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야기는 있어

신촌문화발전소 창작과정지원 <영자씨의 시발택시>

장지영

217호

2022.04.28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줘

누구에게나 할머니가 있다. 그러니까, 할머니와 유난히 각별한 사이든,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든, 할머니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든, 아무튼 누구에게나 할머니는 있다. 그리고 나에게 각별한 우리 할머니는, 올해 90살, 영자씨와 동갑인, ‘찬또배기’ 이찬원을 좋아하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춘천 시내의 방앗간 집 둘째 딸로 태어나 춘천여고를 졸업한, 성질이 불같지만 엄살도 심한 황채희 씨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대체로 <미스터트롯>에 나온 가수들을 좋아하고 막장드라마를 하루에 평균 4편 정도 보며 우리 엄마에게 가혹했고 딸과 아들을 차별했다. 한국의 ‘할머니’들은 일반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다른 모든 집단이 그러하듯, 할머니라고 해서 모두 같은 할머니는 아니다. 할머니들에게도 각각의 삶이 있고, 살아오는 동안 그들이 겪은 일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평생 집에서 살림하며 살았던 우리 할머니와 30년 넘게 택시 기사로 살아온 영자씨는, 동갑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 작품은 그 고유함을 말한다. 할머니를 설명하는 말이 ‘할머니’ 한마디일 수는 없다는 것.

1

<영자씨의 시발택시>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택시를 운전한 최영자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부산 시내에 도로도 제대로 나기 전’ 시발택시로 운전을 시작하여 개인택시를 마련하고, 모범운전수가 된, 여성운전사회 회장님 영자씨. 관객들은 영자씨 택시의 승객이 된 것처럼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그가 만난 사람들을 만난다. 무대를 빙글빙글 도는 택시처럼 영자씨는 멈추지 않고 길을 달린다. 가족들을 건사하고, 후배들을 챙기고, 차별에 강하게 반발하는 영자씨에게 관객은 금세 마음을 빼앗긴다.
작품은 영자씨를 신화적인 인물로도, 희생적인 인물로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영자씨가 그런 묘사들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어서일 것이다. 영자씨는 신화적이지만 어떤 일을 포기하고 타협해야 했고, 희생적이지만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지는 못했다. 작품은 그 모든 것이 영자씨임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영자씨를 관객들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창작자들이 그의 삶과, 그의 주변 사람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연극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연극들이 우리에게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작품을 위해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것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올바른 재현의 윤리란 무엇인지, 인물을 묘사할 때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답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극을 만들 때는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인물은 대개 그 기대를 빗겨간다. 작품을 만들고 있는 방식이 그들을 내가 만든 틀에 끼워 넣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23

나는 이 작품에서 재현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방법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타인의 삶을 대상화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방식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수 있으니, 타인의 삶을 극으로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일지 모른다.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느냐는 그다음의 문제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빛난다. 극도 마찬가지이다. 극이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 극은 빛난다. 그러니 어쩌면 타인의 삶을 재현하는 연극을 만들 때 필요한 하나의 윤리는 이것일지 모른다. ‘사랑하기’.

동시대에 필요한 연극하기

내가 최근 참여한 연극 <콜타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연극은요, 이게 동시대에 필요할 때에만 유효한 거예요”. 나는 이 말을 오래 생각했다. 작품을 만들면서 동료들과 자주 주고받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이 이야기가 필요할까? 이 이야기는 지금 유효한가? 때로 우리는 ‘이 이야기는 낡았다, 이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것들은 정말로 그러하다. 혐오를 정당화하거나, 낡은 차별을 답습하는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회색지대에 있다. 필요하기도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잘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은 ‘누구에게’ 필요한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이다. 젊은 페미니스트, 고등교육을 받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비장애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이야기의 필요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영자씨의 시발택시>에서, 영자씨는 많은 이야기들을 거쳐간다.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성차별, 유리천장, 여성 가장으로 살아가기, 여성-퀴어 등이 그것이다. 작품은 그것을 영자씨 삶의 한 부분 이상의 무엇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한 차별이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그것이 영자씨와 그의 친구들을 무엇으로 만드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영자씨가 겪어야 했던 차별이나, 그의 친구들이 말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겪는 고충은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작품이 그러한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지 않으니 관객들이 차별의 존재, 여성-퀴어-운전기사의 존재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들어본 문제’를 ‘들어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동시대적이지 않은가?
최근 나의 화두는 ‘각자의 속도로 페미니즘’이다. 어떤 사람은 어제 처음으로 검색창에 ‘페미니즘’을 입력해 보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페미니즘과 만나는 각자의 삶의 담론 역시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일을, 누군가는 기후를, 누군가는 사랑을 고민할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제 많이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아직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러니 모든 이야기는 귀하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 귀한가?’라고 질문하고 싶다. ‘동시대에’ ‘유효한’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어떤 동시대의 어떤 유효함인지 다시 질문하고 싶다. 영자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제껏 한번도 생각지 못한 화두를 던져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자씨는 이렇게 씩씩하게 자신의 일을 지켜나간 어른들이 있어 지금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연해 보이는 이 (재)발견은 내게는 귀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현재를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할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는 분명 필요할 것이다. 부끄럽게도 동시대인을 생각할 때 내가 자주 빠뜨리는 우리 할머니에게, 내일은 영자씨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할머니는 분명 좋아하실 것이다.

[사진제공: 신촌문화발전소]

신촌문화발전소 창작과정지원 <영자씨의 시발택시>
일자
2022.4.22 ~ 4.30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작·연출
박주영
출연
최정화, 임윤진, 정제이, 오수혜, 장석환
무대미술
남경식
조명디자인
김소현
의상디자인
이윤진
분장디자인
장경숙
조연출
박세련, 김현빈
제작감독
정석우
무대크루
문경태, 박진호, 김희찬
주최
신촌문화발전소
주관
기지
관련정보
https://www.scas.or.kr/kr/program/program_view.php?idx=132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장지영

장지영
드라마터그.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은 더 많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