두 60대에서 70대의 노인 인물이다. 작품은 안전하고 단정한 느낌으로 연출되었다. 어쩔 줄 모르는 현실을 익살로 잘 풀어내어 씁쓸함은 뒷맛으로 즐길 수 있게 설계되었다. 단순하지만 깔끔한 무대와 의상,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라이브 연주는 다소 친숙한 곡으로 관객의 호응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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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에 종일 모여 장기를 두는 사내들이 있다. 농담을 늘어놓고 자주 싸우면서도 어느새 또 막걸리에 계란후라이를 곁들이곤 한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기풍’은 미군 부대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수많은 스타의 곁에 있었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왈츠를 배우며 새로운 연애를 즐기고 있다. 맞은편에는 베트남 참전용사 ‘주식’이 있다. 자랑스럽게 훈장이 걸린 붉은 조끼를 입고 다니며 다혈질이지만 점잖은 구석도 있다. 깐족거리며 흥과 익살을 담당하는 지독한 짠돌이 ‘만동’이 있다. 동갑이어도 형님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자판기 커피 잔돈과 막걸리값을 요령 있게 챙긴다. 교회를 다니며 500원씩 꼼꼼히 모으는 검약가이다.

‘노랑이 커피’(믹스 커피)를 판매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남순’이 있다. 4,100원의 쓴 커피를 좋다고 마시는 ‘말자’를 이해할 수가 없다. ‘만동’은 ‘남순’에게 푹 빠져있는 양 굴면서도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고 지질하게 구는데, 둘은 지독하게 미운 정이 들 것이다. ‘말자’는 ‘기풍’과 풋풋한 연애를 한다. 능숙한 내숭 뒤에는 거친 성미도 있다. 언젠가 그의 가족을 소개받고 어쩌면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제는 박카스 아줌마를 그만두고 조용히 정착하고 싶다. 하지만 ‘기풍’은 도무지 어느 선 이상을 넘어오지 않는다. 왜일까?

어느 날부터 사라진 박씨가 있다. 여기에는 신묘약이라는 도시전설이 연관되어 있다. 이곳 인근에는 종종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행상이 있다고 한다. 스무 살은 젊어진다는 신묘약을 판매하지만, 결코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는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고 한다. 소문으로 박씨는 신묘약을 먹고 대단한 기운이 솟아 전국의 여인들에게 매력을 뽐내고 있다고 한다. ‘기풍’은 자신이 응당 신묘약을 구입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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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喪가>를 보면서 언뜻 테라리움 시트콤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테라리움은 유리 벽 안에 작게 꾸며둔 정원, 생태계를 뜻한다. 관객은 완성된 하나의 세계가 흐르는 걸 본다. 여기엔 모든 게 있다. 어떤 관객에게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웃기고 공감이 가고 사랑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주로 중장년 관객을 겨냥한 듯한 유머는 관객에게 적중해 큰 웃음을 만들어내었다. 원로 배우들의 단단한 연기가 편안함을 주지만 특유의 연극톤은 이것이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하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됨을 드러낸다. 무대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연극에 빠져있던 정신이 잠깐씩 돌아올 때마다 가혹한 현실을 되새김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꿋꿋이 견디며 여기 탑골공원으로 흘러들어와 고여있다. 당연히 순탄할 리가 없다. 모두 이면에 숨겨진 모습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하나씩 감싸 안고 만들어진 화신에 가깝다.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은 언뜻 과거를 드러내기도 하고 묘한 관계에 빠지기도 한다. 막바지에 갑작스럽게 밝혀지는 박씨의 행방은 진작부터 예견된 쓸쓸한 말로다.

연극이 그렇듯이 극장에서 재생되는 건 우리와 맞닿은 어떤 세계. 무대에 현실의 조명이 들어오고 관객들이 극장을 벗어나면 바깥에는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과열되고 있는 감염병 확산과 낯선 투자에 달려드는 사람들, 합리를 판단하기 곤란한 정세와 선진국에 대한 깊은 불신. 이 모든 현재 삶의 고민은 곧 장래의 어두운 삶을 예견하는 것 같아 두렵다. 덕분에 조금은 심란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 탑골공원은 유일하게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곳, 외면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시름으로 가득한 이가 모이기에 지긋지긋한 곳이다. 4,100원짜리 커피나 신묘약의 존재는 ‘어쩌면 이곳에서 탈출해 새로운 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장치이다. 계속 쫓아보고 싶고, 믿어보고 싶은 곳. 이것이 90분간의 연극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계속 쫓았을 것이다. 처절하게 믿었으리라. 작중에 제시되는 사회문제들은 크게 비판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희곡의, 작품의 힘이 부족하다기보다는 너무나 지금의 일이고, 숨 쉬듯이 느끼는 불안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느끼는 막막함이 한 번 더 늘었다고 어쩔 도리가 생기는 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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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또 크게 다를 바 없는 후일담을 살짝 드러내며 커튼콜로 넘어간다. 여기에서 작품은 일종의 ‘절망의 희망’을 준다. 바로 아직 여명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믿었던 것에 모두 배신당하고 상처 입었지만 아직은 여명이 남아있는 서로가 있다. 그냥, 있다. 그래서 절망이자 희망이다. 모두 스러지고 텅 빌 때까지 있을 거다. 이걸 왜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웃고 우는 이 세계와 다르지 않다. 무엇 하나 잘되지 않았지만 아직은 있다. 비 오는 날의 물웅덩이에 뜬 기름 무지개를 떠올렸다. 종종 아름다워 보이는 때가 있고, 그저 기름으로 보이는 때가 있다. 삶이 어떠했노라 말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시간을 전부 쓸 때까지 우리는 살아있고 그걸 삶이라고 부른다.

[사진 제공: ⓒAejin Kwoun]

극단 경험과상상 <낙원喪가 -종묘랩소디>
일자
2022.2.3 ~ 2.13

장소
대학로 씨어터쿰

극작
정상미
연출
류성
출연
우상민, 고인배, 이태훈, 권범택, 차유경
연주
김승진
무대
김민중
의상
조문수
분장
김미숙
조명
비추라이트
사진
염준호
조연출
김민태, 박다솜
기획홍보
김유정
제작PD
이승구
포스터디자인
정윤희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0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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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3년 남은 계획

8~9월 스튜디오 나나다시와 <스탠드업 씨어터> 진행 중
10월 신작 구상 중
12월 지금 아카이브와 코미디 캠프를 궁리 중

정보/문의 인스타그램 @mammothmer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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