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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를 놓고 울었던 우리는 쥐였을까?

안티무민클럽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양효실

제216호

2022.04.14

2019년 출간된 배수아의 소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의 제목은 『관객모독』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페터 한트케의 삶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늦을 것이다 나는 숲에 있다(Peter Handke: Bin im Wald. Kann sein, dass ich mich verspäte...)>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또 여주인공(들)의 이름 우루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남부에 수메르 문명 시기 세워진 도시 우루”에서 따온 것이다.1) 이 두 가지 입문적 사실만 놓고 봐도 본 소설은 창작이라기보다는 구성이고, 원본이라기보다는 꼴라주이다. 낭독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는 소설은 전체 내용을 끌고 가는 서사나 “의미” 없이(배수아는 인터뷰어에게 “의미를 묻지 마세요, 제게”라고 말한다) 말이 말을 끌고 가는 텍스트이자, 자기-지시적인 글쓰기이며, 시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원형으로써 서로서로 틈입하면서 이루어지는” 소설이다. 차용과 인용은 소설의 바탕이자 ‘정체성’이고, 우지안, 현호정, 하은빈으로 구성된 AMC(안티무민클럽)가 소설의 연극화를 문의했을 때 배수아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해체, 재구성해도 무방하다고 허락했다고 했다.2)
이해 가능한 서사나 의미를 제거한, 어디서부터 읽어도 무방한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이하 『우루』로 약칭한다)를 놓고 AMC의 세 멤버는 각자 원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뽑아 조각-카드를 만든 후 각자의 카드를 섞고 합치고 빼고 연결하면서 공연의 대본을 만들었다. 후고 발(Hugo Bal)이 운영한 카바레 볼테르에 모인 시인들의 다다 시(Dada poems)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을 기억한다면,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기표?)만 남기고 의미는 사라진 이런 스크립트야말로 낭독을 위한 작품의 바로 그 형상일 것이다. 이것은 글자가 소통과 전달의 기능에서 자유로울 때의 무질서도에 대한 것이며, 재현과 표현의 폭정에 대한 항거이며, 읽히자마자 사라지는 소리나 몸짓을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런 즉흥과 넌센스로서의 스크립트를 외워 한 시간가량 공연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AMC의 셋은 잘라낸 문장들을 이어붙이는 풀, 접속사를 갖고 “자기들만의 서사”를 만들면서, 원작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다른 『우루』를 만들어냈다.
본 연극의 연출가 우지안과 『단명소녀 투쟁기』의 작가 현호정이 맡은 배역, “우루와 우루가 아닌 존재”는 대화를 하고 마주 보고 실뜨기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겹쳐 누워 밀착하고 그저 서로를 응시하다가 울었다. 둘의 차이는 엄연했다. 이것이 타자에게서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보는 상상계적 동일시의 서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서로를 향하고 대화하지만 그것이 심지어 공연의 배역을 넘어 두 예술가의 ‘만남’을 향한 응시였음은 내가 계속 의심했고 결국 받아들였던 이 연극의 차이, 특이성이었다. 바닥에 있는 타원형의 거울은 계속 붉은 모래에 의해 더럽혀졌다. 둘의 말은 너덜너덜했으므로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그 말을 듣길 포기했다. 대신에 어리고 단단한 여자아이 둘이 바로 그런 몸과 표정으로 움직이고 겹치고 연결되고 멀어지는 것을 더 많이 보았다. 늦게 들어가서 바닥에 앉아 있던 나는 둘의 헐떡이는 숨소리, 질질 끌리는 몸, 춤 아닌 춤, (구)명성교회(TINC)의 유리창을 투과해서 들어오는 오후 햇볕의 느린 춤사위, 흔들리는 붉은 털실, 바닥에 쓸리는 모래 소리, 심지어 이쪽으로 저쪽으로 고쳐 앉고 있는 내 신체를 더 많이 보고 느꼈다. 나타남이 곧 사라짐인 퍼포먼스가 연극과 공연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유일무이한 사건의 ‘정체성’이었다.

본문사진1
©김태리

이번 공연은 관악문화재단의 후원 하에 신림중앙시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의 확산 중에 취소되었던 2020년 작품의 초연이기도 했다. 우지안은 때를 놓친 공연을 “기후 위기 때문에 지금 안 하면 못할 것 같아서” 자비를 들여 이번에 총 3회 무대에 올렸다. 15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AMC 멤버들 저변에는 죽은 이들이 여럿 생겼다. 원작 『우루』에 등장하는 많은 죽음을 다소 관념적으로 받아들였던 멤버들에게 죽음은 근거리의 구체적 사건으로 지각되었고, 배우의 입-말이 몸-말에 접속하는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2020년 공연에 배우로 참가했다가 이번 공연에서는 ‘움직임’을 맡으면서 무대 뒤로 물러난 하은빈은 우지안과 현호정의 평소 움직임, 특이성을 감안해서 각자의 동선이나 몸짓을 만들었다고 했다. 즉 호정이 “더 동물적이고 섹슈얼”했다면 지안은 “더 성인에 가깝고 어떤 구도가 있는” 배역으로 무대에 배치되었다. 동시에 지안은 호정과 함께 “바닥에 무게를 싣지 않고 거의 최소한만 디디는 수준으로 뛰어다니는 걸음걸이”, 말하자면 유년기의 걸음걸이를 연습했다.
아이들은 미숙한 목소리, 몸짓이다. 어른들이 주도하는 세계에서는 거의 안 보이거나 단지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목소리와 행위성을 빼앗긴 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일이 일어나고 무책임한 어른들이 제거되거나 죽어버린 뒤, 사건을 증언하고 기억하는 것은 아이들, 혹은 아이들의 몸이다. 아이들은 차마 죽일 수 없는 상징(=미래?)이거나, 쥐 같아서 죽일 수 없는 고귀하고 비천한 존재이다. 재현과 표현의 왕국에서 부차적 역할인 아이들은 쥐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폐허에서는, 기억과 말이 필요 없는 장소에서는 비로소 주인공이 된다. 더욱이 살아남은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더 강하고 지독하고 단단하다. 나는 공연의 후반부에서는 쓰고 있던 마스크가 흥건히 젖도록 울었다. 다른 시간대에 공연을 보았던 리타도 그렇게 울었다고 했고, 간간이 많이들 울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타와 나, AMC 멤버들 3인의 대담은 왜 이 실험적이고 해체적인, ‘개념적인’, 반-연극적인 연극을 보면서 울었는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한 만남으로 급작스럽게 마련되었다.3)

본문사진2
©우지안

물론 나는 사후적으로 내 울음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호정과 지안은 우루와 다름 아닌 자신을 함께 연기한 것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은 두 젊은 예술가 ‘자신의’ 것이었고, 가령 내가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지안보다 아직 모르는 작가 호정의, 리타가 정확히 표현한 대로 “또랑또랑하고 엄청 당돌한 목소리, 또 확신 같은 것”이 나는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 태도를 전달하고 있었기에 그랬다는 것을. (원작에서 요나스 메카스가 메일에 썼듯이)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몸을 흔들리게 한다. 호정이 지안을 바라보다가 관객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호정의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울어보지 못한 울음이어서,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울음이어서 곧장 나를 매료시키고 감염시켰다. 호정은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되게 들숨날숨처럼 계속 떨어지는 게 있어서 지안이 자신에게 준 에너지” 같았다고 설명했다. 마치 이게 뭐지 하고 더듬거리다가 그것이 눈물이나 피나 벌레나 남의 죽은 몸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이 정화되고 후회하고 부끄러워지고 박수를 하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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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리

공연의 마지막에서 호정과 지안은 에코처럼 들리는 대사, 그러나 조금씩 다른 대사를 반복한다. “너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너를 바라보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연극이 끝나는 날까지”. 잊은 자와 기억하는 자 사이에서 한 시간가량이 다 흘렀을 때, 두 우루, “우리”는 말한다. 앞으로에 대해, 미래에 대해, 연극이나 삶이 끝날 때까지에 대해, 내가 네 옆에 있을 것에 대해. 먼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산자가 먼저 죽은 자에게, 그딴 구별이 무의미한 연극에 대해.

[사진 제공: ©김태리, ©우지안]

안티무민클럽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4)
일자
2022.3.5 ~ 3.6

장소
This is not a church(구 명성교회)

원작
배수아
출연
우지안, 현호정
연출
우지안
각색
현호정, 우지안
움직임
하은빈
무대 디자인
전인
미술
전인, 김태리
음악
나온유
디자인
정소영
기록영상 촬영
김예솔비, 박정연
기록영상 편집
우지안
기록사진
김태리, 전인
음향오퍼레이터
하은빈
하우스
박종주, 이동휘
제작
Antimoominclub
관련정보
https://www.instagram.com/p/CaJzuzJpFwn/?utm_source=ig_web_copy_link
  1. “배수아 작가 초청 기획대담 1부: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2021.12.28.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cEq0tqA1TwE
  2. “책의 어떤 부분을 낭송할지의 문제는 연출하시는 분과 배우들이 결정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봐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단 하나, 낭송분 발췌를 하면서 줄거리의 흐름이나 맥락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입니다.” 배수아가 AMC에게 보낸 메일 중 일부 인용.
  3.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 실린 《쥐와 물: 연극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라운드 테이블》이 그날의 기록이다. 본 글에서 인용된 은빈, 호정, 지안, 리타의 문장은 모두 이 녹취에서 갖고 왔다.
  4.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공연 영상은 4월 15일 자정까지 https://youtu.be/e4yaSOdJDT4 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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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실

양효실
서울대, 한예종 등에서 예술 관련 강의를 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여러 책을 번역했고, 『불구의 삶, 사랑의 말』과 같은 책을 썼다. 주로 시각예술계의 작가들에 대한 비평문을 쓰고 있고 문학이나 공연에 대해서도 간혹 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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