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히 기다리기
음이온(ummeeeonn) <연극 안 하기 1 - 단단히 경고하기>
팔도
제230호
2023.02.23
불법촬영물 등 식별 및 게재제한 조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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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인 님이 들어왔습니다.
시무룩한 튜브 님이 들어왔습니다.
째려보는 어피치 님이 들어왔습니다.
. 님이 들어왔습니다.
- 전혜인
- 본 공연은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전혜인
- 오픈채팅에 없으시다면 카카오톡에 단단히 경고하기 검색하여 접속해주세요.
- 전혜인
- 공연 중 사진촬영만 가능합니다. (플래시X) 사진은 오픈 채팅방에 공유해주세요. 핸드폰은 진동으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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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방 화면의 1이 지워지기를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솔베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극단 음이온의 <연극 안 하기 1 - 단단히 경고하기>(이하 <경고하기>)의 전혜인은 페르2)를, ‘성실하고 재미없게 기다린 여자’ 솔베이를 떠올리면서, 송파구의 한 발레 스튜디오에서 배운 대로 ‘솔베이의 노래’에 맞춰 춤춘다.
헨릭 입센의 레제 드라마 <페르 귄트>의 주인공 페르는 음이온 다단계 상품과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어 귀향한 전혜인의 삼촌과 닮았다. 페르는 고향에 돌아와서 결국 솔베이의 품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그게 <페르 귄트>의 마지막 장면이고 솔베이의 기다림의 결말이라고 한다. <경고하기>의 막바지에서는 김상훈이 전혜인 앞에 드러누워 죽은 연기를 한다. 전강채는 김상훈의 사진을 찍어 채팅방에 업로드한다.
발화되는 대사가 전무한 와중에 계속 뭔갈 쓰고 찍고 공유하기. 이것이 음이온이 생각하는 ‘연극 안 하기’인 것일까? 전강채는 ‘성실하고 재미없게’ 계속 전혜인을 찍고 바닥에 떨어진 보드 지우개, 조명 같은 무대 위 소품들3)까지도 렌즈에 담아 채팅방에 공유한다. 이에 동화되는 관객도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온갖 각도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공연 기록 스태프가 따로 필요 없을 지경이다. 그렇게 모두가 이 ‘가상공간’, 오픈 채팅방-극장을 짓게 된다.
물론 전혜인은 ‘연극 안 하기’라는 제목이 단지 연극을 보러 오게 만들려는 거짓말이었다고 화이트보드에 슥슥 쓴다. 하지만 나도 기다린다. ‘연극 안 하기’를 선언한 이 연극이 ‘거품’ 다 빠져서 돌아온 페르처럼 여기 도착해서 죽기 전에 뭐라도 보여주기를. 그때마다 휘갈겨지는 글은 대강 이렇다. ‘음이온에 투자하라!’ ‘음이온은 본질만을 찾는다’.
연극의 본질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라지만 <경고하기>는 재빨리 이를 거부한다. 연극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 ‘말뿐인 연극은 하지 않는다’고. 여기서 ‘말뿐인’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1. 음성화된 대사로서 ‘말뿐인’ 연극은 하지 않는다, 2. 비유적 표현으로서, 즉 지연되고 허황된 약속을 의미하는 ‘말’뿐인 연극은 하지 않겠다. 이런 말장난, 아니 정확히는 글 장난이 70분간 이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음이온은 오로지 1. 그것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2. 결국에는 배신하고 골탕 먹이고 과장하기 위해 ‘본질’을 운운하는 것만 같다. 뭐든 기록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처럼 오픈 채팅방에 관객들을 연루시키는 점만 해도 그렇다. 관객들은 어느새 전강채를 따라 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무대 맨 뒤편 의자에 내내 심드렁하게 앉은 김상훈을 모방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오픈 채팅방은 ‘본질’을 파편화해 재생산하는 가상 극장이며 이렇게 다시 이중화되는 <경고하기>는 연극에 대한 패러디요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들에 해시태그를 붙여가며 집착하고 마는 아카이브 열병의 패러디인 것일까? 음이온은 공연 리플렛에 다음과 같이 쓴다: “공연 중 생산되는 사진들을 @ummeeeonn 태그/해시태그하여 SNS에 올려주세요. 추천 해시태그: #연극맛집 #감성연극 #추천연극 #데이트연극 #감동연극 #본질.”
이런 장난은 ‘저희 정말 과대평가 받고 싶어요’, ‘이 연극은 사실 포트폴리오 만들기’, ‘이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닙니다’라고 화이트보드에 쓰이곤 곧바로 지워지는 ‘거짓말’들―아리스토텔레스의 강령에 의하면 연극은 또한 거짓말이(어야 한)다―과 한없이 가볍게 불어난다. 그렇게 음이온은 치고 빠진다. 얼마만큼 거짓이고 참인지 분간하기 힘든 사태에 기약 없이 관객을 남겨두고. 이쯤 되니 저 혼자 환상적인 세계 모험을 하고 와선 냅다 죽어버리는 페르야말로 연극의 본질을 꿰뚫는 은유였다고, 우리 모두 뭔지 몰라도 뭔갈 기다리고 있는 솔베이였다고, 전혜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오늘도 바보가 되는 연습’을 했다고 할 만하다.
<경고하기>가 거품처럼 가벼운 척 취하는 태도는 차라리 미래, 수익성, 거대한 연극론과 미학에 대한 수많은 경고와 명령들에 대한 대응 전략처럼 보인다. 사건이 지연되는 사이로는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모호한 존재들(배우와 동명인 극 속 ‘전혜인’과 삼촌, 솔베이, 페르, 싱크로나이즈 선수, 서연…)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만 한가득이다. 배우와 관객들은 철저한 침묵 속에서 오직 몸만 움직이며 이것들을 함께 꿰매고 짓는 시늉을 한다. 종종 실소가 터져 나올 수 있도록 헐겁고 느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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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하기>는 2월 13일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무언가를(대체 뭘?) 기다리며 오픈 채팅방에 죽치고 있었더니 메시지가 도착했다.4)
- 김상훈
- 이 연극을 미래로 보내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생산한 1806개의 사진으로 푸티지 비디오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연극을 보았다는 믿음이 드문드문 살아나기를! 그 믿음이 포트폴리오를 초과하기를! 제목은 ‘느슨히 경고받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답장한다.
- 팔도
- 우리가 함께 연극을 보았다는 믿음으로 저도 리뷰를 한 편 썼습니다. 연극in에 게재될 예정이고요. 저도 제목은 ‘느슨히 기다리기’로 하겠습니다.
- 전혜인
- 이쯤에서 충격고백. 그 리뷰는 사실 ‘느슨히 기다리기’가 아닐 겁니다. ‘포트폴리오 만들기’입니다.
- 전혜인
-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 전혜인
- ‘느슨히 기다리기’에 대한 ‘포트폴리오 만들기’니까.
[사진 제공: 음이온]
- 일자 2023.2.8 ~ 2.12
- 장소 을지공간
- 구성·연출 김상훈, 전혜인 출연 김상훈, 박이분, 전강채, 전혜인 시노그라피 박이분 기획 전강채 제작 음이온(ummeeeonn) 후원 을지공간, 필로버스
- 관련정보 https://www.instagram.com/p/CnrDL0sJwMC/
- 극단 음이온의 <연극 안 하기 1 - 단단히 경고하기>에서 사용한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의 양식 및 연극 내용 일부를 재구성함.
- 페르 귄트는 한때 부유했으나 몰락한 지주의 아들로, 집안을 다시 일으키라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늘 공상에 빠져 있다가 마왕과 결탁해 여행을 떠난다. 애인 솔베이를 두고 사라졌던 그는 온갖 모험 끝에 무일푼으로 귀향한다.
- 이 소품들은 음이온의 또 다른 ‘포트폴리오’인 <무대 떼다 팔기>에서 판매되고 있다. 음이온의 인스타그램 참조. https://www.instagram.com/ummeeeonn/
- <경고하기>에서 사용한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의 양식 및 연극 내용 일부를 재구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