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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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연표 밖에 산다 <민주주의 예행연습 DEMOCRACY REHEARSAL: 제1부. 해방정국>

권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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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역사 연표에 익숙하다. 1392. 조선 건국. 1876. 강화도 조약. 1989. 베를린 장벽 붕괴. 연표에는 주로 시대의 변곡점이 된 사건들이 실린다. 변곡점은 힘과 지배의 균형이 달라질 때 나타나므로,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선별적으로 구성된 기록물로 볼 수 있다. 연표는 한 시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표처럼 보이지만, 실은 객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 때는, ‘연표 바깥의’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무대는 헤게모니를 이행하는 공간이 아닌, 해방 공간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예행연습 DEMOCRACY REHEARSAL: 제1부. 해방정국> (이하 <민주주의 예행연습>)은 역사 연표만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약 3년의 세월이, 통시적 연표 안에서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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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에 갇힌 내러티브

관객은 극장(문화비축기지 T6 원형회의실) 앞에서 나눠주는 프로그램북을 들고 입장한다. 표지에는 ‘쉽게 이해하기’라는 말이 적혀 있다. 내용이 쉽지 않다는 암시일까? 일반적인 프로그램북과 달리, 여기엔 연출의 말도, 배우 사진도, 무대 스케치도 없다. 대신 해방정국(1945~1948)의 주요 사건 연표와 당대 지식인들의 약력, 설명만이 적혀 있다. 무대는 마당극을 연상하게 만드는 원형 무대인데, 동그랗게 배치된 객석 위로 대형 스크린 세 개가 떠 있다. 연극이 시작되면 배우들은 해방정국 연대기(연표)에 나오는 사건들을 차례대로 연기한다. 스크린에는 사건들의 이름이나, 참고가 될 만한 사진 자료가 올라간다. ‘엔도 류사쿠와 여운형의 면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 ‘조신인민공화국 선포’, ‘미·일 항복문서 조인식’, ‘미군정 실시’, ‘미군정 인공 승인 거절’ …. 연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에야 막을 내린다.

연극의 배경이 된 3년, 해방 정국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자주적인 현대 국가로 향하는 여정이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격변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찬탁과 반탁, 좌익과 우익 등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남몰래 체포나 감금, 암살을 당하는 사람도 많았다. 혼돈의 시기이므로, 이 시기를 연극으로 다루고 싶다면 구심점이 될 만한 사건을 잘 설정하고, 장면의 연결 고리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전통적인 극작술을 따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더하고 뺄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의 경우, 드라마투르기를 위해 노력한 흔적은 보이나, 재구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선의를 가지고 해석하자면, 이러한 내러티브 역시 하나의 실험으로 볼 여지는 있다. 대신 실험이라면, 관객이 이를 소화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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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을 줄였지만, 여전히 무겁다

공연 내내, 맞은편 관객들이 무대와 프로그램북을 번갈아 보거나, 인물 설명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조명 효과 없이, 내내 밝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작품이었기에 그런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다. 조명은 연극 무대의 ‘스펙터클’을 위해 필요한 장치인데, 이를 제거했다면, 소격 효과를 유도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의상 연출도 같은 틀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배우들이 특별한 분장 없이 자기 옷을 입고, 어깨에 자기가 맡은 배역의 이름이 적힌 띠만 두른 채 무대에 올라와 연기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간중간 자신이 맡은 배역을 평론하기도 한다. 관객이 연극에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기보다는, 관찰자 입장에서 거리를 두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무대와 의상을 톺아보니, 주제와 방향성이 어렴풋이 보였다. 해방 정국을 경유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문제는 관객에게 사유를 위한 물리적 여백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연극에 담긴 정보의 양의 지나치게 방대하다. 고민의 흔적이 담긴 장치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텍스트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다. 모든 서사 단위가 당대 일부 사회 지도층, 정치인의 영웅 서사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은 사실이다. 개개인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도 크다. 다만 이들이 어떤 모임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대립했는지, 누가 암살당했는지, 누가 귀국했는지, 어떤 연설을 했는지, 일일이 나열하고, 텍스트에 욱여넣을 필요가 있을까? 연출적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도 분명히 있었다. 현대무용이 가미된 장면들이다. 배우들이 무대 중앙의 하얀 띠를 당기거나 풀면서 대립하는 장면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상황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장면만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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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부재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이렇게 무겁게 전달되는 내러티브가 동시대의 민주주의를 사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지난 6월 1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언론은 두 선거에서 표심을 가른 요인이 지역, 부동산, 젠더 등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2022년에 갑자기 등장한 기현상이 아니며,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 안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지적된 문제들이다. ‘민주주의’를 예행연습 하고 싶었다면, 사회 지도층 개개인을 서사화하기보다는, 민심과 관계된 이슈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았을까. 지역감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한국전쟁, 분단 현실과 관련이 있다. 부동산 문제는 해방정국의 토지개혁 이슈와 연결된다. 물론 연극 중반 렉처 퍼포먼스 장면에서, 중간중간 토지제도 개혁과 관련하여 배우들이 당대 민중들의 민심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쉬어가는’ 수준의 정보 전달이며, 연극 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아니다. 해방정국을 통해 민주주의를 사유하는 작품인데, 연표만 있고 민중은 없다.

‘민중’은 막이 내린 이후에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배우들이 한 명씩 무대 앞으로 나와 ‘내가 바라는 나라’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이들의 차례가 끝나면, 관객에게 마이크가 돌아간다. 관객은 별안간 한 명씩 마이크를 들고 ‘내가 바라는 나라’에 대해 말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장장 3시간의 연극 동안 민중의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관객을 소환하여 각자의 소망을 이야기하라니. 현실 정치와 유리된 민중의 모습이 떠오른다. ‘민주적인 시공간’은 관객에게 마이크만 준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 예행연습>은 삼부작이라고 들었는데, 이후의 제2부와 제3부에서는 민중의 존재가 더 많이 드러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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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보통현상]

<민주주의 예행연습 DEMOCRACY REHEARSAL : 제1부.해방정국>
일자
2022.6.2 ~ 6.12

장소
문화비축기지 T6 원형회의실

작·연출
안경모
출연
박주혁, 서성영, 오윤정, 우유진, 이기복, 이혜진, 임병수, 장명훈, 허솔
음악연주
윤현종, 김영민
드라마투르그
이영숙
음악감독
윤현종
안무
이경은
무대미술
도현진
영상
J EFFECT
조연출
박현지
티켓매니지먼트
공연관리솔루션 공기
프로듀서
김민솔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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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직장인 작가. 평론, 시, 소설을 씁니다.
pinkrawdat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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