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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안 되기

<세일즈맨의 죽음>

진송

제235호

2023.06.15

리뷰에 앞서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제목에 대한 나의 편견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털어놓을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극의 제목에서부터 분명히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극을 보지 않고 미리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 분명하겠으나,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로 사전에 훑어본 각종 SNS에 지천으로 깔린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대한 극찬들은 나를 불쾌하게 만듦과 동시에 극의 줄거리를 대강 상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희곡과 관련된 포스트나 유튜브 영상, 그리고 그에 달린 댓글들은 하나같이 한평생을 가정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의 숭고한 노동에 대해 찬미하고 있었다. 나는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자본주의에 대한 한풀이와 가부장을 비극적 영웅으로 은밀히 고양시키는 이런 종류의 ‘아빠도 인간이다’ 스토리들을 볼 때마다 이들이 사실 아버지를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희생할 때 가장 비극적이고 숭고하며 심지어는 영웅적일 수 있으므로. 가부장제에서의 전능함이라는 환각이 남성으로 하여금 착취를 계속해서 견디게 하는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 사진. 회색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윌리 로먼이 한탄스러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우측 뒤편으로 검은색 조끼와 바지를 입은 찰리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 관람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가족을 위해 평생 희생했으나 초라한 끝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극이 아니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 등장하는 아버지 윌리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윌리 그 자신의 영웅적인 결말을 위해 가족들의 삶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비극으로 몰아간다. 사회에서는 퇴직을 눈앞에 둔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늙은이일 뿐인 그가 가족들과는 격렬한 갈등을 빚으며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비참하게도, 윌리의 가족들- 장남 비프, 차남 해피, 부인 린다 -이 그에게 가부장의 자리와 함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애정의 자리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윌리가 세일즈를 시작하던 무렵의 세상은 그가 미식축구 구장에서 비프의 모습을 ‘헤라클레스 같은, 태양 같은 젊은 영웅’이라고 묘사했던 바, 자연의 무궁한 후광을 띤 영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엇갈려 가고 있던, 아니 저물어 가고 있던 시대였다. 윌리의 형 벤은 알래스카로 떠나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해 큰 부자가 되었지만, 윌리는 세일즈맨의 길을 선택해 당근 씨앗 하나조차 제대로 싹트지 못하는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자연에서 얻은 것들로 위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듯 윌리는 아들들과 함께 공사장에서 훔쳐 온 건축 자재들로 현관 계단을 새로 짓고 천장을 높이는 등 일종의 영웅적 ‘개간’을 시도하지만, 보스턴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행동은 좀도둑질에 불과할 뿐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 사진. 2층 가정집을 옮겨놓은 듯한 무대에 윌리 가족들이 모여 윌리를 바라보고 있다. 무대는 집의 구획을 나누는 정강이 높이의 단, 침대 구역을 나누는 세 계단 높이의 단과, 2층 침실로 구성되어 있으나, 해당 장면에서는 공간의 구분이 없다. 왼쪽부터 비프와 린다가 나란히 앉아 있으며, 중앙에 놓인 의자에는 벤이 왼손으로 우산을 짚고 앉아 있으며, 그 오른편에는 해피가 바닥에 앉아 있다. 가장 오른편에 서 있는 윌리는 두 손을 가슴께에 올려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나이가 예순이 넘었으나 ‘아직’ 영웅이 되지 못한 윌리는 자신의 아들들, 특히 장남 비프가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삶에 영웅의 그림자를 드리워주기를 강요한다. 윌리가 상상 가능한 비프의 영웅적 모습이란 ‘성공한 사업가’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슬프게도 아들을 자신의 분신마냥 아끼고 사랑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비프, ‘너는 나중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성장한 비프, 그리하여 윌리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들이 되어버린 비프는 ‘더 이상 헤라클레스가 될 수 없는 세계’와 ‘헤라클레스 같은, 태양 같은 젊은 영웅이 되라는 아버지의 요구’ 사이에서 분열하고 절규하며 무너진다. 비프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자기 자신을 책망하기 일쑤다.
비프는 결국 아버지의 말에 따라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자 마음먹고 사업 자금을 빌리러 가지만 실패하고, 윌리 역시 세일즈 회사에서 해고되며 ‘세일즈는 최고의 (영웅적) 직업이다’라는 마지막 자기암시까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후 발생한 윌리의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 자살은 영웅으로 남기 위한 최선의, 아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이기적인 영웅―되기의 시도다. 그는 가족들에게 2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보험금을 남기고 마치 자신의 삶이 2만 달러만큼의 가치를 지녔다는 듯이, 혹은 그 2만 달러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이 어딘가에 숨겨 두었던 사업 자금이었다는 듯이 뿌듯하기 그지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장례식에는 가족들을 제외하면 조문객도 없고,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말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 사진. 무대 중앙에 흰 테이블 보가 깔린 정사각형의 식탁이 있고, 각자 회색, 붉은색, 파란색 정장을 입은 윌리와 해피, 비프가 앉아 있다. 비프는 마주 앉은 윌리를 향해 상체를 숙여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윌리는 객석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가운데 자리에 앉은 해피는 테이블을 바라본다. 보다 높은 집의 침대 구역에서는 하늘색 원피스에 흰 가디건을 입고 흰 앞치마를 두른 린다가 이들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른편 집의 출입문 부근에는 회색 베레모를 쓰고 갈색 줄무늬 상의와 회색 바지에, 갈색 니삭스를 신은 버나드가 린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딴 영웅놀이는 남자들이나 하는 바보짓이야’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 문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실상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웅이 되는 것이 가능하던 시대는 한참이나 지났다. ‘훌륭한 사람’ 정도로 단어를 약화시켜 말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에 가면 영웅인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가도 그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만 명이 넘게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회사에 취직하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인생인가? 최소한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들도 일주일에 5일 이상 출근을 하며 주말이 되면 쉬기 바쁘다. 아니면, 일촉즉발의 재난을 막아낸 시민을 ‘영웅’이라고 부르며 공공 안전의 공백을 가리기 바쁜 매스컴의 속셈에 속아 넘어갈 생각인가? 혹은 ‘우리 모두는 영웅입니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수사적 장난을 공익 광고 밖에서도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지금 대학원 생활과 아르바이트, 각종 비평 활동과 개인적인 공부를 병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직업으로서의 비평가를 부정하거나 지나치게 겸양적 태도로 비평가라는 직업에 임하는 문화에 대한 반항심으로 (나 스스로도 나 지신이 비평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나의 직업은 비평가’라고 말한다. 조금 구구절절하긴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단단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나의 존재는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분명 쪽팔린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여기서 조금 더 훌륭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언젠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도 글쓰기만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언젠가는 학계에서 인정을 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누군가는 내가 소위 ‘예술충’이라 불리는 불안정한 생활을 접고 적당한 때가 되면 규칙적인 임금을 받는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되어야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자랑스레 설명하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의 영예를 물려받는 것이 가능하던 시대는 한참이나 지났다. 아니, 점점 다른 방식으로 그 경첩이 맞물려 넘어가고 있다. 내겐 물려받을 수 있는 것도 되돌려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절규하고 무너지며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나 싶다. 내 손에 영예를 물려주고자 하는 이들의 사랑을 배반하며, 아무것도 되지 않고 그저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나의 삶의 방식대로 현재의 삶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 사진. 무대의 가장 낮은 단에 윌리 가족이 서 있다. 왼편부터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 티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은 해피, 원피스와 가디건, 앞치마 차림에 커다란 라탄 바구니를 품에 안은 린다, 흰 와이셔츠와 회색 정장 바지를 입은 윌리, 빨간색과 남색 줄무늬 티셔츠에 옅은 갈색 바지를 입고 양손으로 럭비공을 쥐고 있는 비프가 서 있다. 해피와 린다는 윌리를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고, 윌리는 양손을 골반 께에 올리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비프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윌리를 바라본다.

[사진 제공: (유)쇼앤텔플레이]

<세일즈맨의 죽음>
  • 일자 2023.5.21 ~ 6.7
  •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 원작 아서 밀러 연출 신유청 출연 박근형, 예수정, 성태준, 이형훈, 김동완, 윤상훈, 신현종, 김보현, 박민관, 김유진, 이찬렬, 우가은, 이예원, 박승재 프로듀서 전용석, 조한성 번역 김진숙 움직임 이소영 무대디자인 최영은 조명디자인 강지혜 음악/음향디자인 지미 세르 의상디자인 홍문기 소품디자인 최혜진 분장디자인 정지윤 무대감독 박새봄 부무대감독 박보영 제작감독 김동은 기획PD 김수지 컴퍼니매니저 이나연 기획/제작 (유)쇼앤텔플레이, (주)YM스토리
  • 관련정보 https://www.ntok.go.kr/kr/Ticket/Performance/Details?performanceId=26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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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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