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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멈추지 않는 힘을 얻는 애도의 시간

프로젝트그룹 SAVE <방문자들>

이산

제220호

2022.06.16

불행 앞에서 이유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행위일까. 어느 현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고 묻는 이에게 그가 불행을 겪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물었다고 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답은 폭력이라는 불행에 대한 재해석의 시작이지만, ‘왜’라는 질문의 종착지는 될 수 없다. 어느 날은 한 줄의 답변이 다 쓰이기도 전에 또 다른 기억이 일렁이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파도에, 이 질문 하나를 붙들고 몸을 싣기도 한다. 때론 ‘네 탓이야’라는 답이 두려워 차마 집어 들지 못했던 질문, 때론 나도 모르고 움켜쥐고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질문. 연극 <방문자들>은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수없이 던져온 ‘왜’라는 질문을 생의 최후까지 놓지 않았던 정유리와, 떠난 그의 질문을 받아 안을 수밖에 없을 목격자들의 이야기다.

제작진은 자신이 스토킹하는 정유리에게 신분을 숨기고 디자인을 의뢰한 김태준 소유의 스튜디오로 관객을 들여보낸다. 맞은편 관객과 마주보도록 극장 양 측면에 나란히 줄지어 놓인 객석 뒤로 무대 뒷벽과 같은 디자인의 벽이 세워져 있어, 관객은 등장인물과 동일한 공간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초보 디자이너인 유리는 의뢰인의 요청대로 첫 디자인과 시공을 마무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내부에 있던 벽을 모두 허물고 화장실조차 벽 없이 변기만 덩그러니 놓도록 리모델링한 디자인에, 인부는 계속 안전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며 유리를 비난한다.

공연 홍보물의 시놉시스를 읽은 관객이라면, 태준이 유리를 감금하고 감시하기 위해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공간을 의뢰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유리가 모르는 위험을 알고 유리와 한 공간에 있는 듯한 긴장감이 인부의 투덜거림을 더욱 경계하게 한다. 객석 뒤의 벽과 무대 뒷벽 사이의 등퇴장로가 끝없이 깊을 것만 같은 느낌, 쇠사슬로 고정된 천정의 프레임과 샹들리에가 유독 위태로워 보이는 느낌 역시 그런 긴장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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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이 유리의 파티 참석을 위해 보냈다는 웨딩헬퍼가 드레스를 건네고 유리의 화장을 마무리할 무렵, 정장 차림의 태준이 들어온다. 의도치 않게 태준이 원하는 공간으로 스튜디오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한 유리는, 자신의 손으로 디자인한 공간 안에서 주인도 방문자도 되지 못한 채 고립된다. 웨딩헬퍼가 있어도, 유리 어머니의 신고를 받은 경찰관이 들어와도, 시공을 마치고 돌아간 인부에게 전화가 걸려 와도, 유리와 태준 사이의 폭력적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벽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태준이 나타나는 순간 얼어붙은 유리, 태준의 나직한 몇 마디에 미안하다는 말을 익숙하게 뱉는 유리의 모습을 통해, 유리를 가둔 벽은 관객에게 그 질감과 두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태준은 유리를 폭행한 뒤에도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해 유리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말한다. 유리를 제압하는 것은 태준 개인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변호사인 태준은 유리의 귓가에 자신이 참석한 공판에서 스토킹을 하다가 피해자의 가족을 살해한 피고인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속삭인다. 환기구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유리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인부는 태준과 싸움이 붙지만, 경찰은 인부를 말리면서 태준이 변호사이니 사과하고 합의할 것을 권한다. 웨딩헬퍼는 남자친구가 없다는 유리의 말을 듣고도 남자친구와 얼른 화해하라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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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들은 방음 처리된 둔중한 극장 문을 통해 스튜디오를 드나든다. 태준도, 인부도, 웨딩헬퍼도, 경찰관도, 파티에 초대받은 유리의 친구도 스스럼없이 벌컥 열었던 문을 오직 유리만 열지 못한다. 유리가 열 수 없는 문으로 한때 유리에게도 닿아있었던 세상의 조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리는 자신의 힘으로도, 시시각각 연락을 취해 유리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어머니의 힘으로도, 태준의 폭력으로 끊긴 세상과의 연결을 이을 수 없기에 절망한다.

태준의 대사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 가진 패턴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유리의 목소리로 들려야 할 유리의 요구를 탈취하는 태준의 모습이 숨이 막히도록 익숙하다.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잖아. 날 설득하려고 하기 전에, 내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내가 말할 때 한 번만이라도 내가 왜 이렇게 말을 하는지 생각해봤다면 난 당신에게 적어도 좋은 남자로 남았을 거야”. 폭력의 현실적 묘사와 함께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유리의 노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창작진의 고민 역시 곳곳에 드러난다. 태준의 폭력행위와 유리의 반응은 말초적 자극에 그치지 않고 필요한 인상을 남기도록 섬세하게 조절되어 있다. 공연은 태준의 폭력에 제압된 유리를 더 긴 시간 보여주면서도, 유리가 드레스를 내던지는 단 한 순간의 저항을 결코 잊지 못하게끔 구성되었다. 유리의 마지막 모습은 아폴론에게 희생된 다프네를 모티브로 한 사진 ‘회전초를 든 네이트’와 겹치고, 다프네의 신화가 유리를 위한 애도의 공간을 내어준다. 신화가 품은 광활함이 현실의 불안을 잠시 내려둔 채 유리를 애도하도록 관객을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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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이 끝나고 방문자들이 열었던 문을 통해 극장 밖으로 나가는 관객을 통해 유리를 위한 애도의 공간은 더욱 넓어질지도 모른다. 극 속의 방문자들이 태준의 스튜디오로 발을 들이는 동시에 폭력에 연루되고, 유리의 죽음을 발견함으로써 유리가 남긴 질문을 이어받듯, 관객은 극에 쓰이지 않은 방문자들의 변화를 극장 밖에서 그려낼 몫을 지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애도의 시간이, 폭력의 구조를 허물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동력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글을 맺는다.

[사진 제공: 프로젝트그룹 SAVE]

프로젝트그룹 SAVE <방문자들>
일자
2022.5.27 ~ 6.5

장소
삼일로 창고극장

최세아
연출
홍은정
출연
이민수, 진영진, 김정아, 박민성, 이수정, 강지현
예술감독
김승환
무대
송기조
조명
김종석
음향
박용신
의상
최아령
움직임
이상철
조연출
이수정
기획
진영진
홍보
이민수
홍보영상촬영
박진태
홍보영상편집
김면수
포스터
박민성
조명오퍼
박찬호
음향오퍼
박승희
진행
제예은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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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이산 배우,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활동가
마임과 연극 공연을 한다. 솔로마임옴니버스 <구름텃밭> <스턴트맘>을 공연했고 지금도 꾸준히 마임작품을 만든다. 일주일 중 3일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전화를 받는다. 상담을 하면서 만나는 성폭력피해여성들의 이야기가 귀, 머리, 가슴에 머물고 통과하는 감각이 자신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공연에 담기고 있음을 느낀다.

sanlee.mim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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