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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밖으로 나온 아마추어들

제 7회 모자이크 페스티벌: 비극_디오니소스
스페이스 외디세이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

권나은

제231호

2023.03.23

연극 관객은 박스 안의 피자와도 같다. 그들은 극이 끝날 때까지 바르고 뻣뻣한 자세를 유지한다. 극장은 신전이기에, 순례자는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연극인은 순간이라는 신을 믿는다. 그는 편집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작업에 접근한다. 장면, 무대, 조명은 적확하게 쓰여야 하며, 연기, 대사, 움직임은 탁월해야 한다. 기회는 한 번뿐이므로, 아마추어로 보여서는 안 된다. 연극에서 아마추어리즘은, ‘지금, 여기’를 훼손하는 신성 모독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는 필연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우리의 감각보다 빠르며, 완벽한 재현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극인은 아마추어의 운명을 타고난다.

누군가가 연극인의 귀에 속삭인다. 당신은 지금과 여기를 파괴하고, 동료들과 틀어지게 된다고. 반발심이 생긴 그는, 예언을 물리칠 결심을 한다. 그는 아마추어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연습에 매진한다. 동료들을 채찍질하고 몰아세우며 장면에 권위를 부여한다. 공연 전날, 그는 종말을 앞둔 신도의 모습으로 변한다. 극장을 찾는 관객 역시 예언을 부정한다. 그들은 종교적인 각성을 원하므로,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피자가 된다. 극장이 자신을 집어삼키길 바라면서. 그런데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을 만든 스페이스 외디세이 멤버들은, 행성 충돌을 맞이하는 종교인처럼 굴지 않는다. 이들은 아마추어리즘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의 공연 사진. 흰 고깔 모자와 흰 망토를 입은 사람이 붉은 조명 아래 양팔을 좌우로 벌리고 무표정하게 서 있다. 그가 입은 옷은 파랑, 빨강, 노랑, 초록색이 양팔과 가슴에 T자로 나열되어 무당을 연상케 한다. 그 앞에는 검은 야구잠바를 입은 여성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들고 있다. 사진 왼편 스크린에는 ‘웅장하고 무거운 효과음’이라는 문자 해설과 T의 대사가 보인다.

출발: 파괴된 극장에서

스페이스 외디세이는 극장을 신전이 아닌 광장처럼 쓴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비로소 ‘불경해질’ 기회를 얻는다. 극장 밖 하우스에서는 맥주를 판다. 극장 안에서는 스티커, 에코백, 야구공 따위의 굿즈를 판다.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은 안내를 듣는다.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며, 연극을 보다가 지치면 한쪽 구석에 가서 쉬다 와도 된다고. 오늘날 한국에서, 관객의 휴식을 승인하는 연극은 상당히 적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이겠지만, 신앙심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완벽한 장면’을 믿지 않는 창작자만이, 관객에게서 피자 세이버를 걷어갈 수 있다.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 무대에는 덧마루가 없다. 야구장 필드가 기호처럼 그려져 있을 뿐이다. 홈베이스, 1루, 2루, 3루가 표시된 단순한 바닥,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대도구가 무대의 전부다. 덧마루는 보통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고, 극장의 권위를 살리는 제단으로 기능한다. 신전에서 제단은 언제나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다. 제단을 치우지 않으면, 제단의 존재를 의식하기 어렵다. 역설적이지만 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제단을 소거하면 된다. 연극의 주인공 오이디가 나쁜 예언을 들은 후, 예언을 전한 인공지능을 파괴하려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예언을 파괴해야 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의 공연 사진. 화이트 박스 무대의 뒤편에는 두 개의 기둥 사이로 흰 커튼이 있다. 바닥에는 흰 선으로 야구장과 같은 부채꼴 모양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마운드를 연상시키는 둥근 원이 그려져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검은 야구점퍼와 검은 바지를 입고 단발 머리를 반묶음한 여성이 바닥을 보며 서 있고, 그 왼편에 바닥에 파란 야구공 두 개가 놓여있다. 바닥에 그려진 야구장 모양의 부채꼴을 기준으로 1루 위치에 파란 야구공이 여덟 개 더 놓여있다.

hit or run: 말씀 살해하기

연극의 배경은 폐허가 된 미래 도시다. 오이디, 이오, 레온, 칵터는 쓰레기가 가득한 집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 광장에서 만난 사이로, 서로를 대안 가족으로 여긴다. 이들은 낡은 소파에 앉아 ‘케미컬’을 하고, 20세기에 촬영된 흑백 필름을 시청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생활 방식은 과거 서구 사회에 실존했던 히피 공동체와 닮았다. 히피 공동체가 쇠락한 것처럼, 이들의 공동체도 위기에 처한다. 어느 날 인공지능 T가 나타나 비극적인 신탁을 전했기 때문이다. T는 지병을 앓는 칵터를 향해 죽음을 예고한다. 칵터에게 이 예언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연인 레온과 시간을 보내며 삶을 마무리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오이디는 다르다. 오이디는 “너는 너의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와 같은 희생양을 낳는다.”라는 예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왕을 모티브로 한 인물답게, 그는 예언에 맞선다. 그는 친구들을 설득하여 T를 파괴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레온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대디 이슈에 찌든 에고이스트”다.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 살해 서사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문학 작품에서 아버지는 근원, 콤플렉스, 인정 욕구, 경쟁자, 초월적 의지 등을 상징한다. 연극인에게 아버지는, 내면의 아마추어리즘을 억압하는 존재다. 그는 평론가, 교수, 기자의 얼굴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사적 경쟁자의 얼굴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아버지는 작품의 성패를 냉혹하게 판단하며, 연극 미학을 둘러싼 기준을 제시한다. 미의식, 메소드 연기, 아름다운 신체, 자연스러운 전환, 주제 의식, 그 외 정답으로 치부되는 온갖 잔소리 말이다.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은 신탁과 싸우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동시에, ‘말씀’에 대항하는 연극인을 내세운다. 무대 위로 ‘아마추어적’ 순간들이 연출된다.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의 공연 사진. 붉은 조명이 무대 전반을 밝히고 있다. 실루엣만 보이는 한 명의 배우가 무대 중앙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등 뒤로 모아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의 뒤로 다섯 명의 배우가 그를 둘러싸고 서 있다. 다섯 명의 배우 중 중앙의 배우는 머리에 희고 큰 깃털 세 개를 꽂고 청사초롱을 두 손으로 들고 서 있다. 나머지 네 명의 배우는 상체와 머리를 모두 가리는 커다란 가면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데, 가면은 각각 다른 얼굴을 묘사한 것으로 고대의 벽사가면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한 스태프가 갑자기 등장한다. 그는 “지금 배우들이 시간이 필요하다”라며 어색한 목소리로 시간을 끈다. 그는 관객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미리 써온 글을 읽으며 더듬더듬 자기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이 장면을 본다면, 아마추어 같다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끝까지 한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퍼포머가 뜬금없이 등장하여 옷을 벗고, 팬티 차림으로 파파존스 피자를 먹기도 한다. 엄마 이름이 파파, 아빠 이름이 존스이며, 자기 속옷이 캘빈 클라인 제품이라는 온갖 불필요한 정보들을 늘어놓으면서. 그의 퍼포먼스는 관객 내면에 잠재된, 수치심, 추(醜)를 향한 욕망을 건드린다. 이러한 순간이 겹겹이 쌓여, 신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신탁이 무너지기 전, 인물들은 고조된 마음을 노래로 승화한다. 이 연극에서 음악은 중요한 장치인데,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자기 현시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메소드 연기에 대한 오해 때문인지, 세간에는 ‘자의식을 버린’ 연기를 탁월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런 태도가 직업 정신의 발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스페이스 외디세이는, 노래를 부르며 ‘본체’로 돌아가 버린다. 이들은 곡을 완성도 있게 소화하는 대신, 서로 마이크를 빼앗고, 막춤을 추며 무대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관객은 궁금할 것이다. 앞에서 노래하는 인물이 오이디인지, 배우 류지오인지. 망상과 호기심은, 관객을 흥분하게 만든다. 관객은 무대로 난입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망할 놈들아! 머저리들아!1)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의 공연 사진. 무대에 관객과 배우들이 섞여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를 하는 여덟 명의 사람들 뒤로 각자 소품을 들고 이들을 응원하는 세 사람이 보인다.

홈베이스로 오다: 신과 맞먹은 사람들

오이디와 친구들은 T를 파괴하는 데 간신히 성공하지만, 다시 문제가 터진다. 이들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오이디는 예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 하지만, 레온과 칵터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두 사람은 모든 일이 오이디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며 그를 비난한다. 그를 가장 아끼던 이오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오이디는 부모를 겨우 용서하지만,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 관계에서 다시 실패를 맛본다. 예언으로부터 도망친 줄 알았는데, 결국 스스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와 같은 희생양을 낳은 셈이다. 오이디는 1루, 2루, 3루를 외롭게 달리다, 홈베이스로 터벅터벅 돌아온다. 집에는 레온이 있지만, 그곳에 과거의 ‘우리’는 없다. ‘우리’는 과거를 기록한 데이터 칩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오이디는 이오에게, 자신들이 ‘힘들게 달려도 결국 홈베이스로 돌아오는’ 실패한 세대 같다고 토로한다. 이오는 옛날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라고 말하며, 지구를 상징하는 파란 공을 던진다. 오이디는 공을 힘껏 친다. 홈런이다. 지구가 날아가고, 오이디는 뛰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든 신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계속 달린다. 일단 달리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자신이 된다는 사실도 알기 때문이다. 아마추어의 창작 행위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연극에서 아마추어란, 홈베이스를 떠나 달리는 인간을 의미한다. ‘신과 맞먹으러2)’ 떠날 수 있는 자는, 아마추어뿐이다.

공을 던지면 누군가는 받는다. 피자 상자 바깥으로 나올 사람은 누구인가?

[사진 제공: 스페이스 외디세이]

제 7회 모자이크 페스티벌: 비극_디오니소스
스페이스 외디세이 <안타 오이디푸스: hit or run>
  • 일자 2022. 2.17 ~ 2.19
  • 장소 연희예술극장
  • 연출·기획 류사라 각본 류사라, 유창희 출연 류지오, 정지현, 유광혁, 서강범, 임솔몬, 이재하, 미팍, 박가인 드라마터그 한진이, 박동수 작곡 나상현, 그린맨 영상 유창희 음향 이형주 의상 미팍 그래픽디자인 안채연 홍보 심지용 무대 및 소품 강산하
  • 관련정보 https://tumblbug.com/antaoedipus
  1. ‘시작의 노래’ 가사 일부. 작곡 나상현, 작사 류사라.https://youtu.be/YSw5E8tNf1g
  2. ‘야망의 노래’ 가사 일부. 작곡 나상현, 작사 류사라.https://youtu.be/zAhaR7a4l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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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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