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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의자들을 향한 기도

전화벨이 울린다 <사월의 사원>

김민조

제229호

2023.01.26

이번 호 [리뷰]에 게재된 글은 ‘2023년 웹진 연극in [리뷰] 코너 필자 공모’의 선정작입니다. 공모에 선정된 필자는 2023년 한 해 동안 [리뷰] 코너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희미한 빛을 머금은 채 무대에 놓여 있는 빈 의자. 오랫동안 연극에서 그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신체를 향해 비워진 사물로, 부재하는 현존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쓰였다. 비어 있기에 잠재성으로 충만한 빈 의자는 연극 혹은 극장 자체의 미니어처에 대응하는 오브제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 연극에서 빈 의자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완고하게 표상하는 이미지로 변용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예술적인 고려에 의해 무대의 어떤 지점에 배치된 의자가 아니라 관객의 시선에 되돌려진 무대 건너편의 의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객석(auditorium)이라는 집합명사에 포섭되어 온 일련의 빈 의자들. 혹은 착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응시하기 위해 그 의자들을 마주보게 되는 관객의 경험에 대해.
2020년 객석 띄어앉기가 시작되면서 관객들은 빈 좌석을 곁에 두고 앉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엔데믹 국면으로 접어들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대부분 해제되고 있는 지금, 다시 의자 하나만큼의 공동(空洞)을 메우고 극장 본연의 밀접성을 수복하면 되는 것일까. 인간이 점유할 수 없는 자리들의 배열과 거기에 물질적으로 틈입한 빈 공간들의 현존을 ‘통하여’ 연극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예약된 좌석으로 돌아올 존재들을 향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 착석할 수 없었던 존재들을 향해 더듬거리며 가지를 뻗어갔던 구체적인 실천들 속에서 감지될 것이다. 아동, 신경다양인, 동물의 관점을 경유하여 극장 규범이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금지와 배제를 급진적으로 비판한 <극장종말론> 프로젝트1)가 시사하듯이 빈 의자들은 이제 극장에 없는 존재들을 향해 열린 상징적인 틈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서 객석 쪽을 바라보는 시점의 배치로, 희미한 붉은 조명이 들어와 있다. 무대 바닥에는 붉은 계열의 아라베스크 문양 카펫이 깔려 있고, 2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소파에는 화려한 꽃무늬 패턴의 손뜨개 커버를 씌운 쿠션 두 개가 놓여 있으며, 마찬가지로 꽃무늬가 들어간 방석이 놓여 있다. 소파 앞쪽에 뜨개질 감이 놓인 바구니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 뒤쪽으로 이 무대의 배경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빈 객석이 보인다. 1층 객석은 총 342석으로, A, B, C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가 제작한 <사월의 사원>은 관객으로 하여금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빈 객석을 마주 보게 하는 연극이다. 현존하는 관객과 부재하는 관객이 마주 보는 사이에는 일종의 대안가족을 꿈꾸는 영혜의 공간이 있다. 공연 소개글에 따르면 연극은 영혜가 함께 거주할 사람들을 ‘줍고’ ‘뜨개질하는’ 이야기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펫 한 장과 소파를 제외하면 집을 표상할 만한 어떤 배경 도구도 존재하지 않는 이 연극은 성격과 취향이 다른 거주자들이 아웅다웅하며 공동체를 이뤄가는 전형적인 대안가족 서사로 쉬이 닫히지 않는다. 대신 연극을 관류하는 이미지는 무대 너머로 보이는 공허한 의자들, 객석의 열과 횡 사이에서 뱃머리가 부딪히듯 마주치는 인물들, 그리고 캐리어 한 대를 끌고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 메싸의 고독한 뒷모습이다. 어째서인가. 왜 이 연극은 관객에게 대안가족의 관계성을 제안하는 것처럼 영혜의 공간과 근접한 거리에 앉게 만들고, 다시 텅 빈 객석을 배경으로 하여 이산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하는가.
의자에 앉는 행위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수반한다. 가령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의 위압적인 오디토리움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2020)는 층층이 쌓인 객석의 스펙터클을 인종, 학력, 성별을 둘러싼 피라미드로 의미화한 바 있다. 그 인정투쟁의 장에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 위상에 걸맞은 자격과 지위를 획득하는 행위가 된다. 반면 <사월의 사원>에서 의자에 앉는 행위는 정주 혹은 귀환의 욕망으로 연결된다. 연극이 시작되면 메싸는 영혜의 자리가 될 소파에 앉아서 한국을 떠날 계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수린을 남겨두고 온 고향 마을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 메싸는 점차 무대/관객으로부터 멀어져 종국에는 극장 출입구가 있는 객석 꼭대기로 이동하게 된다. 영혜와 그를 둘러싼 관객의 공간이 일시적인 ‘우리’의 형성을 욕망하는 정주 지향적인 공간이라면, 메싸는 차츰 그 공간으로부터 멀어져 빈 의자들의 첨탑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카펫 위에 정사각형의 좌식 나무 상 두 개를 붙여서 다섯 명이 둘러 앉아 있다. 마주 보고 웃으며 얘기하는 두 사람과 서로 시선이 어긋난 세 사람이 있다. 반짝이는 텅 빈 상 위로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한국에 속한 인물들의 동선도 이러한 공간적인 위상차를 반영하고 있다. 영혜의 소파 주변에 모여들었던 지수, 해영, 현주, 기정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둘씩 흩어져 빈 객석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요컨대 이 연극은 현존하는 관객을 향해 다가서는 과정이 아니라 부재하는 관객을 향해 멀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서히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에서 하나둘씩 드러나는 것은 여섯 인물의 삶이 무대에 등장할 수 없는 존재들과 뒤엉켜 있다는 사실이다. 해영은 존재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환청을 듣고 환시를 본다. 현주와 기정은 유가족으로서의 상처를 애써 감춘 채 살아간다. 영혜가 동거인을 물색하는 집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다가 죽기 직전에 나타난 모친으로부터 상속받은 공간이다. 그리고 메싸는, 고향 이웃을 통해 수린으로 여겨지는 아이의 유골이 어망에 걸려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영혜의 집에 모여들었던 인물들이 지속적인 생활공동체를 이루는 결말로 귀착되지 못했다고 해서 대안가족 서사가 단지 실패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기치 않게도 영혜의 기획은 서로를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을 듯한 인물들이 ‘무사하지 못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해영과 현주가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마주치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대안가족 되기에 실패한 이들에게도 연결의 끈은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서로가 타인에게 납득 가능한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상실의 여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영과 현주는 공동체의 구심력을 이탈한 영외의 궤도를 공전하는 중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무사와 안녕을 빌어준다.

카펫 위에 놓인 좌식 상 위에 앉아 있는 한 사람과 뒤쪽에서 그를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좌식 상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으며, 양옆으로는 나무 의자 두 개가 엎어져 있다. 이밖에 쿠션과 뜨개질 털실 등이 바닥 여기저기 놓여 있다.

<사월의 사원>이 소묘하는 존재의 지도는 이연주 연출이 집필했던 <유니버셜 스튜디오>(2021)의 포스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집, 공동체, (재)가족화라는 텅 빈 중심을 공유하는 동심원들의 형상과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궤도를 오롯이 운항하고 있는 단독자들. 그러나 <사월의 사원>은 우리 모두가 이산자의 운명에 놓여 있다는 냉정한 진실에 안착하는 대신 그 이후에 도래하는 교신의 순간들을 향해 나아간다. 연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메싸를 만나기 위해 캄보디아로 떠난 지수는 한국에 있는 영혜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리 내어 읽는다. 지수가 멀리 보이는 빈 객석들 사이에 앉아 이쪽을 내다보며 잠시간 동거했던 이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은, 그의 전언이 이 자리에 함께 모여앉을 수 없는 존재들의 영역을 가로질러 현존하는 이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언의 주파수, 비동시적인 교신과 때늦게 도착하는 선의들, 함께 살던 자리를 되돌아볼 때 비로소 희미한 빛을 쏘아 보내는 어떤 공존의 윤리. 시차를 두고 송수신이 이루어지는 우주적 교신의 이미지를 경유하여 <사월의 사원>은 ‘지금 곁에 없는’ 이들의 안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부재중인 이들을 위한 기도는 연극의 종장에서 메싸가 가장 높은 탑에 안치된 아이의 유골을 애도하는 장면으로 수렴된다. 극장문 옆에서 수행되는 애도의 의례는 연극을 끝낸 우리가 누구를 향해 ‘나가야’ 하는지를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관객은 수린이 어떤 아이였는지, 탑에 안치된 유골이 정말 수린의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빈 의자들 사이를 걸어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암전에 잠긴 극장을 천천히 저어가는 뱃소리는 관객들에게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우리는 연극을 가로질러, 우리가 모르는 존재들을 위한 사원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라고.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객석을 배경으로 희미한 빛을 받은 여성 배우가 서 있다. 검은색 가디건을 입은 배우는 두 손을 모으고 먼 곳을 응시한다. 그 옆에 스틸 재질의 커다란 캐리어가 놓여 있으며, 캐리어 손잡이에는 물건이 가득 담긴 하얀색 비닐봉지 두 개가 묵여 있다. 문자통역이 영사되는 스크린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떠 있다. “절에 데려다 놨어. 마을 초입에 있는 곳, 가장 높은 탑에”.

[사진 제공: 박태준]

전화벨이 울린다 <사월의 사원>
  • 일자 2022.11.30 ~ 12.11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 배해률 연출 이연주 출연나경호, 라소영, 박수진, 우미화, 이세영, 조연희 무대남경식 조명신동선 사운드목소 의상 김우성 분장·소품장경숙 무대감독서지훈 음향감독남영모 영상기술 윤민철 그래픽디자인황가림 접근성매니저권지현 수어자문이재란 수어통역 박훈빈, 김도희 음성해설서수연, 구태훈 자막제작·오퍼레이터이효진 조연출김신혜 기획·진행 박서우 프로듀서조하나 협력프로듀서이유진 제작전화벨이 울린다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메세나협회 지원 벽산문화재단 공동기획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 관련정보 http://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858
  1. 제너럴쿤스트 <극장종말론>, (generalkunst.com/aeot),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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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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