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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군가 그러기로 했다?

극단 파수꾼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김은한

제226호

2022.11.24

분명 무언가가 바뀔 거라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람들의 말에 수긍하기엔 아직 오래 지속한 삶을 아직 모른다. 한때 존경하다 추해지는 사람을 보며 저기에 내가 서 있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 곧 안개가 걷히고 연극에서 곤궁을 찾지 않을 것이란 믿음. 은유는 즐거움이고 질문은 여흥이길 여전히 바라며 극장을 찾는다. 동시대 연극이란 표현을 꼼꼼히 알지 못해도 이것만은 안다. 어떤 연극은 시대와 맞물리면서 관객을 곤란하게 한다.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곤란하다. 극장에서, 극장을 나서며, 어쩐지 ‘큰일이네. 이건 또 현재야. 지금이야. 큰일이다….’라고 느끼게 하는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이하 <아이히만>)가 그러했다.

지난 몇 년간 많은 리뷰 서두에서는 필자들이 느끼는 코로나19 시대의 공연예술업계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 무엇이 연극보기, 연극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가? 공연예술계에 가까이 있을수록 점점 심란하다. (심지어 감염병 시대는 끝나지도 않았다!) 의외로 잘 가려지고 있다. 지하철에 매일 표기되는 일일확진자의 수. 이제는 거기에 다른 슬픔과 혼란이 덧대어져 있다. 연ㄹ어극이, 역사가 언제나 곤란했다고 말씀하신다면 더 체념할 기력과 애도할 여력이 없음에 안타까움을 보낸다.

<아이히만>의 공연 사진. 무대 바닥에서 뒷벽까지 나무 재질의 철로가 곡선으로 이어져 있다. 철로 중앙에 선 한나 아렌트와 철로 왼편에 선 아이히만이 마주 보고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선로의 옆으로 일부 끊어진 듯하지만 분명 선로의 형태를 유지한 철로가 하나 더 보인다.

<아이히만>은 극단 파수꾼의 2022년 신작이다. 작품을 보러 가기 전에 극단 파수꾼의 이전 작품 <괴벨스 극장>을 떠올렸다. 다만 <괴벨스 극장>은 좀 더 내밀한 한국 연극계를 살피려는 익살이 있었고 어쩐지 그런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느꼈었다.

<아이히만>은 이탈리아의 극작가 스테파노 마시니가 쓴 작품으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토대로 취재를 통해 만들었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나치 SS 중령으로 홀로코스트를 가능케 한 실무자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는 만나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와 아돌프 아이히만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인터뷰 형식의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이다. 왜 대화로 바꾸었을까? 실제로 만났을 때 일어나는 폭발, 어쩌면 아무런 충돌 없이 자신의 말만을 되풀이하는 섬뜩함도 전해지리라.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있다고 믿은 걸까? 덕분에 이 인터뷰 형식의 연극은 일종의 대결에 가깝다. 악의 시작을 알고자 하는 치열한 문답이자 책임을 단호히 거부하는 닫힌 문이다.

무대는 중앙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두고 아이히만과 아렌트, 각자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 또한, 연극을 보며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아이히만 쪽으로도 뻗어있는 선로는 부서져 있다. 아이히만의 공간에는 짐 무더기가 놓여있는데 이것은 그의 도피의 흔적 혹은 희생된 이들의 남겨진 짐 같다. 아렌트의 공간에는 타자기와 곰인형이 놓인 책상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자그맣게 보이는 신문기사. 나치의 대량학살에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비폭력 저항 그룹 백장미단의 사진이다. 끔찍한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의 용기는 존엄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거대 권력이 주는 절망감을 더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나아가는 듯하다가도 결국은 작은 단위의 변화, 입김을 불면 쉽게 날아가는 변화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맥이 빠지곤 하니까. 철로에 깔린 자갈은 잘 만들어진 무대 이상으로 배우들의 보행을 조금씩 방해하면서 대화에 균열을 발생시킨다. 이따금 미끄러지는 그들의 걸음은 대화의 어그러짐, 유격을 연상케 한다.

<아이히만>의 공연 사진. 한나 아렌트 역의 차유경 배우가 의자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다. 그녀는 짧은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촘촘한 격자무늬로 된 회색 톤의 자켓과 치마를 입었다.

이야기는 명확하고 그래서 쉽지 않았다. 연극 초반에 소련의 이야기가 나온다. 스탈린이 많은 사람을 유배 보내는데 군인들은 그들을 버려두고 죽을 때까지 바라보기만 한다. 악이란 무엇인가? 비극을 다른 비극에 빗댈 수는 없다. 사회적인 참사가 이어지고 공연예술계에서 갑작스레 많은 것이 변화하는 시기이다. 이런 혼란한 시절이라 그런지 더욱 곤란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두 배우의 강력한 힘으로 일어난 인물은 종종 설득력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특히 아이히만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강력해진다. 뜨겁게 자신은 그저 숫자를 다루는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격렬하게 자신은 차악이었음을. 아니 그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음을 외친다. 이 태도는 고통을 준다. 그걸 믿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강한 믿음은 어떤 설득력을 입게 된다. 또한 아렌트의 뜨거움은 종종 그 개인을 넘어 희생자 전체의 외침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극이 지나가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 그러기로 했을 텐데. 누군가 무언가 뉘우치는 걸 본 경험이 없는 것 같다. 누가 무얼 책임질 수 있을까? 금방 켜지는 건 자기 보신의 스위치. 어쩌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만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반성이란 혹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감각이 아닐까? 연극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는 정말 격렬하다. 일견 논쟁적이나 서로의 입장은 명백하고 언뜻 떠오르는 인간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낀다.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에 이입하며 당혹스러워할 수도 있으리라.

작 중에서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어떤 사죄의 말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경력을 쌓아 더 나은 직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한 일이다. 자신은 더 큰 결정권자에게 충성했을 뿐이다. 또한, 어차피 일어날 일을 조금 늦추거나 축소했기에 결과적으로 잘 해냈다고 강하게 믿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이제 안다. 누구도 정말 사죄의 말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는 걸. 시스템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그저 성실히 망가질 뿐이다. 새삼스럽게 대화의 형태로 전해지는 건 체념의 감각이 아니다. 지금의 노력이 자연스럽게 악으로 수렴되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는 마냥 다른 곳이 아니다. 우리는 곤궁한 상황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다른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함정 이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단 말인가. 선택지는 의심스럽다. 투쟁은 희생을 불러온다. 그럼 멈출 것인가? 그럴 수도 없으리라.

<아이히만>의 공연 사진. 아이히만 역의 김수현 배우가 갓등 아래에서 서류 뭉치를 보고 있다. 그는 검은 티셔츠에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쳤다.

연극 말미에 아렌트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다. 어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무지개의 끝과 끝을 발견하는 것처럼. 시작이 있는 게 아니다. 어둠은 한꺼번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바라봤을 때는 멈출 수 없다. 아이히만은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한다. 신이 말한다. 악의 도시에 단 10명이라도 의인이 있다면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아이히만은 말한다. 그 10명의 의인도 결국, 나처럼 될 거라고. 자신 빛을 내지 못한다면 모두 어두워질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빛을 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악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거기에 대항하는 마음에는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뿐.

작품에 너무 지나치게 얽히는 것도 곤란할 텐데 산뜻하게 극장을 나설 수 없었다. 극장은 정말 삶은 아니니까. 현실에서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스템을 궁리할 수 있다. 자칫 무력한 어둠에 잠길뻔했다. 이것이 어떤 초상일 수 있다고 넘어가기는 너무도 쉽다. ‘악의 평범성’을 생각하며 고민해보기로 마음먹는 건 너무도 쉽다. 그래서 더욱 곤란한 작품이었다.

<아이히만>의 공연 사진. 한나 아렌트가 바닥에서 약 50센치미터 띄워진 계단 위에 서서 서류 뭉치를 허공에 흩뿌리고 있다. 서 있는 발판은 세트의 철로 일부이다.

[사진 제공: 극단 파수꾼]

극단 파수꾼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 하는 곳에서>
  • 일자 2022.10.28 ~ 11.13
  • 장소 소극장 산울림
  • 스테파노 마시니 번역·드라마터그 황승경 연출 이은준 출연 차유경, 김수현 조연출 박희민 무대감독 김혁민 무대디자인 박은혜 조명디자인 신동선 소품디자인 김가빈 영상디자인 김성하 홍보디자인 김정훈 음악디자인 박민수 의상디자인 홍수민 분장디자인 배윤정 오퍼레이터 홍명환, 이현직 기획 이상숙 진행 김병건 주최·주관·제작 극단 파수꾼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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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3년 남은 계획

8~9월 스튜디오 나나다시와 <스탠드업 씨어터> 진행 중
10월 신작 구상 중
12월 지금 아카이브와 코미디 캠프를 궁리 중

정보/문의 인스타그램 @mammothmer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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