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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여 보자, 좋아요 없이

신촌문화발전소 창작과정지원
<아나킥 쿼텟 Anarchic Quartet: 4 weeks improvisation performance>

권나은

제234호

2023.05.25

‘내가 추는 춤을 모두 따라 춰, 매일 너의 알고리즘에 난 떠’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노래 <Kitsch>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이 소절이 밀레니얼 혹은 Z세대의 마음을 표상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유튜브나 틱톡에서 ‘댄스 챌린지’를 구경하면, 만국의 젊은이가 춤에 몰두한 것 같다는 착각이 올라온다. 하입보이 챌린지, 아디아디아디 챌린지, 꽃 챌린지, 가나다라 챌린지, 새삥 챌린지, 제로투 챌린지, 퍼센트 챌린지, 버터 챌린지… 정신없이 알고리즘을 따라가는 도중, 화면 안의 인물들은 모니터 바깥으로 걸어 나와 말을 건다. “너도 해봐. 이제는 네 차례야.”

춤을 좋아한다. 웬만한 아이돌 안무 커버, 스테이지 믹스, 댄스 챌린지 영상은 다 찾아본다. 방에서 홀로 볼륨을 높이고 안무를 따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챌린지’를 시도해 본 적은 없다. 불특정 다수 앞에 뭔가를 내놓으려면, 기량이 뛰어나야 한다는 막연한 강박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을 올리면 누군가는 이 결과물을 평가할 텐데, 나는 무용을 배운 적도 없고, 이 분야에 별 재능이 없다. 평가를 우회하기 위해, 나는 은자의 낯빛으로 춤을 춘다. 대신 내 SNS 피드에는 비평, 에세이, 일기 따위가 전시된다. 내 직업은 비평가/작가이고, 글쓰기는 춤추기보다 자신 있는 활동이니까. 글쓰기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별로 부담스럽지 않으니까. 이런 의심이 든다. 소셜 미디어는 나를 진정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인가?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데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적다. 자유는 애초에 추상적인 개념이기에, 물질이나 제도로 환원하여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가 그리는 자유의 상(像)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혼란에 빠진 범부들은 자유로워 ‘보이는’ 길을 택한다. 일단 자유로워 보이기만 하면, 대충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워 ‘보이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타인의 승인이다. <Kitsch>의 화자는 ‘우리만의 자유로운 nineteen’s kitsch’를 외치지만, 동시에 타인의 ‘like(승인)’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신한다. (올려 대는 나의 feed엔 like it, 홀린 듯이 눌러 모두 다 like it)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이용자들에게, 이곳엔 아무런 제약도 규칙도 없으니, 너의 자아를 마음껏 확장해도 좋다고 속삭인다. 중생들이 드러낼 수 있는 건, 어떤 의미로든 ‘like’를 확보할 수 있는 요소들뿐이다.

<아나킥 쿼텟>의 공연 사진. 검은 배경에 김바리와 주나모의 뒷모습이 보인다.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정자세로 서 있다. 분홍색 반소매 상의를 입은 김바리가 오른쪽에 검은 반소매 상의를 입은 주나모가 왼쪽에 위치했으며, 김바리가 한 발짝 정도 앞에 있다. 두 사람 모두 두피가 보일 만큼 머리칼이 짧다.

얼마 전 신촌문화발전소에서 무용가 듀오 바리나모의 작업 <아나킥 쿼텟>을 관람했다. 오랜만에 유튜브/틱톡 화면 속 고수들이 아닌, 지척에서 생동하는 인간이 보고 싶었다. <아나킥 쿼텟>은 무용수 두 명, 뮤지션 두 명이 ‘쿼텟(Quartet)’을 형성하여, 아무런 규칙을 정해두지 않고 1시간 동안 협연하는 작업이다. 바리나모의 김바리와 주나모가 고정 무용수이며, 뮤지션은 매회 바뀐다. 퍼커션과 대금(1회차), 드럼과 피아노(2회차), 일렉기타와 전자음악(3회차), 색소폰과 타악기(4회차). 쇼츠와 릴스에 중독돼 팝콘 브레인이 된 나는, 처음에 공연 정보만 듣고, 이러한 기획마저 일종의 ‘챌린지’ 같다고 느꼈다. <1시간 동안 친구들이랑 멈추지 않고 춤추기> 따위의 부박한 섬네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공연 전날, 신촌문화발전소에서 문자가 왔다. “공연 중 개인 휴대전화를 이용한 촬영이 가능합니다”. 문자를 받고 놀랐다. 대부분의 극장은 휴대전화를 비롯한 모든 전자기기를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이다. 공연 업계 종사자들은 공연장 내·외부의 미묘한 소음, 빛,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변수가 발생하면, 공연에 대한 관객의 몰입이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이는 관객을 배려하는 처사인 동시에, 작품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작품/실연자와 관객 사이의 위계가 희석되면, 작품/실연자의 가치가 하락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엄한 분위기가 어울리는 공연도 있으니, 공연장에서의 규율과 규제 자체를 조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작품/실연자를 지나치게 신격화하다 보면, 관객 스스로 위계질서를 내면화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뮤지컬 계의 ‘시체관극’ 악습이다.

작업자가 변수에 민감하다는 건, 드러낼 수 있는 모습과 드러낼 수 없는 모습을 의식적으로 구분한다는 의미다.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환경을 단속하는 것이다. 댄스 커버 영상이나 챌린지 영상도 마찬가지다. 챌린지 영상은 관객(시청자)의 사전 개입을 전면 차단하며, 애초에 모든 세팅과 편집을 끝낸 상태로 관객(시청자)을 만난다. 관객은 실연자가 실수하거나 망설이거나 박자를 놓치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는 실연자의 ‘빛나는’ 모습만을 목도한다. 관객과 실연자 사이에는 옅은 수준의 위계가 형성된다. 일반인이 연예인/인플루언서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일관되게 반짝이는 연예인/인플루언서는, 늘 반짝이지는 않는 ‘자신’과 대조된다.

<아나킥 쿼텟>의 공연 사진. 댄스 듀오 바리나모 두 사람이 춤을 추고 있다. 김바리는 왼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대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 채 오른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움직이는 중이다. 그의 왼쪽에는 뒤돌아 어깨를 잔뜩 굽힌 채 움직이는 주나모가 있고, 뒤편으로 커다란 앰프가 보인다.

공연 당일, 반신반의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나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공연을 보며 알았다. <아나킥 쿼텟>은 권위를 사수하려는 공연이 아니므로, 변수를 통제할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을. 즉흥 무용과 연주가 가능한 이유도 이와 같다. 대부분의 퍼포머에게, 즉흥 공연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변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각적으로 춤을 추면,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동료와 몸이 부딪힐 수도 있고, 음악 연주와 몸의 움직임이 어긋날 수도 있으며, 하고 싶은 동작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리나모는 무대 위에 ‘그냥’ 선다. 현존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변수마저 즉흥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바리나모는 사전 약속을 하지 않는다. 구간별로 어떻게 움직이겠다거나, 어떻게 연기하겠다는 식의 협의를 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현재에 집중한다. 바리와 나모는 무대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바닥에 눕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상대방을 밀거나 당기기도 하고, 쓰다듬거나 업기도 한다. 바리는 별안간 극장 벽면의 벽돌을 잡고 클라이밍을 한다. 나모는 무대를 뛰어다니다, 프레임을 벗어나 객석으로 향한다. 바리와 나모, 연주자들은 서로의 의식에 자유롭게 개입한다. 조명 역시 즉흥으로 구성된다. 조명은 바리와 나모의 정동, 음악의 정조를 따라가며, 서서히 바뀐다. 초록빛, 푸른빛, 붉은빛. 바리와 나모는 다시 빛과 색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움직임을 창조한다. 육십 분이 금방 흐른다.

<아나킥 쿼텟>에는 리더나 팔로워 개념이 없다. 연주자들과 바리, 나모는 실연자인 동시에 (서로의) 관객이다. 2회차 공연에서, 바리는 한참 동안 무대 구석에 서서 허공을 바라본다. 이후 드럼 연주가 시작되자, 어떤 자극을 받은 사람처럼 팔과 다리, 척추를 움직인다. 드럼 연주자는 피아노 연주자에게 영향을 주고, 피아노 연주자는 나모에게 영향을 준다. 3회차 공연에서는, 전자음악이 일렉기타에 말을 걸기도 하고, 일렉기타가 전자음악에 반응하기도 한다. 바리는 전자음악을 의식하며 한참을 제자리에서 회전한다. <아나킥 쿼텟>의 퍼포머와 퍼포머, 퍼포머와 관객 사이에는 인력, 척력이 작용한다. 퍼포머와 관객은 서로에게 바람, 바위, 나무와도 같다.

<아나킥 쿼텟>의 무대 전체 사진. 파란 조명이 비치는 무대 중앙에 주나모가 두 발을 교차한 채 오른팔을 뒤로 뻗어 움직이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1시 방향에 김바리가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여 춤을 추고 있다. 무대의 왼쪽 뒤편엔 전자음악가 노디가 색색의 전선이 복잡하게 연결된 신시사이저를 연주하고 있으며, 무대의 오른쪽 벽 앞에서는 기타리스트 이태훈이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그 옆에 커다란 앰프가 보인다.

즉흥(卽興)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는 흥취’를 의미한다. ‘그 자리’란 퍼포머 개개인이 현존하는 무대를 말한다. 무대는 비어 있지만, 이들은 파동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이 울면 나도 울게 된다. 다른 사람이 웃으면 나도 웃게 된다. 다른 사람이 노래하면 나도 노래하게 된다. 인간은 ‘나’에 몰두하지 않을 때,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아나킥 쿼텟>을 보고 나오는 길에, 신촌 지하철역까지 춤을 추며 걸었다. 며칠 뒤 아침 출근길에서도, 헤드폰을 끼고, 중간중간 리듬을 탔다. 누군가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아이돌 안무를 남몰래 따라 하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스스로 즐거우면 그만인데, 너무 많은 걸 복잡하게 고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누가 뭐라건, 앞으로는 더 자주 리듬을 타며 걷겠다고.

<아나킥 쿼텟>의 공연 사진. 바리나모가 바닥에 누워 춤을 추고 있으며, 플로어에는 분홍빛 조명이 가득하다. 주나모는 등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들어 올리는 자세다. 그의 가슴 위로 상체를 기댄 김바리는 왼 다리를 바닥에 쭉 펴고 오른 무릎을 살짝 접고 있으며, 고개를 뒤로 꺾고 오른팔을 쭉 뻗고 있다.

[사진 제공: 신촌문화발전소]

신촌문화발전소 창작과정지원
<아나킥 쿼텟 Anarchic Quartet: 4 weeks improvisation performance>
  • 일자 2023.4.15 ~ 5.6 (매주 토요일)
  •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 콘셉트/연출 바리나모 김바리, 주나모 음악 김선기, 백다솜, 송준영, 김은영, 이태훈, 노디, 이선재, 심운정 프로듀서 이보라미 조명감독 서가영 음향감독 김용석 조명어시스턴트 김아연 그래픽디자인 김솔 주최 신촌문화발전소 주관 바리나모
  • 관련정보 https://www.scas.or.kr/kr/program/program_view.php?idx=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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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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