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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라지만 언제나 오늘은 비극입니다

극단 코너스톤 <맹>

김지수

제225호

2022.11.10

비극의 주인공들은 진짜 비극이 자신들을 덮쳐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비극 속 인물인 줄을 모른다. 진짜 비극은 비극이 이미 자신들을 집어삼켰음에도 스스로가 비극 속 인물인지 모르는 데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니…” 라는 말은 더없이 오만하고 가련하다.
극단 코너스톤의 연극 <맹>은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각색한 공연이다. ‘경사’라는 말이 제목에서 사라졌지만 “비극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대사에 그 흔적을 남겨두었다. ‘맹하다’는 것은 곧 자신의 좌표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다. 이처럼 연극 <맹>은 인간의 삶을 비극적 희극으로 보여주었으나, 한편으론 기대에 어긋난 각색이 못내 아쉬워지기도 했다.

씁쓸한 잔치에 초대합니다

카펫 하나가 깔려 있는 단촐한 무대로 배우들이 구음 길놀이를 하며 진입한다. 굿거리에서 휘모리장단까지 사물악기와 새납 구음을 입으로 내며 관객을 맞는다. 풍물을 치며 등장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탈반이나 마당극 계보의 연극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맹>의 길놀이는 관객을 결혼 잔치에 적극적으로 초대하여 흥을 올리고 비극성을 극대화하겠다는 묘수로 보인다. 게다가 “오늘의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니 즐기라고까지 덧붙이니 말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맹진사댁 경사」의 줄거리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연극 <맹> 역시 큰 줄기는 「맹진사댁 경사」를 따른다. 맹진사의 딸 갑분은 윗동네 김판서의 아들과 결혼할 예정인데 이 결혼은 사랑하는 두 인물 간의 결합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 즉 매매혼이다. 그런데 맹진사네 집에 찾아온 윗동네의 인물은 김판서의 아들 미언이 양발 사이즈가 다른 ‘절름발이’라 귀띔한다. 맹진사 부부는 딸을 “짝짝이 아들”과 혼인시킬 수 없다며 하녀 입분을 갑분으로 둔갑시키는데, 결혼식 당일 훤칠한 청년이 자신을 미언이라 소개하고 미언은 결국 입분과 결혼하게 된다.
이 기이한 소동이 과연 누구에게 경사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작 희곡과 <맹>은 마침내 짝을 찾은 입분과 미언을 경사의 진짜 대상으로, 나머지 맹진사의 혈족은 흉사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매혼 사건의 진짜 승자는 갑분이다. 피해당사자가 될 뻔했으나 결혼잔치 장소에서 유일하게 유리된 인물인 갑분이야말로 매매혼에서 ‘탈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탈출 역시 자의가 아니었고 갑분 역시 “짝짝이” 남편을 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갑분은 자신을 승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비극에서 ‘탈출’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맹>의 공연 사진. 빨간 카펫이 깔린 무대 가운데 파란 자켓과 바지, 회색 티셔츠를 입은 맹진사가 한 손을 뻗어 올리고 제자리에서 뛰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 다섯 명의 인물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밝은 표정으로 함께 뛴다.

선로 이탈 #1. 엇나간 유머

다분히 권선징악적 의도를 가진 원작 희곡은 동시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비판받아 마땅하다. 본디 이 희곡은 지금의 관점에서 결코 권선징악이 될 수 없다. 착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이 장애 없는 남성과의 혼인이라는 점, 권력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성이 하층 여성을 구제하는 서사, 장애를 결함으로 보는 시각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 희곡이 동시대에 공연되려면 상기의 문제들을 의식적으로 전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맹>은 어떤가?
무대 의상이 일본을 경유한 서구식 의복이었다는 점을 볼 때 작품의 배경은 원작 희곡의 배경인 1940년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대사 곳곳에는 21세기의 흔적이 묻어있다. 김판서의 집을 두고 “사이즈가 청와대”라고 말하다 “아차 이때 청와대 없었지” 하고 정정하는 등, 자유자재로 전환되는 공연의 시공간과 현실의 시공간은 유머로 기능한다. 이 공연은 기본적으로 웃기다. 배우들의 치밀한 호흡과 능숙한 연출이 결합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위트가 아주 조화롭다.
그런데 웃음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맹진사의 아내는 하녀 입분의 근로기준법 준수 요구에 대하여 “(입분이가) 공론화 안 하는 것으로 감사해야지”라며 비아냥댄다. 이때 맹진사의 아내가 보인 반인권적 태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다면 문제 되지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공론화’를 비웃음으로써 웃음을 겨냥하였다. 하녀 입분의 요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마찬가지로 정신적 학대의 일종인 ‘가스라이팅’ 등의 단어를 가볍게 다루는 연출 및 연기 방식은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맹>의 공연 사진이다. 파란 색 옅은 조명 아래 세 명의 배우들이 어깨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다.

선로 이탈 #2. 균형을 잃은 ‘각색’, 위험한 ‘각색하지 않음’

나아가 작품은 입분의 투쟁을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계약시간 외 근무는 부당하다고 주장하던 입분의 말은 윗동네 손님의 등장으로 곧바로 묵살된다. 이것 역시 작품의 비극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고 믿고 싶었으나 혼사와 관련된 입분의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작품은 한낱 하인의 시위(protest)는 실패하고 만다는 세계의 비극을 보여주려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분은 원치 않던 결혼을 강제로 하게 되어 절망하는데, <맹>에서 그 절망의 원인은 ‘자신이 실은 갑분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입분의 일시적 절망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주인댁에 의해 강제로 혼인하게 되어서도, 매매혼의 문제를 인식해서도 아니다. 원작에서는 미언이 입분에게 자신을 ‘여보’라고 부르라고 하지만, <맹>에서는 입분이 자신을 ‘갑분’이라 불러달라고 미언에게 요청한다. ‘갑분이라 불러달라’, 하녀와 아가씨 사이의 미묘한 에로틱 설정이나 장 주네의 「하녀들」에서처럼 주체가 소외되고 신분적 선망 대상으로의 동일시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중 유일하게 동시대적·주체적 인물로 등장하는 입분이 자신을 갑분으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순간 입분의 동시대적 변형의 당위는 거세되고 말았다. 입분의 노동 투쟁은 돌연 갑분의 인생 탈취로 전환된다. 완벽한 선로 이탈이다.
노동운동가 입분의 선로 이탈이 각색 방향에 대한 의구심으로 남는다면, ‘각색하지 않음’이 문제 되는 점은 바로 장애=부적합 신랑감에 대한 문제의식의 부재다. 정작 원작 희곡의 비판 쟁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던 듯하다. 물론 원작에서의 심각한 장애 비하 대사 중 일부는 덜어냈지만, 여전히 문제적 표현은 삭제되지 않았고 다리 이형(異形)을 이유로 혼인을 망설인다는 본질적 문제는 고심되지 않았다. 미언이 갑분의 신랑감으로 부적합한 이유를 충분히 새롭게 개발해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맹>의 공연 사진이다. 한 배우가 번개 모양의 붉은색 판넬을 들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여섯 명의 배우들이 바닥에 뒤엉켜 있는데, 모두 울상이다. 그중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허공을 향해 손을 쭉 뻗으며 절규하고 있다.

맹, 맹진사댁만의 일이 아닌

서두에 밝힌 제목의 함의를 보충할 시간이다. 제목에서 사라진 것은 ‘경사’뿐이 아니다. ‘맹’이라는 단일한 형태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소거되었다. 떠들썩한 혼사 소동은 맹진사댁이라는 특정 집단만의 사건으로 잔류하기보다는 보편으로 확장된다.
공연의 결말은 이렇다. 맹진사가 혼인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안개 속에서 절망하다 다시 말을 타고 다른 지역의 양반댁을 찾아 나선다. 길놀이가 끝나고 본격적인 서사의 시작이 맹진사의 회귀였다면, 서사의 끝은 맹진사가 다시 떠남으로써 맺어진다. 마치 권력에의 부질없는 욕망은 앞으로도 반복될 거라는 듯이 말이다. 맹진사의 선택은 시대착오적이지만 사실은 솔직하다. 딸의 혼인을 통한 신분상승, 그마저도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처럼 시대착오적 욕망을 감히 꿈꿨다는 것이 문제긴 하나, 신분 상승에의 욕망 그 자체는 어찌 죄겠는가? 포그머신으로 만들어진 자욱한 안개는 회한과 절망의 담배연기이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가장 좋아하던 시 중 하나가 떠올랐다. 허무와 좌절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음에 생기는 마음이기 때문에, 인생은 고단하다. 1940년대에도, 2022년에도, 그리고 아마도 다가올 내년과 내후년, 어쩌면 인류 종말의 순간마저도. 얄궂은 희망은 인간을 괴롭힌다. 맹하게 한다.

거인에게는 집이 한 채 있네 /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 (…) 그러나 아무리 몸을 접어도 발가락 하나 들여놓을 수 없는 집 / 눈물 한 방울 땀 한 방울에도 허물어지는 집 / 거인이라고 해서 마음까지 거대한 것은 아니어서 / 거인에게도 언덕은 언덕이어서 / 눈앞의 하루를 오르고 또 오르며 작은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스스로를 한없이 원망해야만 한다네

- 안희연, 「거인의 작은 집」 중

<맹>의 공연 사진이다. 노란색 포그 사이로 맹진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웃는 표정으로 두 손을 주먹 쥐어 어깨 높이 정도에서 앞으로 뻗고 있다.

*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공연예술인으로서 글과 공연으로 애도하겠습니다.

[사진 제공: 극단 코너스톤 ©박태양]

극단 코너스톤 <맹>
  • 일자 2022.10.20 ~ 10.30
  • 장소 예술공간 혜화
  • 원작 오영진 「맹진사댁 경사」 각색·연출 이철희 출연 김은석, 곽성은, 고병택, 최나라, 오우철, 윤슬기, 정홍구 무대 남경식 조명 신동선 음악감독 나실인 작창 장서윤 안무 이경구 그래픽사진 박태양 조연출 김서현 기획 구선정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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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김지수
음악과 연극이 마주치는 순간을 보고 듣는 사람. 국립국악원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국립극장에서 (잠시) 노동하는 중이다. 요즘은 마을공동체 농부리더학교에 다니며 상추와 토마토를 심고 페퍼민트와 봉선화를 가꾼다. 국립극장 제2회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rlawltn9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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