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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셔 고양이처럼

국립극단 <앨리스 인 베드>

팔도

제229호

2023.01.26

이번 호 [리뷰]에 게재된 글은 ‘2023년 웹진 연극in [리뷰] 코너 필자 공모’의 선정작입니다. 공모에 선정된 필자는 2023년 한 해 동안 [리뷰] 코너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국립극단의 <앨리스 인 베드>는 수전 손택이 19세기의 실존 인물인 앨리스 제임스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참조점 삼아 집필한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것이다. 극은 질병으로 오랜 기간 침대에서 살아가던 앨리스가 상상 속에서 아버지와 오빠, 역사와 예술 작품 속 여성들을 만나고 로마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현실에서 젊은 남자 도둑인 토미톰과 맞닥뜨리게 되는 서사를 펼쳐 보인다.
독특하게도 연극에는 총 여섯 명의 앨리스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때때로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마가렛, 에밀리, 쿤드리, 미르타, 토미톰, 토끼, 간호사로 변하기도 한다. 극의 결말에 마침내 관객 앞에 남는 앨리스들은 두 배우, 성수연과 김광덕이다.
연출가의 각색이 빛을 발하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이 결말, 즉 두 명의 앨리스가 무대에 남아 마주 보는 장면일 것이다. 회복은 단지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는 간호사였던 배우는 이제 나이 든 앨리스로서 말하고, 여태 공상하던 앨리스는 잠자코 나이 든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장면. 이때까지 여섯 명의 앨리스들은 무대 위에 함께 등장하더라도 서로를 의식하거나 시선을 교환하지 않았다. 결말에 나타나는 도둑 토미톰이 암시하는 ‘완전한 타인’, ‘실존’, ‘사랑’1)의 침입만큼이나 - 혹은 그것보다도 더 - 강렬한 접촉은, 마침내 교환되는 앨리스들의 시선에 있다.
간호사는 사실상 토미톰과 더불어 유일하게 앨리스의 ‘현실’에 발붙이고 존재하는 인물이다. 앨리스에게 그녀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읊는 오빠 해리,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못 박던 아버지를 떠올려보자. 이들은 앨리스에 의해 소환되었으나 기껏해야 “여자의 임무”2)란 “남자가 까치발로 왔건, 방문차 왔건, 위로차 왔건” 그를 위로하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탁월한 지성을 갖췄고, 풍족하게 자란 앨리스가 자살과 죽음을 말하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관심과 연민만을 보탤 뿐이다.

바퀴 달린 침대에 앉은 앨리스가 손거울을 들고 자기 모습을 보면서 입을 크게 벌려 놀라고 있다. 그 옆에 앉은 간호사는 긴 칼을 어깨에 기대 들고 앨리스를 보며 웃고 있다. 침대 뒤쪽으로는 또 다른 간호사가 약병과 비상벨, 쿠션 등을 실은 카트를 밀고 나가는 중이다. 앨리스는 푸른색 점프수트와 푸른색 상의를 입었으며, 간호사들은 같은 계열의 푸른색 롱코트를 입고 있다.

반면 간호사와 토미톰은 앨리스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녀의 삶에 비집고 들어오는 타자들이다. 이들 중 토미톰은 앨리스와 가장 선명하고 어설프게 대립한다. 토미톰은 앨리스의 독백에 등장했던 손가락 다친 소년처럼 한 손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앨리스의 상상 속에서 동정하던 어린 소년과도, 그녀가 아는 가부장적인 상류층 남성과도 다르다. 그는 심지어 절도에 능숙하지도 못하다. 토미톰은 앨리스와 전혀 다른 현실에서 온 청년으로서, 아프고 부유한 여자에 대한 경멸, 호기심, 부러움, 동정이 뒤죽박죽 섞인 태도를 좀처럼 숨기지 못한다. 거리낌 없이 물건을 내주고 질문을 쏟아내는 앨리스 또한 ‘피해자’ 답지 않아 토미톰을 혼란스럽게 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비전형성, 어설픔, 차이에서 오는 혼란이야말로 두 사람이 잠시나마 소통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한편 간호사는 앨리스를 관리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직업인이다. 그녀는 해리나 아버지, 토미톰만큼도 앨리스를 가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앨리스를 향한 간호사의 무관심, 혹은 피로 섞인 적의는 두 여자 사이에 놓인 복잡 미묘한 차이에 대해 곱씹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간호사 역을 맡은 배우들이 앨리스와 함께 아버지를 둘러싸고 깔깔 웃곤 흉기로 그를 가격할 듯이 움직이는 시퀀스 또한 원작에 없는 독특한 연출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앨리스와 나란히 서서 폭력성과 광기를 표출하다가 티파티에서는 거짓말처럼 또 다른 배역을 수행하는 간호사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나이 든 앨리스가 되어 젊은 남자 도둑을 대면하게 만드는 연출은, 간호사가 앨리스처럼 “여자의 임무”를 초과하고 위반하는 인간임을, 그리고 같은 이유로 그녀가 앨리스와도 절대적인 차이를 지닌 타자임을 시사한다.

화면 왼쪽에는 선반 가득 책과 도자기, 접시 등 귀중품이 놓인 책꽂이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휠체어를 탄 아버지를 중심으로 앉거나 서 있는 다섯 명의 앨리스들이 보인다. 아버지는 구불구불한 컬이 들어간 노란색 긴 머리에, 높은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검은 정장 차림에 두꺼운 책을 들고 있다. 앨리스들은 푸른색의 점프수트에 푸른색 상의를 받쳐 입었으며, 앞쪽의 두 명은 두꺼운 책을 품에 안거 있거나 손에 들고 있다. 아버지를 비롯한 모두가 밝게 웃는 모습이다.

간호사와 토미톰이 앨리스와 맺는 관계에 대해 ‘서비스’와 ‘노동’의 교환이라거나 형법의 언어로 ‘타인의 사유 재물을 강탈’했다고 설명하기는 퍽 어렵지 않다. 한 명은 더없이 ‘여성’적이고 합법한 방식으로, 다른 이는 설익은 불법의 형식으로 금전적 이익을 취한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짐짓 자명해 보이는 마주침에서조차 예측하지 못한 ‘정동적 잉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3)이 새삼스러운 진실은 간호사와 토미톰, 앨리스 세 인물의 관계성을 낯설게 다시 감각할 때 비로소 포착된다.
그런데 앨리스와 간호사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만날 때 발생하는 정동적 잉여는, 앨리스와 토미톰 사이에서 감지되는 낯선 긴장감과 흥분보다는 덜 인상적이며 덜 중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들의 일상이 아름답거나 독특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호사는 토미톰과 달리, 앨리스가 무대 천장에 달린 매트리스처럼 무거운 생을 지나가는 과정을 기껍지 않더라도 목격하고 동행한다. 아마 앨리스 제임스가 44세에 유방암으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면회, 절도, 티파티 같은 ‘사건’이 아닌 형태로 그녀를 매일 마주한 이는 다름 아닌 간호사였을 테다. “침묵과 성마른 불안의 순간으로 가득”한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공허함 너머에, 뭔가 다른 것”4)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밑바닥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자 그 밑바닥을 쓸고 닦아줘야 하는 일”인 바로 이 끔찍한 돌봄5) 의 시간에도 스며들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앨리스, 그리고 그의 침실에 들어온 젊은 도둑 토미톰이 마주 보고 있다. 어둡고 푸른 조명 속에, 문자통역이 영사되는 스크린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떠 있다. “왜 소리 안 질러요”, “겁먹지 않았나 봐요.” “도와달라고 소리쳐요”.

누군가의 절대적인 타자성과 유일성을 다시금 “미묘하고 날카롭고 결코 잊을 수 없이 의식한다는 것”이 사랑이라면,6) <앨리스 인 베드>의 결말에서 사랑이라는 사건은 기실 두 번 일어났다. 숨길 수 없이, 앨리스와 토미톰의 사이에서. 그러나 보다 미묘하게는 간호사이자 앨리스인 여자와 앨리스 사이에서. 토미톰이 머뭇대다 떠난 자리에 두 여자가 오롯이 남아있던 무대를 떠올린다. 그리고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하얀 조명 아래에서 명멸하는 사랑의 흔적은 분명,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닮았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가르쳐 달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질문에 체셔 고양이는 답한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렸고 계속 걷다 보면 어디든 틀림없이 닿아 도착하게 되어 있다고. 7) 수수께끼 같던 미소가 사라진 장소로부터 출발해 어디로 가볼까. 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처럼 - 그리고 연극처럼 - 일시적인 것이더라도, 아프고 미친 여자들이 “어디든 닿”아 “틀림없이 도착”할 세계로 감히 걸어본다.

침대에 누워 아편을 하고 있는 앨리스, 그리고 그가 불러낸 마가렛과 에밀리, 토끼가 보인다. 에밀리는 앨리스와 마주 보고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앉아 있으며, 마가렛과 토끼가 침대의 양 끝 난간을 잡고 있다. 무대에는 뿌연 안개가 채워져 있으며, 배경의 커튼이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빛나고 있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앨리스 인 배드>
  • 일자 2022.08.24 ~ 09.18
  • 장소 명동예술극장
  • 수전손택 Susan Sontag 윤색·연출이연주 드라마투르기김슬기 무대남경식 조명신동선 의상김우성 분장·소품장경숙 사운드목소 영상강수연 안무금배섭 조연출심지후, 김태령 출연권은혜, 김광덕, 김시영, 성수연, 신사랑, 이리, 황순미 음성해설공인수어통번역 잘함_유주현(대본), 박하늘(내레이션) 한국수어통역공인수어통번역 잘함_김홍남, 조유나, 허윤영 한글자막이효진 접근성매니저김태령
  • 관련정보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7081
  1. 김선형, “[국립극단] 8개의 키워드로 읽는 <앨리스 인 베드>와 수전 손택”, 국립극단 블로그, 2022. 8. 26, https://m.blog.naver.com/ntck1234/222858688514.
    김선형은 극이 ‘다른 세계에서 온 도둑’ 즉 토미톰과의 ‘짧지만 현실적인 만남으로 귀결’된다며 ‘사랑/실존’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2. 수전 손택,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이후출판사, 2007, 배정희 옮김, 59쪽.
  3. Jose Esteban Munoz, Cruising Utopia,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9, pp.14-15. 국문 번역은 진송, “[한글번역] <유토피아를 크루징하기Crusing Utopia> 서문 일부 번역”, 네이버 블로그, 2022. 8. 7, https://blog.naver.com/zinsongzin/222842065973 참조.
  4. Jose Esteban Munoz, 위의 글.
  5. 연혜원, 「능력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의 대안은?」, 『일다』, 2022. 6. 21, https://www.ildaro.com/9375.
  6. 김선형, 위의 글, 손택의 문장 재인용.
  7. Lewis Carrol, Alice’s Adventure in Wonderland, VolumeOne Publishing, 1998,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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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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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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