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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즈음에

신촌극장 <나른한 오후 X 김기일>

김민조

제231호

2023.03.23

혼자 남은 밤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종종 ‘노래방에서 가장 부르기 어려운 김광석 노래’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답할 때가 있다. 누군가는 후렴구에서 고음을 올리기 어려운 <사랑했지만>이라고 답하고, 누군가는 감정의 변박을 따라가기 어려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날들>의 우울한 정서를 흉내 내기가 가장 어렵다고 답하기도 했다. 내 경우에는 [김광석 네 번째] 앨범 수록곡 <혼자 남은 밤>이 가장 어렵다고 답한다.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
되올 수 없는 시간들
빛바랜 사진 속에 내 모습은
더욱 더 쓸쓸하게 보이네

아 이렇게 슬퍼질 땐 거리를 거닐자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임을 전제하고 말하자면, 이 노래의 정서적 여로는 내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에서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로 가는 길이 끊겨 있기 때문이다. 거리를 산책하는 화자의 눈에 어떤 사물이 비쳐 들었는지, 슬픔을 희망으로 뒤집는 원동력이 어떻게 화자의 내부에서 솟아날 수 있는지 노래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김광석이 “삶에 가득/여러 송이 희망을” 노래하자는 부르짖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버린 후에도 청자는 우두커니 방 안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혼자 남은 밤>은 앞뒤가 분열되어 있다는 이유로 청자의 마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면이 있는 곡이기도 하다. 정합성이 빈틈없이 실현된 작물은 투명한 거울처럼 관객을 되돌려보낸다. 그러나 그 거울이 부분적으로 깨져 있음을 발견할 때, 관객은 가느다란 실금선의 궤적을 따라 자기 자신의 일부를 투여하게 된다. 나는 <혼자 남은 밤>의 불투명한 간극 안에서 종종 무리하게 되는 나, 혹은 무리하지 못하는 나를 보곤 한다. <서른 즈음에>의 희뿌연 담배 연기 안에 평생 머무를 수도 없고 <자유롭게>의 가벼운 허밍을 뒤쫓아 낙천적으로 부유할 수도 없었던 봉착의 나날들을. 그래서 가끔은 <혼자 남은 밤>을 지어서 네 번째 앨범에 담던 때의 김광석도 나와 같은 얼굴은 아니었을까, 착각하고 싶어진다.

<나른한 오후>의 공연 사진. 회색 니트 가디건을 입고 단발머리를 한 A와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머리를 낮게 묶은 B가 나란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옆모습이 보인다. 두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잡은 A는 다소 낮은 곳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이고, B는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다.

나른한 오후

김기일이 쓰고 연출한 연극 <나른한 오후>는 김광석의 정규 3집 수록곡 <나른한 오후>(1992)에 기대어 있는 작품이다. 이 연극의 대본을 쓴 작가로 설정되어 있는 A는 예전과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다짐을 내비치는 인물이다. A는 친구 B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이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다. 버티면서 살지 않겠다. 내가 딱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편하다. 요즘 좋다. 잘 될 것 같아. A 역의 한혜진과 B 역의 김보은은 함께 휴양지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느릿느릿 한가롭게, 말의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인물의 표정을 더 보여주는 인디 영화의 간격으로 말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젊은 날의 열정을 사로잡았던 성취주의와 인정투쟁의 굴레로부터 빠져나와 이제 막 하심(下心)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좋아. 좋네. 좋지. 좋구만. 같은 느긋한 대꾸들이 극장의 시간을 길게 늘인다. 첫 장면에서 A와 B는 정말로 좋아 보여서 불길하고 찜찜한 마음마저 들게 한다. 그들이 너무 일찍 결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불길한 예감은 실현된다. A의 언어를 빌리자면 “막상 다르게 하려니까,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이 새로운 고민의 요체이다. 아마도 A는 좋은 작품, 잘 쓴 작품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왔던 지난날을 털어버리고 싶어 했으리라. 그러나 ‘잘 쓰지 말고 그냥 쓰라’는 명령은 A의 내면에 새로운 형태의 자기검열을 슬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친구 C는 그냥 하면 된다, 다 니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A는 선의의 독려에 떠밀릴 듯하면서도 선뜻 손을 움직이지 못한다. 엘리펀트룸의 전작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2020)에 나오는 빨간 원숭이의 상황에 비긴다면, A는 ‘자유’만 있고 ‘출구’는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장면 이후로 A와 친구들의 대화는 미묘하게 겉돌기 시작한다. 첫 장면에서 한혜진과 김보은이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동일선상에 나란히 존재했다면, 이 장면에서 한혜진은 노트북이 있다고 상정되는 앞쪽 방향으로 좀 더 몸을 숙이고 있으며 김보은은 뒤쪽에서 비스듬히 한혜진을 응시하고 있다. 사선의 형태로 살짝 어긋난 구도 속에서 A가 C의 조언이나 격려를 조금씩 흘려듣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난다. 드라마틱한 갈등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A와 친구들의 대화는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조금씩, 은근한 엇박자로 겉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A가 퇴사를 결심하고 보드게임방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는 D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는 장면도 마냥 훈훈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꼭 해. 그래야지. 응, 꼭 해. 이 세 마디를 느린 박자로 주고받는 동안 어떤 생각들이 물밑에서 오갔을지 생각해본다. ‘네가 쓰고 싶은 것을 쓰라’는 강령에 힘겨워하는 자신과 달리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D에 대한 부러움의 감정이 A를 스쳐 지나갔을 것인가, 구태여 발설할 필요가 없는 우려의 말들을 삼키느라 한번 뜸을 들였을 것인가, 그러면서 ‘잘 될 거야’라는 책임질 수 없는 덕담도 함께 삼켰을 것인가. A가 (사이) 라는 합법적인 쿨타임 안에 골라낼 수 있었던 최대치의 반응이란 그저 D의 결심에 무해한 지지를 실어주는 것에 불과했다. 타인의 운행 경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한 최저한도의 반응, 그리고 안전한 대화. 연극 <나른한 오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란 종종 모범적인 비폭력 대화의 스크립트를 따르는 듯 보이기에, 이 연극은 마치 번민도 갈등도 나른하게 녹아서 사라지는 낮술의 시간을 함께 음미해보자고 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텍스트를 쓰고 있는 A는 정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른한 오후>의 공연 사진. A가 테이블 위에 캔맥주와 메모장을 올려두고, 한 손으로는 펜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의 옆에 앉은 B는 흰색과 회색 조합의 아노락을 입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상체를 한껏 젖혀 캔맥주를 마신다. 그들의 뒤편으로 영사되는 영상에는, 키보드 위에 ‘결국엔 돌아오는 이야기. 연극인의 1월 같은’이라는 손 글씨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마흔 즈음에

연극 <나른한 오후>에 나오는 인물들은 지금 마흔 즈음을 경과하는 사람들의 위치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서른 즈음의 환멸을 지나 시대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 자기계발과 열정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청년이라는 병을 앓다가 ‘~해도 괜찮아’ 시리즈가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를 휩쓰는 새로운 광경에 합류하게 된 사람들. 그래서 내려놓겠다, 그만두겠다, 편해지고 싶다는 말을 안부처럼 주고받게 된 A 같은 사람들.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이 늙은 청년들에게 다른 종류의 불안과 환멸이 귀환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A는 ‘나답지 않은 것’들로부터 졸업했으나 ‘나다운 것’을 배운 적은 없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지은과 양대은의 2인극 <어디로 갈지 모르는>(2020)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혼란과 두려움을 서핑보드 위의 쾌락으로 전환시키는 몸짓을 보여준 작품이었다면, <나른한 오후>는 비상등을 켜고 도로변에 멈춰선 사람의 불안에 보다 집중하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마흔 즈음은 기시감과 함께 온다. 친구 C가 지적했던 것처럼 A는 자신이 쓰는 글에서 좀처럼 따옴표를 벗겨내지 못한다. “솔직함”, “기대”, “실패”, “실망”. 자기 자신이 솔직함이라 불리는 상태에 도달하는 길을 이미 겪어보았고, 돌고 돌아 실망에 이르는 길도 여러 번 주행해본 운전자는 불운한 접촉 사고를 피하기 위해 경험을 지도처럼 개념화한다. 아마도 그 습관 자체가 마흔 즈음을 결박하는 저주받은 자산이 될 테다. 그렇기에 지도를 힘껏 구겨 던져버리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나른한 오후>의 A는 다소 겁 많고 보수적인 인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A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따옴표 “충동”이 아닌 진짜 충동에 의해 돌발적으로 행위하는 장면은 오직 공연장 벽면에 투사되는 영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카메라를 든 인물은 어두운 길을 걷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하얀 가로등 불빛이 인물을 먹어 삼킨다. “걷고 싶다. (사이) 나가고 싶다. (사이) 뛰고 싶다”라는 마지막 자막 대사를 무대 암전이 먹어 삼키듯이.

<나른한 오후>의 공연 사진. 빈 무대에 테이블과 두 개의 빈 의자가 보이고, 뒤편 영상에는 노랑, 파랑, 빨강색 포스트잇이 일렬로 붙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포스트잇에는 ‘낮술’, ‘기대’, ‘실망’, 좋다, 라는 말 뒤에 깔린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말고, 내가 받고 싶은 사랑, ‘인생이 보드게임’ 등의 손 글씨가 적혀 있다.

서른 즈음을 넘긴 김광석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끊어진 길>이라는 노래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살아 생전 그에게는 슬픔과 희망 사이의, 풍경과 내면 사이의 간극을 삶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른한 오후>의 A 역시 반복해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안부를 나누고, 낮술에 취한다. 마흔 즈음에 도달한 친구들은 가짜 관심이나 가짜 친절을 서로에게 베풀지 않을 정도로 사려 깊은 이들이지만, 그러한 ‘다정한 무관심’의 결계 사이에서 A는 해소되지 않는 여분의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연극의 결말은 A가 마이크를 들고 김광석의 노래 <나른한 오후>를 가만히 들려주는 장면으로 수렴된다. “사람으로 외롭고 / 사람으로 피곤해하는” 어떤 이의 모습을 비춰주는 그 노래가 이 연극의 한계선을 그어준다는 듯이.
연극 <나른한 오후>는 김광석의 노래를 매개로 우리들 자신의 마흔이 어떻게 서른을 닮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반추하게 하는 공연이다. 바라던 대로 나는 “나”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나. 그런데 이 “자유”가 내가 원하던 것이 맞았나. 마흔 즈음을, 탈○○ 이후의 일상을 우리는 정말 편해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연극은 이 자신 없는 문제에 대해 자신 없는 태도로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제4의 벽을 사이에 두고 어떤 이의 일상을 안전하게 들여다보는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외로움을, 또 어떤 피로를 남길 것인가. “공연 좋았다”는 감상으로는 각자가 앓고 있는 그 여분의 감정들에 대해 미처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른한 오후>의 공연 사진. A와 B가 소주 한 병을 두고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다. A는 검은 자켓을, B는 회색 후드 티를 입었다. 둘은 테이블의 두 모서리에 각각 앉아 있는데, A는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고 있고, B는 테이블 위에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어 A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사진 촬영: 박태양]

신촌극장 <나른한 오후 X 김기일>
  • 일자 2023.3.2 ~ 3.11
  • 장소 신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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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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