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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자가 고백하는 자가 되어 비로소 완성되는 이야기

생존자프로젝트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

박다솔

제216호

2022.04.14

극장으로 가는 길에, 나는 운전을 하며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있었다. 대통령 당선인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불러일으킬 파장과 우려, 가능한 여러 대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일목요연하게, 그러나 나라는 개인에게는 전혀 정리가 되지 않는 내용으로, 5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빠르게 흘러갔다. 그 소식을 전달하는 목소리들이 너무 단정하고 반듯해서, 어긋나고 있는 나의 말과 마음이 불온한 것인 양 감각됐다. 차에서 내려 극장으로 들어갔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가, 극장 밖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정치가 외면하는 이야기 혹은 정치가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이야기가 이 극장 안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연극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성민, 지운, 두경, 세 명의 30대 여성 인물이 어린 시절 함께 시간을 보냈던 면목동이라는 공통의 장소를 경유하며 각자의 기억으로 진입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여성으로서의 삶과 나비효과처럼 현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과거의 사건들이 하나둘씩 기침하듯 튀어나온다. 참으려 할수록 목구멍이 간지럽고, 억지로 삼키려 할수록 삭아버리는 가래처럼, 이 세 사람이 뱉어내는 거칠고 뻣뻣한 것들이 콜록콜록 참을성 없이 튀어나와 무대에 잔흔을 남긴다. 그러나 그 기침소리는 라디오에서 들었던 무결점의 목소리보다도 내게 가까운 것,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냥’이라 대답하고 침묵하던 것들을 구태여 꺼내어 놓으며

이 공연은 작품의 제목처럼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빌려온다. 빌려오기는 하나, 그것을 다큐멘터리라 지칭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완성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의 시선이 미처 결정되기 전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가깝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성민은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인 면목동이 재개발로 황폐화되기 전 그 모습을 기록해두기 위해 면목동을 찾아 영상을 찍고, 동네에서 함께 유년기를 보냈던 친구들(두경, 지운)을 인터뷰한다. 공연은 이 인터뷰를 위해 성민의 집을 방문한 두경과 지운, 그리고 성민 세 사람이 만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되, 그 이야기들 사이로 성민이 촬영한 면목동의 모습과 그 안에 놓인 성민의 모습이 영사되며 연극과 다큐멘터리 영상이 교차되는 형식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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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상에 등장하는 성민은 면목 시장 부근일 것으로 보이는 동네의 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지도를 보고 있다. 왜 이것을 촬영하느냐 묻는 촬영 감독의 질문에, 성민은 ‘그냥. 그냥 기록하는 거야’라고 답한다. ‘그냥’이라는 말은, 실로 설명하기 복잡하거나 귀찮은 것, 혹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말해야 할 때 손쉽게 꺼내어 쓰는 말이다.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온 마음을 꺼내 보여야 한다거나, 드러내기 불편한 부분까지 노출해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답하는 자의 판단에 비추어) 비난/비판을 감수해야 할 정도의 이야기를 거쳐야 한다면, 이 ‘그냥’이라는 말만큼 간단하고 단순하게 어려운 질문을 모면하기 좋은 표현은 없을지도 모른다. 영상 속 성민은 자신이 면목동을 기록해야 하는 이유를 그렇게 잠시 회피하지만, 두경과 지운을 만나 인터뷰하며 결국 그 질문(‘왜 면목동을 찍는가?’)과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둘러 대답하기에 실패한다. 두경과 지운이 집요하게 자신의 기억을 탐방하며 고백하고, 성민이 질문하는 자로서 이들의 기억들을 따라가게 될수록 자기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냥’은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선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공연의 중반부에 접어들며 성민과 지운 사이에 있던 해묵은 갈등이 드러나자, 두경은 ‘있는 그대로 봐주고, 이해해 줘 그냥!’이라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곧바로 상대의 질문이 따라 나온다. ‘왜 그냥이어야 하는데?’ 그 타당해 보이는 질문 앞에서, 우리들은 결국 흔들린다. 이렇듯 집요하게 질문하기-충실하게 답하기가 핑팽퐁 랠리를 이어나가면, 비로소 그제야 ‘이야기’라는 것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존재한다. 질문하는 자가 대답하는 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묻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어떻게 보일지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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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자의 시선과 답하는 자의 기억이 만나

두경과 지운은 성민의 질문에 따라 세 사람이 면목동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되짚어가며, 그러나 동시에 그 시절에는 친구들과 공유하지 않았던 사적인 기억들을 꺼내어 가며 인터뷰에 응한다. 인터뷰는 성민이 묻고, 다른 이들이 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가 종국에는 묻는 자와 답하는 자의 역할이 모호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성민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로부터 잘 알지 못하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 ‘모르는’ 이야기가 자신의 대답과 기억으로 마침내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두경은 두 아이의 엄마로, 학창 시절 가수를 꿈꿨으나 20대 후반에 결혼을 하며 자연스레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엄마로서 미숙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그 미숙함이 자신의 엄마로부터 비롯된 어떤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가 일찍이 결혼을 한 것 또한 편모 가정에서 성장한 그의 성장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두경은 성민의 질문에 답하며 크게 웃고, 자주 웃는다. 문장의 끝마다 성격 좋게 웃어 보이는 그 웃음이, 관객으로서 어느 순간 불편해지기도 한다. 두경의 웃음이, 마치 성민의 ‘그냥’이란 답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되기 때문이다. 두경의 모습을 보며, 살아가기 위한 방책으로 어물쩍 웃기를 택하는 순간이 자꾸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반면, 지운은 결혼 생활 중 시댁으로부터 임신을 강요받고 이 과정에서 결혼 제도를 불신하며 이혼을 선택한 인물로 설명된다. 성민의 집에 온 지운은 인터뷰를 거절하며 성민을 난처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카메라 앞에 서기로 결정한다. 지운이 인터뷰를 거절했던 이유는, 자신이 면목동에 대한 기억을 진실되게 돌이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과거 성민의 모순에 대해, 성민이 거짓되게 연출했던 것들에 대해 언급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이혼한 편부 가정에서 자란 지운은 단란함을 자랑하는 성민의 가정을 선망하곤 했으나, 어느 날 우연히 성민의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민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된 지운은 성민과 이전만큼 가깝게 지낼 수 없게 되고, 그 이유를 미처 알지 못하던 성민은 지운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가 자신이 지운에게 고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지운이 면목동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을 고백해야 하는 이 인터뷰는, 성민이 거짓으로 연출했던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억을 고백하게끔 만듦과 동시에 성민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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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하던 자(지운)의 고백이 묻는 자(성민)의 과거를 향할 때, 묻는 자는 ‘질문하기’의 포지션을 벗어나 ‘고백하기’의 포지션에 도착하게 된다. 지운의 인터뷰 끝에, 성민은 결국 카메라 앞에 앉아 렌즈를 응시하며 이 랠리를 이어나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끝에 이르러서야, 성민의 다큐멘터리가 어떤 시선으로 편집될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연출자가 선택한 이야기를 어떤 시선으로 담아내고 편집했느냐에 따라 관객들도 그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제안받는다. 따라서 성민의 다큐멘터리는 성민이 카메라 앞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특정 태도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관객들은 성민이 그 스스로 이 다큐멘터리의 목소리가 될 것임을 인지하게 되는 것으로 이 극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면목동이 아니어도 좋을

면목동이라는 동네의 이름을 빌려왔지만, 실은 이 이야기는 면목동이 아니어도 좋을지 모른다. 성민, 두경, 지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면목동이라는 동네의 지형적 특성이나 거기서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을 다루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공교롭게도 면목동에서 만나게 됐을 뿐이다.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누구나의 고백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세 사람의 고백은 내게 낯익은 것이라는 이유로 예리한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이며, 공교롭게도 세 사람과 비슷한 연령대인 내게, 지운의 엄마로서의 고충이나 두경의 이혼담, 그리고 성민의 은근한 비혼에 대한 결심은 나의 어제와 오늘의 식사 자리에서 쏟아졌던 이야기이며 트위터에서 140자를 꽉 채워 몇만 번 리트윗 되어 내 타임라인을 채우곤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계속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까지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아직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가 들여다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계속되어야 할 충분한 명분이 있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성민이 결국 선택하게 된 ‘고백하는 자’의 모습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니었는지 끝내 질문하게 된다. 성민의 고백이, 지운의 다그침으로 발작하듯 일어난 사건이 아니길 바란다. 기침이 참을 수 없는 것인 듯, 그의 고백도 언제고 터져 나올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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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생존자프로젝트]

생존자프로젝트 <면목동: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
일자
2022.3.16 ~ 3.20

장소
연우소극장

작·연출
홍주아
촬영
김정호
출연
김한별이, 현채아, 여가휘
조명감독
유혜연
무대크루
한명찬, 강경훈
오퍼레이터
황지영
인터뷰이
김선아, 박선우, 박우진, 박지우, 류경환, 배지혜, 변혜경, 이현아, 허윤
기획제작
생존자프로젝트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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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솔

박다솔
학부에서 예술경영을, 석사에서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극단, 극장, 축제 등에서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을 했었고, 현재는 공연예술 평론, 기록 및 드라마터그로 활동하고 있다.
belle.dadas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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