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낙관, 구원, 역사

그린피그 <엑스트라 연대기>

진송

제231호

2023.03.23

(정치·사회운동에서의) ‘낙관’이라는 단어에 대해 한동안 골몰했던 적이 있다. ‘낙관이 불가능한 세계의 낙관론’이라는 형용모순적인 이론을 구상해 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런 방식으로 망해가는 세상을 눈앞에 두고도 ‘낙관’이라는 태도를 운동의 지향점으로 삼는 것 자체가 다소 부적합하지 않은지를 동료들과 토론한 적도 있다. 이는 필히 우리가 낙관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계속 지켜보게 하는지, 우리로 하여금 애타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지켜보는 관객이자 배우로서 남아 있게 하는지 ― 세계를 도저히 버리지 못하게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싸움을 포기하고 싶고, 또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질 게 뻔한 싸움이야’, 그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나는 실제로 숱한 실패를 목격했고 아주 가끔의 작은 성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성공의 경험이 너무나 드문 나머지 투쟁의 역사와 시간이 마치 ‘실패의 연대기’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엑스트라 연대기>의 공연 사진. 여덟 명의 배우들이 공장 노동자의 복장으로 각자 노래를 부르거나 리코더, 피리, 멜로디언 등을 연주하고 있다. 그들 사이로 목사 복장을 한 이와 정장을 차려입은 이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은 모두 눈 밑을 검게 칠한 분장을 하고 있다. 어딘가를 향해 걷는 모습이다. 이들의 뒤편으로 파란 천막텐트에 걸린 ‘사람 살고 있음’이라는 손으로 쓰인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엑스트라 연대기>는 독립군, 노동자, 학생운동가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점거’라는 방식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는 모습을 1930년부터 2030년까지, 남쪽에서 북쪽까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보여 준다. 극의 첫 점거자로 등장하는 독립군은 나무 전주 꼭대기에 올라 ‘만주에 가서 새 나라도 세우고 새 학교도 만드는 독립군들처럼은 조선을 떠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조선을 떠나지 않는 것을 조선을 점거하는 행위로, 투쟁 행위로, 또 세계에 대한 관객이 되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관객은 어두운 극장 속에서 느긋하게 허리를 젖힌 채 극을 구경하는 자가 아니다. 관객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보는 증인이다.
<엑스트라 연대기>에는 권력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성공적으로 투쟁에 승리해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거듭하여 무대 세트가 전환되고,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고 다른 인물이 되어 재등장하는 과정에서 투쟁은 실패 혹은 실패의 예감만을 남긴 채 다른 시공간 속으로, 다른 이의 몸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누구나 투쟁의 실패를 예감할 수 있을 만큼 권력 차이와 상황의 열세가 확연한 상황에서 이야기의 결말이 과감하게 생략되고 같은 배우가 다른 인물로 다시 등장하는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결말이 생략된 것이 아니라 지연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투쟁은 실패하고, 실패하지만 실패하며 계속된다.

<엑스트라 연대기>의 공연 사진. 검은 턱수염과 부스스한 머리를 한 안경 낀 남성이 작업복 차림에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와이어에 매달려있다. 그의 뒤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무언가를 취재하는 카메라 기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나오고 있다. 스크린 아래에는 ‘철거민은 무죄다! 살인진압! 살인개발!’이라는 손 글씨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플래카드 위쪽으로 담요를 두르고 주저앉아 있는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수녀복을 입은 인물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듯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한편 연극은 중반부에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특이한 전환을 맞이한다. 점거 투쟁 중인 공장 노동조합 조합원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담소 장면 이후 극장 벽면에 프로젝터로 2009년 7월 20일 경찰이 공권력을 사용하여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에 폭력적으로 대응했던 당시의 화면이 가감 없이 송출된 것이다. 자료 화면이 재생되는 동안 일부 배우들은 연극의 첫머리에서 독립군이 약속했던 바대로 ‘눈 하나 깜짝 않는’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관객들 역시 그 장면을 피할 방도 없이 배우들과 함께 영상을 보았다. 그 순간을 목격했다. 건물에 불이 붙고 경찰이 곤봉으로 사람을 때리는 순간을.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극장의 시공간은 잽싸게 다른 시공간으로 미끄러지다 현실의 톱니바퀴와 아귀를 딱, 하고 맞부딪힌다. 마치 이제부터는 극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것이라고 선포하듯이. 무대 위에는 각종 시위 피켓을 든 배우들이 서 있다. 나는 현장 중계를 하듯 시위 상황을 긴급히 설명하는 배우들의 대사를 흘려들으며 피켓에 적힌 글자들을 읽다가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SPC노조’, ‘청소노동자 임금 400원 인상’, ‘난방비 폭등’……. 현실과의 접점을 한 점 숨기지 않고 모두 드러낸 그 글귀들에, 극장의 시간이 정말로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2030년까지 이어지는 100년간의 투쟁은 내가 ‘실패의 연대기’라는 말로 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실패’라는 단어에 취소선을 그어야 했다. 더 신중해져야 했다. 투쟁의 결말은 지연되어야 했고, 그것은 이 연극이 끝난 후까지, 극장 바깥에서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섣부름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그리고 정말로 현실 속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생각 때문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마치 이 연극이 현실인 것처럼. 배우들과 내가 진짜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엑스트라 연대기>의 공연 사진. 3D 안경을 쓴 두 사람이 팝콘을 입에 가득 넣은 채 놀라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뒤로 멀리, 사람 키 두 배 이상 높이의 구조물과 구조물에 걸린 ‘철거민은 무죄다! 살인진압!’ 등이 쓰인 플래카드가 보인다. 플래카드 위에 어렴풋이 두 인물이 서 있다.

연극의 말미에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함장실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일종의 ‘점거’를 하는 젊은 해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함장실 밖의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맞혀 주면 함장실 밖으로 나가겠다고 말한다. 무척 알레고리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 이야기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마 구원이다. 그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구원인지도 모른 채 함장실의 가장 좁은 곳에 웅크려 앉아 제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구원임을, 자신에게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때, 해군 잠수함의 곁으로 대왕오징어 한 마리가 지나간다. 젊은 해군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임을 느낀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결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찰나 비상구처럼 열렸다가 닫히는 ― 그러나 사실은 열렸던 적도 없는 ― 구원으로서의 대왕오징어 말이다. 함장은 젊은 해군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 대왕오징어였다며, 함장실 밖으로 나오면 점거 행위를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타이르지만 해군은 “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대왕오징어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고 일갈하며 함장실 안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 해군이 대왕오징어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함장실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대왕오징어는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대사는 마치 구원과 역사, 그리고 구원 없는 역사를 통해서만 상상 가능한 낙관론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구원이 오지 않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당당히 힘주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무엇에 구원 없는 삶을, 투쟁을 걸 수 있을까? 무엇이 이 삶들에 순간 열리는 비상구들을 만들까?

<엑스트라 연대기>의 공연 사진. 무대 가운데에 흰 한복과 흰 두건을 쓴 여성이 무릎을 모으고 팔짱을 껴 무릎에 올린 채 쪼그리고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뒤에 철창 모양의 구조물이 있고, 철창 너머로 한 사람이 등을 돌리고 책상 앞에 앉아있다. 그 뒤로 높은 철제 구조물이 보이고 가장 높은 곳에는 흰 패딩을 입은 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무대 뒤편 화면에는 흰 한복과 두건을 쓴 여성이 나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큰소리쳤던 대로 무대 위에서 관객이 되어 연극을 내내 지켜보던 1930년의 독립군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화를 잔뜩 내더니 무대 밖으로 나가버린다. 100년 동안이나 자기가 관객인 줄 알았더니만, 알고 보니 배우였다는 것이다. 그는 관객석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극장 밖으로 나가고, 극장 불까지 꺼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독립군의 ‘관객이 아니라 배우였다’는 깨달음은 사실 <엑스트라 연대기>의 관객이 연극을 본 후 깨닫게 되는 바와 일치한다. 공연 내내 독립군과 관객은 100년간의 연대기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지켜보는 똑같은 역할을 수행(해야)한다. 그러니 그가 배우라면, 관객 역시 관객이자 배우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배우가 되며, 관객을 배우로 만들며, 세계를 극장으로 만들며 극장을 성큼성큼 빠져나간다.
극장을 나오니 밖이 조금 어둑했다. 손에 연극 티켓을 쥔 나는 여전히 관객이었고, 세계는 여전히 세계였다. “Theatrum Mundi(테아트럼 문디, 세상은 극장이다)”. <엑스트라 연대기>의 공연 팸플릿의 한 모퉁이에 적혀 있던 그 문장……. 세계가 극장이라면, 세계는 원래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을 테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 결말이 지연된 역사가 미끄러져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낙관의 순간이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경오]

그린피그 <엑스트라 연대기>
  • 일자 2023.3.4 ~ 3.12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 작가 전성현 연출 윤한솔 출연 강마로, 김수웅, 김용희, 김원태, 박기원, 박수빈, 박유진, 이동영, 이승훈, 이지원, 정양아, 정연종, 최지현 조연출 주은길 무대디자인 김혜림 조명디자인 김형연 의상디자인 온달 분장디자인 장경숙 음악 옴브레 음향감독 전민배 영상감독 문소현 영상기술감독 윤민철 영상프로그래머 윤유리 무대감독 손세리 무대조감독 서민지 그래픽디자인 워크룸 기획 나유진, 노지상 제작 그린피그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882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