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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라는 ‘자기 말하기’의 방식, ‘마포 로르’라는 자기 말하기의 방식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풀이 연습: Practice of –free>

진송

제239호

2023.08.10

<풀이 연습: Practice of –free>(이하 <풀이 연습>)은 형식적으로 몹시 특이한 공연이었다. 마포 로르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 놓으며 이야기 사이사이에 관객들에게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었던 본 공연은 단순한 판소리 공연을 넘어서 서사를 지닌 연극처럼 보이기도, 삶의 주인공인 마포 로르 본인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삽입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풀이 연습>은 그 모든 형식적인 틀에서 한 발짝 벗어나 ‘풀이’ 그리고 ‘연습’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개인의 서사를 선형적인 방식으로 재현하기보다 마포 로르의 목소리를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풀어 놓는 데 집중하며 자기 재현의 색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풀이 연습>의 공연 사진. 끝동이 빨간 노란 저고리와 트라이벌 무늬 원단으로 만든 주름 치마를 입은 소리꾼 마포 로르가 부채를 접어 양손으로 가볍게 쥐고 소리를 하고 있다. 레게 머리를 한 그는 가볍게 웃는 표정이다. 무대 뒷벽에 시김새를 표시한 판소리 가사 “일년 삼백육십오 일 시간없고오오오~~”가 자막으로 영사되고 있다.

<풀이 연습>의 주인공인 소리꾼 마포 로르는 카메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뒤 한국에 와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예술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이토록 국경을 넘나드는 삶의 궤적을 지닌 소리꾼 마포 로르는 무대 위에서 판소리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대신에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다. 말뿐만 아니라 ‘소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들려주는 춘향가의 한 대목 <쑥대머리> 역시 이 도령을 그리는 춘향을 그리는 옥중가에 그치지 않고, <쑥대머리>의 구성진 가락을 듣고 처음 판소리에 반하게 되었다는 그의 삶의 맥락을 거쳐 관객의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마포 로르는 춘향가의 또 다른 대목 <사랑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과감하게 프랑스어 가사를 덧붙인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관객들에게 마포 로르의 노래는 한편으로는 수수께끼처럼, 한편으로는 언어적 해석을 거치지 않은 마포 로르의 목소리로서 더욱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처음 <쑥대머리>를 듣고 판소리의 강렬한 예술적 역량에 정동하였던 한때의 마포 로르에게 판소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프랑스어로 번안된 <사랑가>는 알지 못하는 언어인 채로 입속을 구르는 언어들의 울림 ― 아마도 ‘사랑’을 의미할 그것을 날 것으로 풀어 놓으며 마포 로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을 그 목소리를 끌어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달되는 소리의 강렬함이 가장 두드러진 순간은 공연의 말미에서 마포 로르가 선보인 창작 판소리 <카메룬 두알라 나의 고향>이었다. 그는 한국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로이 오가며 고향 카메룬의 풍경과 그곳에 있던 노란 망고나무에 대해 노래한다. 마포 로르는 “고개 돌려 둘러보니 싯노란 뱀이랑 눈이 딱!”과 같은 재미있는 가사와 개구진 표정으로 관객을 압도하며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다가도, 문득 이야기의 선형적인 흐름을 거부하는 우렁찬 목소리로 고향에 대한 ‘소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가 범람하며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서, 나는 스크린에 영사된 카메룬의 풍경과 망고나무의 노란 빛깔을 보며 자연스레 그 노란 빛과 그것의 진하고 달콤한 향기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풀이 연습> 공연 사진. 무대 가운데에 망고를 닮은 둥근 노란 카펫이 깔려 있고, 수어 통역사와 마포 로르가 각각 스툴을 두고 앉아있다. 오른쪽에는 검은 옷을 입은 악사 세 명이 마포 로르를 바라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악사들의 사이사이로 철현금, 해금, 셰이커, 대금이 보이고, 관객석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고수는 마포로르의 치마와 같은 원단 위에 소리북을 얹어두었다. 사진의 가장자리에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모습이 조금 보인다.

<풀이 연습>은 전통 음악 장르인 판소리가 국경을 넘나드는 정체성을 지닌 한 청년에 대한 훌륭한 자기 재현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서사의 진행과 그 특성에 맞추어 가사와 아니리, 음악, 몸짓의 진행이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되어 있는 판소리 형식은 <풀이 연습>을 통해서 자유롭게 변용되었다. <풀이 연습>을 통해서 시도된 그러한 변용은 감히 말하건대 다른 어떤 목소리가 아니라 마포 로르라는 소리꾼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카메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자라고, 한국에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있는 마포 로르의 특수한 조건들을 경유하지 않았더라면 판소리를 통해 프랑스어로 카메룬의 풍경을 노래하는 <풀이 연습>의 형식은 고안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풀이 연습>의 형식적인 독특성은 그 형식의 독특성뿐만 아니라 독특한 형식을 가능하게 한 특정한 말하기의 조건, 즉 ‘마포 로르’라는 소리꾼과 그의 소리를 형식에 겹쳐 둘 때 비로소 그 잠재력을 풍부하게 향유하게끔 한다.
<풀이 연습> 공연 도중에 여러 번 반복되었던 대사인 “판소리, 참 어려워요”를 이쯤에서 다시 떠올려 본다. 판소리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말할 때도, 판소리를 훈련받던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도, 공연 중에 관객의 도움을 받아 사자성어 퀴즈를 풀 때도 반복되었던 그 정해진 대사이자 마포 로르의 목소리 말이다. “판소리, 참 어려워요”라는 말이 반복될 때마다 그 대사를 공연장에 풀어 놓는 마포 로르의 얼굴은 활짝 웃는 미소로 가득했다. “판소리”의 자리에 “삶”이나 “자기 말하기” 등의 다른 단어를 위치시키는 것을, 즉 판소리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웃음은 연신 ‘저는 판소리를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 미소는 묘하게도 <풀이 연습>에서의 ‘마포 로르’를 다른 무엇으로도 바꿔 쓸 수 없게 한 것과 같은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판소리를 ‘자기 말하기’의 방식으로, 또 ‘마포 로르’라는 자기 말하기의 방식을 판소리로 구현해 낸 마포 로르에게 찬사를 보내며, 나 역시 그날 공연장에서 마포 로르의 목소리를 통해 본 노란 빛깔 망고나무에 그리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말을 남겨 두고 싶다.

<풀이 연습>의 공연 사진. 마포 로르가 무대 가운데 스툴에 앉아 소리를 하고 있다. 무대 뒷벽에 시김새를 표시한 프랑스어 가사 ‘Quel atroce destin, que celui-là’가 영사되고 있다. 그의 왼편으로 수어 통역사가 보이고 사진의 가장자리에 어렴풋이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출처: 한국종합예술학교 공연전시센터]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풀이 연습: Practice of -free>
  • 일자 2023. 7. 21 ~ 7. 23
  • 장소 공간서로(서울시 종로구 청운효자동 필운대로 7길 12)
  • 출연 마포 로르(Mafo Laure) 구성, 작사, 연출 강보름 기획 김서희 작창, 음악감독 안준서 악사 신지민, 이정인 작사 김현원, 허진경 무대디자인 서현제 조명디자인 박혜림 영상디자인 장주희 의상디자인 이윤진 그래픽디자인 박혜빈 무대감독 박한서 수어통역 남진영 판소리 자문 이유정 영상 오퍼레이팅 남혁준 기술지원 아파랏/어스(심우섭, 유성식)
  • 관련정보 https://www.ieum.or.kr/user/show/view.do?idx=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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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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