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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한 관객으로부터 최초로 시작되어…

극단 에게 〈응원: Postscript〉

팔도

제234호

2023.05.25

극단 에게의 <응원: Postscript>는 재개발을 앞둔 신림중앙시장 건물 안팎에서 관객들이 ‘도슨트’인 연출 이명우를 따라 이동하고 아이돌 ‘도른 3.3’의 공연을 관람하도록 만드는 관객 이동형 연극이다. 공연 소개 글에 등장하는 재개발, 도슨트, 아이돌, 기후위기 같은 단어들의 ‘잡다’한 조합은 단숨에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체 어떤 연극인가,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 하는 불안도 불러일으킨다. ‘잡다’한 조합은 아주 드물게 거창한 성취로 이어진다. 하지만 <응원: Postscript>은 성취를 향하기보다 황폐한 공간 사이를 ‘잡다’한 채로 배회하고자 한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응원>의 앨범 커버사진. 낡은 상가 건물의 옥상에 도른 3.3 세 멤버가 등을 보이고 서서,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뒤편으로 녹이 슨 푸른빛의 철제 간판 뒷면이 보이고, 간판에는 응원이라는 문자가 쓰여 있다. 간판 너머로 주택가의 전경과 하늘이 일부 보인다. 사진의 상단에는 NEW SINGLE RELEASE라는 문구가, 사진 하단에는 도른 3.3이라는 손글씨가 보인다.

아이돌, 유령, 무당

연극은 총 네 개의 장(章)으로 구성된다. 1. 아이돌 도른 3.3의 음원 <응원> 2. 음원 <응원>의 영상 티저 3. 신림중앙시장 옥상에서 펼쳐지는 도른 3.3의 데뷔 공연 4. 연극 종료 후 유튜브에 게시될 <응원>의 공식 뮤직비디오. 즉 연극의 핵심에는 아이돌 도른 3.3이 있다. 그러니 도른 3.3에 대해 살피지 않고 <응원: Postscript>의 잡다함에 대해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도른 3.3은 오마, 지오, 매메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혼성 그룹이고 그룹명 ‘도른 3.3’은 독어로 ‘고통의 근원’을 의미하는 ‘dorn’과 원천세 ‘3.3%’의 합성어, 즉 ‘세전 고통의 근원은 따로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웃으라는 걸까? 작명 센스에 대한 당혹감은 도른 3.3의 데뷔곡 <응원>을 감상하면서도 지속된다. “도라 머릿속이 하얘/기포 터져”, “그 끝이 모아인지 너인지”, “아주 한가할 땐 5G급이야” 같은 가사들은 대체 무슨 뜻일까? 곡 <응원>에는 첫사랑과의 이별 같은 테마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몇몇 문장들과 “가로등에 걸린 만국기”, “박 터지는 오재미”, “subway에서 준 휠라 운동화” 같은 가사는 어떻게 보아도 분명 ‘촌스럽다’. 달리 말하자면 도른 3.3은 지금―여기의 시간에서 비껴 나간, 시대착오적anachronistic인 ‘망돌’(망한 아이돌) 같아 보인다.

<응원: Postcript>의 티저 영상 캡쳐. 낡은 상가 건물 옥상을 배경으로 두 명의 인물이 앉아 있다. 흰 머리가 희끗한 왼편의 남자는 흰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팔다리를 늘어뜨리듯 앉아 있으며, 오른편의 여자는 높은 철제 의자에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려 앉았다. 상가 건물의 뒤편으로 가까운 아파트의 창문들이 빼곡하게 보인다.

그런데 연극이 다음 장으로 이행함에 따라 도른 3.3의 시대착오성은 점차 묘한 힘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2장에 도착한 관객들은 노화한 모습의 도른 3.3을 마주하게 되는데, 주름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침과 체액들을 떨어트리는 도른 3.3의 이미지는 틈새로 물이 흐르는 건물, 덜덜 돌아가는 환풍기나 에어컨, 숨을 몰아쉬는 북극곰으로 이어진다. 이미지의 운동은 도른 3.3을 건물 그 자체처럼, 건물 이곳저곳에 설치된 기계와 사물처럼, 또 ‘실제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동물(이때 동물은 북극곰과 인간 노인 모두를 말한다)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흑백의 영상은 도른 3.3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일까, 미래를 암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어떤 시공간을 열어내려는 것일까?
3장의 클라이맥스인 도른 3.3의 공연에 다다르기 전까지 관객들은 도슨트를 따라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건물 내에 설치된 전시 <Light and heavy, heavy and light>의 작품을 비롯해 건물 안에 방치되어 있는 잡동사니들, 포스터, 달력 따위를 보게 된다. 그리고 도슨트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 또한 전해 듣게 된다. 그는 도른 3.3이 미래의 자신들에게 썼다는 편지를 배달하고, 체코의 한 팬이 도른 3.3에게 보내왔다는 편지와 자신이 할머니에게 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으며, 전시 작품들에 대해 해설한다. 여기 더해 관객들은 이따금씩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의 독백을 듣게도 되며, 갑자기 마주친 한 남성이 부르는 못생긴 소년의 시점에서 쓰인 노래를 듣게도 된다. 이 와중에 도른 3.3의 존재 또한 지속적으로 상기되기는 하지만 이들의 실체를 관객들이 직접 확인하기란 아직 어렵다. 그저 작은 유리창들을 통해 언뜻 보이는 몸의 실루엣을 통해, 그리고 천장에서 나는 소리들을 통해 도른 3.3이 옥상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음을 예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관객들이 마침내 옥상에 올라가 만나게 되는 도른 3.3은 곧 헐릴 황폐한 건물에 남은 잡동사니들, 관객들이 건물 안에서 거쳐 온 그 모든 것들의 화신(化身) 혹은 유령과도 같이 느껴진다. 도른3.3의 데뷔 무대이자 3장의 피날레는 그렇게 건물에 인사를 고하는 굿판이자 미리 앞당겨 지내는 제사가 된다.

<응원: Postscript>의 공연 사진. 보라색과 노란색, 주황색 등이 섞인 조명이 목재 단 위에 놓인 정수기를 비추고 있다. 정수기 상단에는 물통 대신 구슬 모양의 투명한 조명이 여럿 달린 조명기가 놓여 있으며, 바닥에도 투명한 구슬이 여럿 놓여 있다. 그 오른편으로 스피커부터, 크기와 디자인이 각기 다른 공기청정기, 선풍기가 줄지어 놓여 있다. 휴대용 마이크를 착용한 남성이 이 오브제들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옆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

‘실제’ 세계의 것들보다 수명이 질긴 ‘가상’의 것들이 가지는 특권을 시대착오성이라고 한다면, 기억, 감정, 이미지, 유령, 무당 따위에도 시대착오성이라는 특권이 있을 테다. 시공간의 경계를 감히 허물 특권, 철거나 퇴거 명령에 불응하고 냅다 존재해버릴 능력, 당장은 ‘눈앞’에서 말라붙고 증발된다고 해도 다시 출몰할 능력. 그렇다면 도른 3.3의 시대착오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창하고 움직이는 도른 3.3을 떠올리면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지만, 연극 4장인 뮤직비디오의 막이 아직 오르지 않았다. 사실 <응원: Postscript> 3장의 세부적인 구성 측면에 있어서도 의문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신림중앙시장은 3장 속 전시 작품 일부의 ‘재료’로 사용될 뿐 아니라 기실 그 전시와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조건으로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째서 전시 <Light and heavy, heavy and light>는 그 건물 자체에 대해 별말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까? 라는 의문. 80분의 공연 시간 동안 도슨트는 신림중앙시장의 호황기와 화재 사건에 대해 각각 한 번 스치듯 언급하는 데 그친다. 전시는 연극과 연극이 내거는 재개발, 기후위기, 인간의 기억과 망각 같은 키워드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려던 것이었을까?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관객들은 도슨트에게 부담스러우리만치 통통한 흰색 편지봉투를 건네받았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편지는 각기 다른 플랫폼에서 수행된 총 네 개의 텍스트들이 무대로 들어오면서 <응원: Postscript>가 구성된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아직 미완인 연극의 4장을 수신자로 설정하고, 나도 ‘행운의 편지’처럼 리뷰를 부쳐 본다. 이 편지는 한 관객으로부터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연극의 일부가 분명 수용자의 텍스트로 구성되기도 한다는 믿음과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응원: Postscript>의 공연 사진. 상가 건물의 옥상에서 도른 3.3의 세 멤버들이 대형을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이다. 삼각형 모양으로 선 세 사람은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두 손을 배꼽 앞에 모아 고개를 약간 숙였다. 이들의 뒤편으로 아파트들이 빼곡이 보이고, 왼편에는 신림중앙시장이라는 문구가 쓰인 굴뚝이 보인다.

[사진 촬영: 김지훈]

극단 에게 <응원: Postscript>
  • 일자 2023.4.28 ~ 4.30
  • 장소 신림중앙시장
  • 작·연출 이명우 출연 김석주, 박은경, 황현욱 부연출 우지안 게스트 뮤지션 옴브레 작곡가 손희남 영상·사진 김지훈 안무 엄다인 메이크업디자인 김근영 의상디자이너 온달 조명디자이너 홍주희 영상 편집 박세준 보컬트레이너 월리 랩디자인 dragon A.T 음향 박재식 프로듀서 박정현, 정재인 제작 극단 에게 장소협찬 신림중앙시장 상인회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05634
  1. 극 중에서도 언급되는 일종의 릴레이 미신 편지, ‘행운의 편지’의 전형적인 서두를 변형함. 원본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하략)”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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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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