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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다

연극집단 반 <미궁(迷宮)의 설계자>

진송

제230호

2023.02.23

연극이 시작될 때, 그곳에는 건물이 없다.
그러나 연극이 끝날 때, 그곳에는 건물이 있다.
연극이 시작될 때 무대는 눈이 오는 한겨울의 평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세 사람이 유사한 공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75년의 건축가 양신호, 1986년의 대학생 송경수, 2020년의 다큐멘터리 감독 권나은이 모두 스크린을 통해 눈이 오는 것처럼 연출된 평평한 무대 위에 시간의 엇갈림으로 인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채 서 있다. 이때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다른 건축물도 아닌 오로지 눈(雪), 눈뿐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관객이 연극의 시작과 함께 정말로 눈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밝은 무대를 더 밝게 비추며 내리는 하얀 빛무리는 조명도 다른 무엇도 아닌, 분명한 눈(雪)이었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남영동 대공분실과 그곳에서 발생한 고문을 다룬 작품이다. 〈미궁의 설계자〉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 양신호의 시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고문을 당한 송경수의 시간,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하는 권나은의 시간을 겹쳐 둔 채로 진실을 좇아간다. 진실을 좇아가는 경로는 ‘피해자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설사 윤미숙의 말에 따라 아래에서부터 위로 서서히 박종철이 죽었던, 그리고 극중 송경수가 고문을 당했던 509호실로 가까워지는 식이다.

<미궁의 설계자> 공연 사진. 무대 가운데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 책상 앞에 한 배우가 앉아 있다. 의자 뒤와 책상 앞에 서 있는 두 배우가 그를 압박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의 공간에 붉은색 직사각형 조명이 들어와 있고 사방이 어둑한 가운데, 무대 벽면을 건물의 설계도면 세 장이 가득 채우고 있다.

세 가지 동떨어진 시간대에 겹쳐진 채, 시간을 가로질러 하나의 공간을 쌓아 나가며 세 사람이 보여주려 하는 혹은 찾아내려 하는 진실은 결국 다음의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건축가는 고문을 의도하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했는가? (그렇기에 죄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고문과는 관련 없는 미학적인 의도로 건축물의 세부 사항을 결정하는 양신호와 자신이 만들 건물이 고문용으로 쓰일 것을 알면서도 갈등 끝에 설계에 참여하는 양신호의 모습, 그리고 양신호가 만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송경수가 어떤 고통을 체험하는지를 모조리 보여주며 〈미궁의 설계자〉는 진실의 경로를 따라가는 윤미숙과 권나은의 입을 빌려 위의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한다.
확실히 ‘건축가는 고문을 의도하고 건물을 건축했는가?’라는 질문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해당하는 상황 속에서만큼은 하나의 답을 내놓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사람이 뛰어내려 자살할 수 없게끔 폭이 사람 머리 지름을 넘지 않도록 만들어진 창문, 눈을 가린 채 꼭대기 층의 고문실로 연행되는 사람들을 어지러움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나선형 계단 등 고문을 의도했다고 의심되는 건축적 특징들을 보이지만, 이러한 건축적 특징들은 양신호의 스승인 건축가 김 선생의 다른 모든 건축물에서도 공통으로 드러난다. 윤미숙이 고문을 의도한 설계라고 본 것을 ‘건축가의 미학적 개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권나은에게, 윤미숙은 ‘피해자들의 증언이 (나와 같이) 말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미궁의 설계자> 공연 사진. 무대 위에 세 배우가 있다. 오른쪽에 있는 배우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자세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왼쪽 뒤편에 있는 다른 두 배우들은 각각 손에 나선형 계단 구조의 모형과 큰 도면을 펼쳐 들고 있다.

윤미숙에게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지각은 피해자들의 증언 속에 드러난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지각과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고문실의 붉은 타일을 고문 피해자들이 ‘핏빛과 같은 붉은색’이라고 증언할 때, 윤미숙은 고문실의 붉은 타일을 핏빛과 같은 붉은색으로 지각한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라 건축을 지각하는, 건축에 대한 지각을 완성해나가는 윤미숙을 보고 있노라면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이 있다. 타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평평한 무대 위 존재하지 않는 건물을 지각하기. 그것이 바로 〈미궁의 설계자〉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아니 〈미궁의 설계자〉를 보며 관객이 해낼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권나은은 해설사 윤미숙에게 다큐멘터리 제작에 도움이 될 객관적인 ‘사실’, 즉 ‘핏빛’과 같은 수식어구가 붙지 않은 ‘붉은색’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권나은 역시 연극 속의 인물인 한, 사실과는 무관한 연극적 진술들에 힘입어서야 무대 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요구하는 인물로 비로소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양신호의 지각, 송경수의 지각, 윤미숙의 지각, 권나은의 지각, 그리고 그 지각들에 대한 증언에 힘입어 관객은 1975년부터 2020년까지의 시간을 가로질러 무대 위에 낯설게 어루만져지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각하게 된다. 연극이 시작될 때, 그곳에는 건물이 없다. 그러나 연극이 끝날 때, 그곳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관객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홀로 남은 권나은과 함께 좁은 욕조에 웅크려 앉은 양신호의 창백한 몸과 핏빛 509호실을 정말로 본다.

<미궁의 설계자> 공연 사진. 어두운 푸른색 조명 속에, 복면이 씌워진 채 반쯤 주저앉아 있는 한 배우를 두 배우가 붙잡고 있다. 뒤쪽에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선글라스를 쓴 한 배우가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오른편 앞쪽으로 반쯤 어둠에 가려진 채 이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배우가 있는데, 그 손에 들린 액정 화면이 어둠 속에 빛난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건축적 지각’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건축물은 시각적으로 한눈에 장악하고 몰입이 가능한 회화와 달리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거닐거나 헤맴으로써 그에 대한 지각을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건축에 대한 지각은 ‘정신분산’적이며, ‘촉각적’이고,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한 한 가지 형태로 집약되지도 않는다.
벤야민의 ‘건축적 지각’이라는 개념에 따라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적 지각의 형태로 쌓아 올렸다고 해도 좋을 〈미궁의 설계자〉는 한 가지로 집약될 수 없고, 오히려 분열하며,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핏빛 착란을 일으키고 온 건물에 산재해 있는 고문 피해자들의 감각을 능히 건축물을 쌓아 올릴 수 있는 것으로서 복원한다.
윤미숙과 권나은이 골몰했던 ‘건축가는 고문을 의도하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했는가?’라는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궁의 설계자〉가 가정한 내용에 의거하는 하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설계와 건축이 낳은 (건축가를 포함한 모두의) 고통은 그러한 질문을 애써 외면하고 그 질문의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야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던 것에 애써 대답하기보다 비어있는 질문의 자리에 분열하는, 착란을 일으키는, 정신을 분산시키며 건축하는 지각들이 자기 자신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을 감각하고 싶다.
연극이 막을 내린 지 한참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남영동 대공분실이 그곳에 있다.

<미궁의 설계자> 공연 사진.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 손을 뒤로 짚은 배우의 뒷모습이 보인다. 일렬로 선 다섯 명의 배우가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어깨를 꼿꼿이 편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대에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초록색 조명이 들어와 있으며, 바닥에는 두 군데, 주황색 빛이 일직선으로 새어 들어온다. 무대 뒷벽에 반쯤 잘린 작은 창문이 보인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유경오]

연극집단 반 <미궁(迷宮)의 설계자>
  • 일자 2023.2.17 ~ 2.26
  •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작가 김민정 연출 안경모 출연 전국향, 손성호, 이종무, 이가을, 김시유, 최지환, 송현섭, 송지나, 유지훈, 박양지, 전민재 드라마투르기 이은기 음악 윤현종 안무 이경은 무대 도현진 조명 김영빈 영상 김장연 의상 오수현 분장 이지연 사진 김명집 조연출 박현지 무대감독 서지훈 영상오퍼 윤지선 조명오퍼 안유승 홍보디자인 지나다 기획 김진영 프로듀서 김지은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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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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