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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괴물들

극단 하이카라 <괴물>

권혜린

제225호

2022.11.10

연극 <괴물>은 시대의 억압으로 괴물이 되었던 세 존재를 그린 작품이다. 신여성 김승희, 퀴어인 동시에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승희의 딸 윤미영,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서, 승희가 만든 실험체인 ‘이름 없는 괴물’이 작품의 주축을 이룬다. 1930년대에서 2020년대까지 백 년에 가까운 간극이 있지만, 이들의 삶은 당대에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비정상인으로, 소수자로, 이방인으로 불리며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괴물성은 외부의 시선으로만 한정한다면 부정적이다. 작품도 전반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이다. 철제로 된 2층 구조물에 오른쪽 앞부분에는 실험실로 쓰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는 무대도 어두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적극적으로 여성괴물을 ‘쓰는’ 행위를 통해, 양상은 다르지만 바바라 크리드가 말하는 ‘억압과 위반 사이’의 여성괴물을 보여준다. 여성의 삶을 기준으로 할 때 내용은 비극이지만, 괴물로 표현되는 형식마저 비극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무정함 속에서도 주체성을 보여 준 승희, 느리지만 약하지는 않은 ‘이름 없는 괴물’, 순응적이지만 패배주의는 아닌 미영을 연기한 배우들의 강렬한 에너지 역시 비극을 중화해 주었다.

<괴물>의 공연 사진이다. 무대 뒤쪽에는 양측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는 2층 구조물이 있다. 계단의 왼편에 세 명의 의사 가운을 걸친 이들이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다. 1층에는 테이블이 있다. 해부된 동물들이 담긴 유리병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의사 가운을 입은 김승희가 핀셋으로 무언가를 집어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촬영: 백혜린

‘다른 괴물’ 쓰기

연극 <괴물>은 ‘어머니-딸’의 2대에 걸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승희의 실험체이자 미영의 ‘언니’이기도 한 ‘이름 없는 괴물’이 틈입하면서 괴물의 계보가 비틀린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과 한국전쟁, 1960년대 산업화와 현재까지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나타나는 괴물로서의 여성은 계승되지 않는/계승될 수 없는 비일관성을 지니며 ‘다른 괴물’로 변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괴한 존재로 여겨지는 여성괴물은 “여성성은 수동성을 구성한다는 관점에 도전”1)하여 시대의 희생자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작품에서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캐릭터는 승희이다. 실력양성운동을 했던 아버지와 독립운동을 했던 남편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임무는 남성의 전유물이 된 상황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조선 여성 승희는 일본에서 의대를 졸업한 뒤 경성에 돌아와 의사로 일하면서 결혼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괴이한 물건 보듯” 하는 시선에 의해 자신이 ‘하이칼라’라는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 이질성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산다. 그는 결혼과 출산을 했지만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신비에 매혹되는 과학자이자 탐구자로서 “내 것을 만들기 위해” 실험에 몰두한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집요하게 반복하는 실험은 광기와 열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실험의 성공으로 성취감을 느낀 뒤, 실험체에도 지성이 있을지 실험하기 위해 원작에서는 괴물이 독학으로 언어를 익혔던 것과 달리 괴물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당대에 계몽의 주체로 남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였던 것을 상기한다면 계몽의 주체가 된 여성으로서 괴물을 가르치는 승희의 모습은 남성의 역할을 전유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이혼과 자살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칭했던 것에서 나아가 ‘다른 괴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실험체가 온전한 소유물에서 벗어나 승희를 ‘어머니’라고 부르거나, 관계와 감정을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험체로만 한정되었을 때는 도구로서 실험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되는 존재였지만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지성을 갖게 된 괴물 역시 다르게 쓰이기 시작한다.

<괴물>의 공연 사진이다. 무대 중앙에 놓인 수술대 위에 한 여성이 누워있고, 의사 가운을 입은 김승희가 등불을 들고 고개를 숙여 수술대 위의 여성을 들여다보고 있다. 음산한 느낌의 푸른 조명이 이들을 비춘다.
촬영: 백혜린

괴물의 동력, 감정

괴물은 외부적인 시선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괴물>에서 여성괴물들의 동력이 무료함, 외로움, 슬픔의 감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승희는 안정적이지만 변화 없는 일상에서 무료함을 느끼고 의대생의 “정글 같은 삶”을 그리워한다. 남편이 여러 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남성들만의 일을 하는 동안, 승희 역시 자신만의 실험을 하며 이때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와 같은 생기는 무료한 일상을 견디게 한다.
지성을 획득한 ‘이름 없는 괴물’에게도 감정은, 알고 싶은 대상으로서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뜨거움과 따뜻함 사이”로 불명확하게 느껴지는 체온처럼 감정에는 명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는 승희와 “함께하는 시간의 고요함”을 좋아했으나 전쟁으로 승희가 부재하자 고립을 선택한다. 짐승도, 인간도 아닌, “다듬고 다듬어도 괴물”이라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지성을 준 승희를 저주하였으나 원작과는 달리 복수를 하지 않고 미영의 존재도 수용하게 된다. 타인을 파괴하는 복수심 대신 타인을 돌보는 이타심을 발휘하여 고아가 된 미영이 살아남게 해주고, 산속에 살면서 다른 여성들의 삶을 챙기며 시간을 이어 간다. 고요한 듯 하지만 내면에서는 격렬함을 지닌 ‘이름 없는 괴물’은 자신과 다르게 성장하고 늙어가는 미영을 보며 외로움의 감정으로 살아간다.
퀴어에 대한 혐오로 연인을 잃은 미영은 함께 파독 간호사로 가고자 했던 꿈을 혼자서 이룬 채 “각지고 낯선 언어들” 속에서 평생 디아스포라로 살아간다. 자신이 앉은 곳을 자신이 온 곳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속하지 못하지만 삶이 있으니 괜찮다고 했던 덤덤한 태도는 오랫동안 삭인 감정들이 응어리진 모습을 보여준다. 무감이나 체념이 아닌 슬픔은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뒤에도 ‘생의 한가운데’에서 삶을 지속하는 힘이 된다.

<괴물>의 주연 배우들의 사진이다. 모두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좌측부터 윤미영 역의 허윤지, 김승희 역의 김태은, 괴물 역의 이채령이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촬영: 강희주

괴물을 쓰는 여성(들)

연극 <괴물>은 90분 동안 시대와 인물을 넘나들면서 촘촘하게 짜인 괴물의 서사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밀도가 높았으나 전반부 승희 이야기와 후반부 미영 이야기의 분위기와 결이 다르고 전반부에서 긴장감이 넘쳐 후반부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두 인물을 각각 다른 작품으로 구성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음새 역할을 하는 ‘이름 없는 괴물’에 가닿았을 때 여성(괴물) 서사의 주인공들로서 세 존재가 모두 나와야 했던 이유를 수긍하게 되었다. 한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괴물의 현재성을 고민하고자 하는 시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극 <괴물>은 괴물을 쓰는 여성(들)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 노트를 통해 승희는 괴물을 쓰는 여성이 되었다. ‘이름 없는 괴물’은 일기를 통해 괴물을 쓴다. 미영은 ‘이름 없는 괴물’에게 편지를 쓰면서 괴물을 쓴다. 그 안에 자신들의 삶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는 궁극적으로 시대가 부르는 괴물들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연구 노트, 일기, 편지는 괴물을 쓰는 여성들의 목소리들을 들려준다. ‘그저 살아 있다’라는 메시지로 마무리하는 것은 그들을 괴물로 명명함으로써 배제하고 소멸하려 했던 것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살아남겠다는 것으로 읽혔다. 삶을 무기력하게 포기하지 않았던 마지막 장면에서는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그때가 바로, ‘그들이 쓴 괴물들’이 ‘우리가 쓴 괴물들’로 전이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극단 하이카라 <괴물>
  • 일자 2022.10.20 ~ 10.30
  • 장소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 연출·극작 서승연 출연 이채령, 김태은, 허윤지, 임휘진, 김령화, 김남희, 박영진, 한소희 조연출 주예령 기획 김진선 조명 박혜림 무대 백혜린 음악 이진형 분장 김근영 그래픽디자인 아페퍼 일러스트 모노켈 후원 서울문화재단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1935
  1. 바바라 크리드,『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손희정 옮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7,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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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린

권혜린
문학 연구자, 강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읽고 쓰기를 꿈꿉니다.
lingi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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