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지쳐 떨어져 나가 말문이 막힐 때까지, 이야기-잇기

극단 거북이걸음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진송

제233호

2023.05.11

극단 ‘거북이걸음’의 연극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은 인기 있는, 혹은 많은 관객의 호평을 산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둘이 “진짜 재미있었어, 그렇지 않아?”하고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이 상연된 나온씨어터가 소극장이긴 했지만, 객석에 빈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2023년 4월 6일부터 4월 23일까지 상연되었던 이 연극은, 2020년과 2021년 공연에 대한 재공연이었다. 즉 재미가 검증된 연극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연극을 보기 전 나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내용을 벼락치기 하느라 바빴다. 딱히 바쁠 건 없는 벼락치기였지만 말이다. 난 유튜브에 누군가가 훌륭하게 제작해 둔 “10분 만에 보는 햄릿 줄거리”, “5분으로 요약한 맥베스의 비극”, “처연한 리어왕 이야기 10분 만에 보기”,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오셀로 10분 만에 정복”과 같은 영상들을 차례로 봤다. 영상을 본 덕분에 너무 옛날에 읽어서 희미해진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줄거리와 핵심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만큼 갖춰졌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의 공연 사진. 석수표가 무대 가운데 위치한 등받이 없는 긴 의자에 무릎을 꿇고 있다. 석수표는 중세시대 남성 블라우스처럼 어깨에 레이스가 달린 흰 블라우스와 흰 타이즈, 노란 체크무늬 트렁크 팬츠를 입고 회색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 검은색 상하의에 흰색 가면을 쓴 네 명의 코러스가 그의 좌우에 두 명씩 서 있고, 가장 우측에는 검은 상하의 위에 버건디색 조끼를 입은 호레이쇼가 서 있다. 코러스와 호레이쇼는 각자 오른손 검지를 들어 무언가 강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호레이쇼는 말을 하는 중이다. 석수표가 억울한 표정으로 호레이쇼를 바라본다.

그러나 연극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읽지 않아도,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줄거리와 그 핵심 등장인물조차 전혀 알지 못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괴로워하던 희곡 작가 석수표에게 「햄릿」에 등장하는 햄릿의 친구이자 조연 배우 ‘호레이쇼’가 등장해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써 달라고 요구한다. 석수표가 마지못해 호레이쇼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이 「오셀로」에서 악역 이아고의 아내로 나왔던 이멜리아, 「리어왕」에서 코델리아의 남편으로 나왔던 프랑스 왕, 던컨 왕의 호위병으로서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는 「맥베스」의 더글라스가 차례로 등장해 자신 또한 호레이쇼가 요구했던 바로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에서 호레이쇼는 「햄릿」에서만큼 점잖고 신의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욕심쟁이고, 극의 마지막에 모든 진실을 밝혔던 정숙한 이멜리아는 이제 진실보다는 권력을 탐하며, 원작에서는 남자였을 프랑스 왕은 뮤지컬 배우가 적성에 맞아 보이는 아리따운 여성으로 등장한다. 어디선가 등장한 이 인물들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원작과 이미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읽어 오지 않았어도 연극 감상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미리 읽은 덕에 알 수 있는 점이 있었다면 그건 오직 석수표가 호레이쇼가 요구한 ‘그 작품’을 써 내리기 전에 이미, 등장인물들은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틀을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히 개연성의, 논리적인 오류처럼 보였다.
등장인물들이 작가인 석수표를 찾아온 것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채 완성해주지 않은 미완성의 삶을 누군가 채워주기를 바라서다. 예컨대 「리어왕」의 프랑스 왕은 셰익스피어가 이름도, 외모도, 그 무엇도 묘사하지 않고 그저 ‘코델리아와 결혼한 프랑스 왕’이라는 정보만을 주었기에 이름을 묻는 주변 인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작가인, 작품 속 세계에 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석수표가 ‘앙리마리떼프랑소와저버’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만들어 준 후에야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프랑스 왕’에서 ‘프랑스 공주’로 호칭이 변하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설정이 이치에 맞으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쓰이지 않았던 무대 위 캐릭터들의 특징 또한 없거나 희미해야 하지 않나?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의 공연 사진. 사진 왼편에 석수표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각자 턱을 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인 프랑스왕, 호레이쇼, 이멜리아의 측면 모습이 나란히 보인다. 프랑스왕은 긴 기장의 머리를 귀 높이로 묶었으며 벨벳 재질의 망토를 둘렀고, 이멜리아는 검은 상의 위에 회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등장인물들은 셰익스피어가 ‘쓰지 않은’, 그래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는’ 부분인 신체, 성격,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더글라스는 태연하게 극의 중간에 피 칠갑이 되어 등장해 던컨 왕 살해 사건에 숨겨진 - 아마 셰익스피어도 몰랐을 -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더글라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무대 한쪽 끝에서 이멜리아가 이런 ‘옥의 티’쯤은 눈 감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냐고 제안하는 듯이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어머, 그럼 쟤한테는 자기 삶이 있었다는 거야?” (참고로 이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며, 극에서는 빠르게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마치 이멜리아의 질문이 ‘씹히기’ 위해 던져진 질문이라는 듯이…).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모든 삐뚤삐뚤한 이야기의 흐름, 능청스럽게 숨겨지고 지나가는 오류들은 석수표와 호레이쇼, 이멜리아, 프랑스 왕, 더글라스가 옥신각신하며 만들어 나가는 연극 속의 ‘그 작품’, 호레이쇼가 처음에 요청했던 ‘그 작품’과 닮았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에서 등장인물들은 작가를 찾아와 놓고는 작가를 저 멀리 내팽개쳐 둔 채 개연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자신이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오로지 주인공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자리를 두고 격렬하게 경쟁하는 그들. 누가 그 뜨겁고 눈부신 둥근 빛 아래 서게 될 것인가!
한정된 구역의 도형 위에 우뚝 선 자가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서 서로를 이리 밀치고 저리 밀쳐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려고 갖은 애를 쓰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링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격투 종목 선수들 같았다. 다른 인물이 지어내고 있는 이야기를 잽싸게 낚아채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버리는 인물들의 모습은 말(言)들의 질서 없는 이어달리기처럼 보이기도,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때까지 하염없이 계속되는 것만이 규칙인 끝말잇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은 시작과 끝 사이에 우당탕탕 캐치볼, 끝말잇기, 혹은 이어달리기를 이어 나가며 어떻게든 연극을 시작했고, 또 끝냈으며, 이야기가 되었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의 공연 사진. 석수표가 애틋한 표정으로 반쯤 누워있고, 호레이쇼가 무릎을 세워 쭈그리고 앉아 석수표의 어깨를 받치는 모습이다. 석수표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호레이쇼는 비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진다. 그들의 뒤편으로 가면을 쓴 한 명의 코러스 얼굴이 파랗게 보인다. 다른 코러스들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 가운데 보이는 한 명의 코러스를 비추고 있다.

내가 본 2023년 4월 20일의 공연에서, 관객들은 기존의 호평을 증명하듯 등장인물들의 고집으로 이야기의 개연성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깔깔 웃었다. 그것이 바로 극장을 지배하고 있는 ‘유머 코드’ 중의 하나였다. 문득 궁금했다. 이 관객들은 호레이쇼가 요청한 연극 속의 ‘그 작품’을 감싸고 있는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에 존재하는 ‘옥의 티’들에도 웃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건 웃기에는 애매하고, 웃지 않기에는 한껏 웃음 세례를 받은 연극 속의 ‘그 작품’에 대해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이런 절묘함에 (웃지는 않지만) 미소를 짓는다. 석수표의 ‘그 작품’을 감싸고 있는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의 전개 방식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것. 이야기가 이야기를 이으며, 이야기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말문이 막힐 때까지 가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겹쳐 보인다는 게 너무나 절묘했다. 나의 웃음 코드는 그 ‘절묘함’이었다.

*

문득 내가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던 (그런데 아무도 안 웃길래 웃음을 참았던) 극중 석수표의 다소 ‘교훈적인’ 대사를 떠올려 본다.
“지금 이러고 있는 여러분(필자 주:주인공 자리를 두고 싸우는 등장인물들)이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라구요!”
석수표는 연극 내내 등장인물들에게 끌려다니다가 이 장면에서 ‘갑자기’ 무대 위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자아를 표출하고 교훈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장면 이후 또 다시 무대 중앙이든 구석이든 어딘가에 쭈그려 앉아서 중얼거리기만 한다. 나는 이 장면이 정말로, 가혹하게 웃겼다.
연극, 그리고 연극 속의 연극에서도 작가로서 ‘씹히기 위해(그럼으로써 연극을 작동시키기 위해)’ 전능한 작가로서의 능력을 전부 내려놓은(혹은 그럴 능력 따위 애초부터 없었던) 작가라니. 비극적이다. 아니, 이건 희극적이다. 비록 석수표 그 자신만큼은 토로하고 있는 불만- 주인공이 되려는 당신들의 싸움은 비극적이다! -이 진실한 것이라고 느낀다 하더라도, 나는 그 주장 자체에 설득되지도 못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혹은 싱그라페이스συγγραφέας 엑스 마키나) 식으로 등장해 책을 모조리 찢으며 문제를 해결해버리려는 석수표의 권위에 압도되지도 못했다. 내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스포트라이트를 버티며 움찔거리는 그의 가냘픈 셔츠 자락뿐이었다.
그 셔츠는 감히 말하건대 깡마른 배우의 신체에 덧씌워져 가엾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시학』에서 비극을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재현하는 작품, 가장 고귀한 위치에서 가장 남루한 위치로 추락하는 자의 이야기로 정의했다. 반면 희극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재현으로 정의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연극은 ‘희극보다 더 희극적인’ 이야기에 더 가깝다. 주인공이 되려고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불사하고 이야기에 몸을 던지고자 하는 등장인물들을 뚜렷이 내보이는 이 극에는 고귀한 인물도, 떨어질 바닥도 없다. 이야기는 고귀해질 틈도 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낚아채며, 억지스럽게 이어가며,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누군가가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 관객처럼 내게 “이 연극 진짜 재미있었다, 그렇지 않아?” 하고 물어본다면 난 확실히 마땅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어떤 지점에서 시작해 어떤 특정한 지점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된 후가 되고 나서야 기진맥진한 채로 포기를 선언하듯 찍게 되는 이야기의 마침표가 있을 뿐인 것 같다고.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의 공연 사진. 검은 나시 위에 붉은 톤의 디지털 무늬 조끼를 입고 얼굴과 팔에 피를 칠한 더글라스가 호레이쇼를 향해 칼을 겨눈다. 턱에 칼끝이 닿은 호레이쇼는 놀란 얼굴로 두 손을 들어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호레이쇼 뒤로 긴장한 표정과 포즈의 이멜리아와 프랑스왕이 줄줄이 서 있다. 그들의 뒤에 겁에 질린 표정의 석수표가 홀로 등을 돌린 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돌려 등장인물들을 바라본다.

[사진 제공: 극단 거북이걸음 / 촬영: 이강물]

극단 거북이걸음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 일자 2023.4.6~23
  • 장소 나온씨어터
  • 작·연출 손지형 출연 윤일식, 이동혁, 이혜미, 이연조, 장용현, 이창민 무대감독 황동우 무대·조명디자인 김나은 그래픽디자인 배세현 사진·영상 촬영 이강물 기획 권귀빈 음향오퍼 이해선 조명오퍼 서형덕 조연출 조원재, 전하경 분장 김근영 홍보 프로젝트 토끼뜀 제작 극단 거북이걸음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04077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