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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의 시간은 소멸을 향해 흘러가지 않는다

극단 두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

김상옥

제224호

2022.10.27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은 모두가 잠든 밤에서부터 시작된다. 배우 다섯여 명은 알록달록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지만, 털모자·앞치마·안경·토시·긴 양말 등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다. 이들은 개별적이고 고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변화하고 이동하면서, 성별과 세대를 짐작할 수 없는 혼성적 캐릭터 ‘할아머니’를 함께 연기한다. 무대 한편엔 목재 구조물이 자리하는데, 바퀴 달린 합판 위에 사각뿔 탑이 있고, 꼭대기에는 가로로 기다란 역삼각형을 얹은 모습이다. 언뜻 보기에 A형 사다리와 시소를 결합한 듯한 목재 오브제는 이불을 덮고 있다. 무대 중앙에는 같은 모양의 미니어처가 놓여 있다. 한 할아머니가 자신을 닮은 인형이 미니어처 위에서 놀 수 있도록 이리저리 움직인다.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인 이 장면은 처음과 끝을 연결하면서 ‘순환’이라는 작품의 키워드를 강조한다.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의 공연사진이다. 주황색 티셔츠와 파란 멜빵바지를 입고 빨간 털모자를 쓴 배우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재 구조물을 바라보고 있다. 구조물의 왼편에는 배우와 비슷한 옷을 입은 인형이 있다.

황금빛 돌을 품은 여행 가방은 펼쳐진 책과 같이 옆으로 뉘어져 입을 벌리고 있다. 그 위에 선 인형은 아이의 목소리로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아득한 옛날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들려주는 신화 속에서, 돌은 씨앗을 품고 머리카락을 키워낸다. 새빨간 머리카락은 덫을 놓고, 세상의 온갖 것을 집어삼킨다. 그렇게 성장은 죽음의 포식자를 낳는다. 세상을 먹어 치우자 방귀가 만들어지고, 방귀는 형형색색 가루들을 흩뿌리면서, 더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뒤바뀐다. 작품 내내 하나의 존재 안에서,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이러한 전이가 거푸 나타난다.

방귀가 만들어낸 햇살은 아침을 끌어당긴다. 빛이 찾아들자 목재 오브제를 덮고 있던 이불이 걷히고, 휴지·신발·옷걸이·우산과 같은 생활용품이 드러난다. 하늘에 매달린 회색 구름은 뜯어먹히는 빵이 되었다가, 설거지와 목욕을 위한 비를 내리기도 한다. 청소와 빨래 등 할아머니(들)의 일상은 “뽀드득뽀드득”과 같은 의성어로 표현된다. 분명하지 않은 언어가 이 공연의 특징이다. 한 줄 대사를 여럿이 끊어 말하고, 이어 말하고, 반복해 말하면서 메아리가 울린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뭐뭐뭐”가 되풀이된다. 그 대사 뒤에 곧바로 다른 할아머니의 해석이 따라붙지만, 매개자는 때로 진실을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뭐뭐뭐”의 뜻을 다 파악할 수 없다. 정의하려 하지 않는 언어는 구분과 위계를 무화한다. 누군가는 이 극을 보고 어른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걸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분명 지루한 어린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 언어, 분별되지 않는 언어 속에서 어떤 아이들의 직관은 어른보다 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낸다.

할아머니(들)은 밤의 고요를 뚫고, 기억 여행을 하기 위해 활기를 되찾는다. 생활용품이 떨어져 나간 목재 오브제는 일상을 벗어나 꿈의 세계로 데려다주는 ‘기억장치’가 된다. 할아머니(들)은 기억장치 주변을 맴돌면서 소라껍데기에 귀를 기울인다. 파도와 바람 소리, 시간의 물레를 되감듯 끼익거리는 소리 등이 들려오고, 진흙 속에 놓인 할아머니(들)이 허우적댄다. 그들은 다른 시간에 던져진 것처럼, 어둡고 축축한 어머니의 양수에 들어간 것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 타인 속에 존재하면서 너와 나로 구분되지 않던 태고의 시간을 감각하고 있다. 할아머니는 이제 ‘아이’가 된다. 질기고 쓴 진흙 속 연잎 뿌리는 부드럽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맛으로 변한다. 암흑이 깔린 진흙 연못에는 밝은 달빛이 산다. 잇따르는 모순의 이미지다.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의 공연사진이다. 사람 키보다 조금 더 큰 목재 구조물을 사이에 두고 네 명의 배우들이 저마다 소라를 귀에 대고 소리를 듣고 있다. 목재 구조물에는 확성기, 우산, 기타 등이 걸려있다.

기억장치 끝에 매달려 아이를 쫓는 달은 ‘오빠’로 불린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데 비해, 달은 태양 빛에 반사되어야만 보이는 존재다. 달은 밝게 빛나지만 어두운 이면을 가졌으며, 소멸했다가 차오르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죽음과 재생이라는 세상의 섭리를 표상한다. 신화 속에서 절대자로 여겨지는 태양은 남성, 변덕스럽게 모습을 바꾸는 달은 여성의 이미지로 곧잘 이분화되어왔다. 이 극은 달을 남성의 이미지와 연결하면서 오래된 고정관념을 흩트린다.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은 과거를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통해 신화를 다시 구성하고자 한다.

꿈을 여행하는 시간 속에서 물결 모양 물레에 비친 파란 조명이 바다를 만들어낸다. 생활 기계로 보이는 오브제의 동그란 문을 열자, 달빛과 닮은 노란 조명 안에서 고래가 유영한다. 이때 터진 어린이 관객의 탄성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고래는 인간이 닿기 힘든 깊은 바닷속에 산다. 그러면서 바다의 표면을 넘어 하늘을 향해 높이 뛰어오르기도 한다. 지금은 해양생물로 분류되지만, 아득히 먼 옛날 그들의 조상은 땅에 사는 포유류였다. 바다와 육지, 수면과 대기, 어둠과 빛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래는 예로부터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신비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 세계는 삶과 죽음의 영역을 포함한다.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의 공연사진이다. 바다처럼 보이는 푸른 천이 배우들의 어깨 높이까지 펼쳐져 있고, 배우들은 달 모양의 조명을 응시하고 있다. 위 아래가 뒤집힌 초승달 모양 가운데에 노란 고래 한 마리가 있다.

달은 운명대로 점차 스러져 바닷가에 유해를 남겼다. 하지만 달의 뼈인 조개껍데기에서는 여전히 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이야기-신화-꿈의 이미지는 죽은 달을 부활시킨다. 손톱만큼 홀쭉했던 달이 바닷물을 빨아 먹고 다시 풍성해졌다가 이울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영원의 시간은 성장만을 강조하지만 죽음과 파괴가 예고된 근대의 시간성과 대비된다. 극 중 초침 소리와 괘종 소리로 상징되는 현대의 시간은 철저하게 수량화되어, 화폐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 시간 이외의 것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반면 기억장치는 휴식과 꿈속에서 죽음을 거치지만, 다시 생성되고 마는 신화적 시간을 불러들인다. 탑처럼 생긴 기억장치 하부는 위로 갈수록 소멸을 향해 좁혀지지만, 아이가 타고 노는 상부 구조물은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처럼 증가와 감소 표식을 한데 붙여놓은 모양새다. 점차 밝게 빛났다가 어느 기점을 지나면 사그라드는 하루의 햇빛처럼, 성장과 쇠락을 반복하는 인생처럼. 이 기억장치에는 하루·인생·인류의 역사·신화의 시간이 형상화돼있다.

우리의 시간은 죽음이라는 한 점을 향해 흘러가지 않는다. 할아머니가 아이가 되고, 아이가 신화 속 고래로 바뀌듯, 여러 존재로 변화를 거듭해나갈 뿐이다. 상실의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해준다면, 작은 위로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나의 평화를 위해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들, 나의 충만함을 위해 상대의 빈곤을 꾀하는 이들이 있다. 순환과 전이에 대한 상상력으로 우리가 모두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세상은 조금이나마 고통과 멀어질 수 있을까.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의 공연사진이다. 천으로 여기 저기를 덮은 거대한 목재 구조물이 무대 뒤편에 있다. 구조물 앞에 멜빵바지 또는 앞치마를 입은 네 명의 배우들이 하나의 붉은 줄을 잡고 있다. 오른편 배우는 누워 한 손과 발로 줄을 잡고, 왼편의 배우는 두 손과 손가락에 줄을 감았다. 구조물의 바로 앞, 중앙에는 두 명의 배우가 있는데 한 명은 허리에 줄을 감고, 그 옆의 배우는 두 손으로 줄을 잡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두]

2022 키우피우 오브제극축제
극단 두〈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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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김상옥
연극학을 전공하고,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활동했다. 경계를 넘는 동시대 예술, 연극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만남에 관심을 두고 있다. gracegat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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