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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이기에 가능한 마법 같은 순간들을 타고 오르며

2023 서울서커스페스티벌 인엑스트레미스트 <다모클레스> & 231과 서남재 <혼둘 혼둘>

손옥주

제234호

2023.05.25

국내 유일의 서커스 축제인 서울 서커스 페스티벌이 지난 5월 5일부터 사흘간 열린송현 녹지광장에서 펼쳐졌다. 이번 행사는 2018년부터 매해 관객과 만나온 서커스 캬바레의 명칭이 바뀌어 진행된 것으로, 서울문화재단이 사계절의 특성을 반영해 새로이 기획한 연간 축제 계획 가운데 봄 시즌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의 경우에는 급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해 페스티벌 첫날 계획되었던 공연들이 모두 취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 불가능한 야외공연의 조건들 속에서 예술가와 관객이 만나던 순간은 그 자체로 깊은 의미를 남겼다. 5편의 해외 초청작과 9편의 국내 초청작 중 대부분은 특정 도구와 기예를 바탕으로 하는 서커스 장르에 (연극이나 무용, 음악 등 타 공연예술 장르에서 비롯된) 서사, 움직임 구성, 사운드 등의 특성을 접목한 컨템포러리 서커스 작품이었다. 1990년대 중반, 서유럽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컨템포러리 서커스 경향은 그사이 한국과 일본, 대만, 캄보디아 등 아시아 지역의 공연예술 현장으로까지 활발히 확장되어왔는데, 무엇보다도 짧은 기예 넘버들로 전체를 구성해내는 공연 방식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과거 근대적 서커스 형식과의 뚜렷한 구분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서울 서커스 페스티벌’에 초대된 국내외 서커스 예술가들 또한 자신이 살아가는 매일의 삶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동시대성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에 근거하여 저마다의 주제와 형식 안에서 작품을 창작, 발표했다.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40~50분에 이르는 이들 작품 가운데서도 이번 글에서는 ‘공동체’와 ‘타인’이라는 공통의/공동의 화두를 건넨 두 편의 작품에 대해 리뷰해보고자 한다.

다모클레스(Damoclès)

<다모클레스>의 공연사진. 잔디가 깔린 열린송현 녹지 광장에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공연을 보고 있다. 검은 자켓 안에 빨간색 티셔츠를 받쳐 입고, 빨간 무늬가 들어간 검은 바지와 빨간 신발을 신은 출연자(Yann Ecauvre)가 긴 나무 널빤지를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은 검지를 펴 옆에 선 여성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출연자가 지목하는 여성을 포함해 두 명의 관객이 널빤지를 잡으려 힘쓰는 모습이다. 널빤지는 한 팔로 안을 수 있을 만큼의 너비와 두께지만, 혼자서는 들 수 없을 만큼의 길이다.

프랑스의 서커스 단체 ‘인엑스트레미스트(Cirque Inextremiste)’의 <다모클레스>는 여러 면에서 매우 인상 깊은 공연이었다. 축제 프로그램상의 소개 문구에 따르면 이 공연은 “자기 행동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투영한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기획되었다고 하는데, 공연의 여정에 함께 하고 있노라니 그와 같은 상호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인지, 또한 상호작용의 실현이 나와 타인에게 있어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공연의 진행방식은 꽤나 간결하다. 즉석에서 공연 참여를 제안받은 관객들은 공연에 출연하는 유일한 서커스 아티스트인 얀 에코브르(Yann Ecauvre)의 지도하에 (어림잡아도 족히 4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 널빤지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거나, 나무 널빤지를 하나씩 차례로 무대 중앙으로 옮겨 눕히며 한층 한층 정사각형의 단을 쌓아간다. 말하자면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거나 나무를 하나씩 정해진 자리에 옮겨놓는 것이 관객이 해야 할 과제의 핵심인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얼핏 간단해 보이는 관객의 움직임이 우리 모두를 매 순간, 적극적으로, 특정한 위험 상황에 노출시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모클레스>에서 시도되는 모든 장면은 사실상 재미있지만 위험하다. 관람 대상으로서의 서커스가 대개 위험하지만 재미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숭고함(위험과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나는 그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지각하는 상태)을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셈이다. 일례로,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무게 또한 상당한 나무 널빤지는 성인 혼자 드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이나 얀 에코브르는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든 널빤지를 붙잡고 있어야 하는 참여자로 다름 아닌 아이들을 선택한다. 아이들 두세 명이 힘껏 붙잡고 있던 널빤지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네댓 명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달려 나와 저마다 손을 보탠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수십 명의 아이들이 한순간 강둑이 터지듯이 사방에서 달려 나오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자칫 사고로 이어질까 조바심에 발을 구르던 어른들까지 합세해 널빤지는 결국 쓰러짐 없이 굳건히 제 자리에 서게 된다.

<다모클레스>의 공연사진. 나무 널빤지를 격자 모양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물 위로 일곱 명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걷는다. 이들을 인도하는 출연자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관객들이 손에 손을 잡고 발밑을 유심히 살피며 걷는다. 주변을 둘러싼 많은 관객들이 이들을 응시한다.

위험의 순간과 그 의미를 포착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로는 공연 후반부에 시도된 밸런싱 장면을 들 수 있다. 서로 손을 맞잡은 아티스트와 참여 관객들은 5단 높이로 쌓인 나무 구조물 위에 올라가 다양한 방식의 밸런싱을 시도하는데, 예를 들어 이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북동쪽과 남서쪽 꼭짓점 방향으로 걸어가며 무게 중심을 상극의 방향으로 분리시키면 그 중심 변화에 따라 나무 단층 구조물의 형상이 일순간 과감하게 벌어지며 마치 낭떠러지에 서 있는 몸들이 당장에라도 나무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은 위기감을 전해준다. 그 위기감은 방금 전까지 낯설게 내 옆에 서 있었으나 이제는 나무 구조물 위에 위태롭게 자리한 채 나의 온 마음을 집중시키는 참여자의 몸을 매개로, 따라서 타인이지만 마냥 타인일 수만은 없는 관계의 이중성에 포박된 어떤 특정한 몸을 매개로 한없이 고조된다. 심지어 얀 에코브르는 공연 마지막 순간에 단층에 올라가 있던 참여자들에게 눈을 감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자 위태로운 구조물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듬더듬 찾아가다가 마침내 땅에 발을 디딘 참여자들이 여전히 구조물 위에 남아 땅으로 이르는 길을 더듬어가던 또 다른 참여자들을 돕기 위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운 그 순간을 마주하며 공동체에 함의된 바, 즉 마음과 정신과 감각의 공유(Gemeinsinn)로서 제시되는 공동체(Gemeinschaft)의 의미와 여전히 지속 가능한 그 힘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된다. <다모클레스>는 공동체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교조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든지 옛이야기 속 인물인 다모클레스처럼 언제 내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 칼자루 밑에 앉게 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자와 타의 피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서사의 자발성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삶의 균형점과 맞닿아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다모클레스>의 공연사진. 나무를 쌓아 올린 구조물의 마주 본 두 꼭짓점에 각 세 명의 관객들이 서 있다. 구조물은 관객들의 무게로 인해 본래의 평형 상태를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왼편에 선 세 명의 관객들이 구조물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 중이며, 출연자가 그들을 돕고 있다. 오른편에 선 세 명의 관객은 염려 섞인 표정으로 왼쪽의 관객들을 바라본다.

혼둘 혼둘

<다모클레스>가 위험과 위기의 조건을 전제하는 동시에 예술가와 참여 관객 사이를 넘나들며 점차 안정과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혼둘 혼둘>은 무대에 선 두 명의 서커스 아티스트 이석원과 서남재가 두 종류의 서커스 도구를 매개로 균형상태에서 불균형상태를, 반대로 불균형상태에서 균형상태를 끊임없이 추동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하나 둘 셋 넷’으로 이어지는 단선적 리듬을 ‘하나 둘 하나 둘’이라는 차이와 반복의 상태로 환원시키는 이 작품은 하나와 둘 사이에서, 한 사람의 몸과 두 사람의 몸 사이에서 어디로 어떻게 이행될지 모를 움직임의 예측 불가능성을 창작의 중심에 놓는다. 신체와 도구가 매 순간 발생시키는 움직임의 속도나 각도는 완전하게 계획될 수 없기에 위태로운데, 그 위태로움을 잠재우기 위해 두 아티스트는 때로는 손을 맞잡음으로써 때로는 멀리 떨어져 서로의 무게를 지탱함으로써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 나간다. 프로그램에 게재된 이번 작품의 메인 소개 문구는 다음과 같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흔들림 속에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 같은 작품의 시작점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혼둘 혼둘>에는 원통(롤라볼라)과 사각의 철제 프레임(이중 프레임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서커스 도구인 저먼휠을 연상시키기도 하는)이 주요 기예 도구로 등장하며, 반드시 두 사람의 몸이 함께 작용해야만 실현 가능한 장면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한 양상으로 배치된다. 가령, 사각 프레임의 경우에는 원형인 휠과는 달라 프레임 자체를 움직이는 동시에 그 위에서 기예를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사람의 협업이 필요하다. 프레임 전체를 밀거나 잡아당기는 움직임과 그 위에 올라가 매달리거나 똑바로 서는 움직임은 사각이라는 도구의 특성상 분리된 상태로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프레임의 움직임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파트너의 숙련된 기술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통 위로 뛰어 올라간 두 아티스트가 한 손을 맞잡은 채 각자 바깥을 향해 몸을 뉘며 완전한 대칭 구도를 이룰 때의 조화란 ‘서로’라는 상태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있지 않다면 발생 불가능하다.

<혼둘 혼둘>의 공연사진. 두 명의 출연자가 사각의 철제 프레임을 이용하여 기예를 펼치는 중이다. 사각 프레임은 한 꼭짓점만 바닥에 닿은 채 비스듬한 모양이고 오른편 상단의 꼭짓점에는 한 명의 출연자가 오른팔과 다리로 프레임을 잡고 윗면으로 올라가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왼편 아래의 꼭짓점에서 프레임을 잡은 출연자는 두 팔로 프레임을 잡고 몸의 중심을 낮추고 있다.

이처럼 <혼둘 혼둘>을 통해 아티스트들이 시도하는 서커스적 상태란 균형의 정도를 불문하고 타인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균형을 잡을 때도, 역으로 무너뜨릴 때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신체와 도구의 움직임 역학을 충실히 찾는다. 도움의 주체로서가 아닌, 서커스적 순간의 완성을 위한 조건으로서 타인을 요청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서커스를 완성하기 위해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인, 따라서 서로를 ‘마치 자기 자신처럼 친숙한 타인’이라는 이중성 안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관계가 완성보다는 미완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원통에 가까스로 오른 네 다리는 쉴 새 없이 후들거리고, 극도로 긴장된 두 사람의 표정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원통을 등에 진 채 사각 프레임의 한 면을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가도 도저히 오르기 힘든 순간에는 손을 내저으며 올라간 높이만큼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내려오기도 한다. 하나와 둘 사이를 오가던 미완의 서커스. <혼둘 혼둘>은 어쩌면 흔들림과 안정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 서커스의 이면, 그 믿음직한 생경함을, 무대를 둘러싼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연의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문득 클루게가 떠올랐다.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 알렉산더 클루게는 재작년 출간한 <서커스 코멘터리(Zirkus Kommentar)>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서커스의 이념으로 다름 아닌 “진짜의 원리(das PRINZIP ECHTHEIT)”를 언급한 바 있다. 무엇이 진짜인가. 진짜 삶이란, 진짜 서커스란 무엇인가. 진짜는 무엇에서 발견되거나 발현될 수 있을까. 어쩌면 <혼둘 혼둘>은 그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잠재적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혼둘 혼둘>의 공연사진. 두무대 위에 원통이 세워져 있고 두 명의 출연자가 원통 위에서 마주 본 채 서로 오른손을 맞잡고 투명의자 자세로 균형을 잡고 있다. 그들의 뒤로 이들을 지켜보는 많은 관객들과 북악산이 보인다.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2023 서울서커스페스티벌
인엑스트레미스트 <다모클레스>, 231과 서남재 <혼둘혼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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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옥주

손옥주 공연학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 무용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무용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포스트닥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현재 학술 연구와 동시에 리서치 파트너와 드라마터그로 공연 현장에서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춤의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은 서로 맞닿아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춤을 닮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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