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예견된 비극과 그걸 바라보는 운명

극단 송곳 <도비왈라: 빨래하는 사람들>

김은한

제240호

2023.08.24

1년째 전업 공연예술인으로 살고 있다. “꿈을 이루셨군요!”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오랜 근무처에서 나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루던 특수한 기기가 수명을 다했고, 회사는 대신에 새 기기를 사용하는 다른 팀에게 일을 맡겼다. 그 뒤로 몇 명이 더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덕분에 실컷 공연을 만들고 있다. 조기 은퇴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른 시일 내에 겸업 공연예술인으로 돌아가는 게 이로우리라. 가능하다면.

공연은 즐거우니까 한 해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시간은 여유로운데 마음이 여유롭지 않은 이상한 시절이다. 연극 관람 횟수도 부쩍 줄었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고,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좋아한다. 부조리든 초현실주의든 엉뚱하게 달려나가는 작품을 보면 그 또한 삶 같아서 즐겁다. 물론 막막한 현실도 삶이기에 그런 연극도 찾고 싶어질 때가 있다. <도비왈라>는 그런 의미에서 계속 마음이 쓰이는 작품이었다. 공연소개를 읽으며 스멀거리는 느낌. 초반 몇 분을 지나면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다음은 예견된 비극을 마주할 뿐이다. 극장의 공기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 주인공은 끝없이 고통받고 꿈은 깨집니다. 돌이킬 수 없는 테러 행위에 가담할 것이고 배신당하고 좌절한 나머지 죽게 될 겁니다. 결말에는 자그마한 희망이 마련되어 있으나 그건 살아있는 이의 것이며, 한밤에 빛나는 짐승의 눈처럼 작고 희미합니다. 가족은 무너지고 공동체는 붕괴하고 신뢰는 없으며 위험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들의 상처는 절대로 아물지 않을 겁니다….

<도비왈라>의 공연 사진. 무대 뒷면에 다양한 색과 패턴의 옷과 천들이 가득 걸려있다. 
            그 앞에 놓인 긴 큐빅도 색색의 천들로 덮여있는데,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프리타가 책을 펼쳐 들고 앉아있다.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프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바라본다.

‘도비왈라’는 빨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야외 빨래터인 ‘도비가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부르는 말이다. 카스트 제도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불가촉천민 ‘달리트’ 출신이 많다고 한다. 무대는 뭄바이의 도비가트. 정치인이 객석 가까이에서 나긋하게 연설한다. 궁핍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해 금의환향한 인물이다. 인도의 개혁을 부르짖던 사내는 객석과 무대를 나누는 빨래 더미를 넘어 무대 깊숙이 들어간다.

실파와 프리타는 자매이다. 라훌은 어린 시절 함께 한 친구이다. 라훌은 곧 좋은 교육을 받고 언젠가 정치권에 입문하기 위해 떠난다. 이를 위해 라훌의 아버지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다. 실파는 빨래 노동자로서 가업을 잇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걸 포기해야 한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다. 숙명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프리타는 총명한 막내로 꾸준히 학업을 이어가지만, 학교야말로 계급에 민감한 잔혹한 곳이다. 달리트라며 따돌림 당하지만, 언니에게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아주 잠시 망상한다. 이야기의 끝을. 인도에서의 성공담을 다룬 유쾌하고 심각한 영화들을 떠올린다. 누가 살아남지?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비왈라>의 공연 사진. 빨래 바구니와 다리미판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다리미판 앞에 선 남성이,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한 손으로 곱게 접힌 흰 바지를 오른편의 남성에게 건넨다. 
            오른편의 남성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바지를 받기 위해 양팔을 내밀고 있다.

그런 기대는 빠르게 무너진다.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도비가트로 돌아와 실파에게 기쁘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라울. 내가 모시는 어르신께서 무상으로 이 지역에 세탁기를 보급하실 거야. 너희는 이제 고생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너무 오래 고민하면 안 돼. 빨래터는 여기뿐만이 아니니까. 의견은 갈라진다. 무언가가 들어온다는 건, 곧 더 많은 무언가가 들어와 삶을 밀어내고 배제한다는 말이다. 평생 빨래 일을 해온 장인들은 부정적이다. 때를 벗기고 섬유를 보존하기 위해 오랜 생활 궁리한 발명과 발견. 고유한 기술이다. 하지만 근현대사는 산업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새로운 기계가 도입되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기계는 빠르고 편리하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거기서 ‘우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손꼽힐지라도. 실파는 여전히 꿈을 꾼다. 찬반 투표에서 승리하면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 지역에서 마약과 세탁세제를 유통하려는 보스와도 능히 결탁할 수 있다. 보스는 라훌의 아버지와 함께 일한다. 라훌이 모시는 어르신, 인도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정치인을 위해서.

<도비왈라>의 공연 사진. 프리타와 라훌이 마주 보고 서서 악수하듯 오른손을 어깨높이에서 맞잡고 있다. 
            프리타는 화려한 무늬의 엉덩이를 덮는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었고, 라훌은 흰색 블라우스와 정장 조끼, 정장 바지를 입어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프리타는 미간에 힘을 주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배우의 연기가 풍부하고 몰입감을 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은 모든 인물이 죄를 범한다는 점도 즐거웠다. 영미권이 아닌 외국을 한국의 무대에 들여올 때 연출이 종종 과해질 때가 있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도비왈라>는 이국적인 음악과 움직임을 적절하게 조절해 극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무대 위 세계를 끌어냈다. 작품과는 동떨어진 고민도 들었다. 다큐멘터리 요소를 도입한 범죄 실록의 재구성 같은 점, 마약과 자본가의 음모에 휘말리는 주연 인물들의 군상극 같은 점, 특수한 환경의 생활상보다는 범죄 스릴러에 중심을 둔다는 점에서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의 자체 제작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연극은 주류 매체와 닮아가고 있을까 멀어지고 있을까? 연극은 관객에게 어떤 것이어야 하나? 잠시 그런 고민을 하게 했다.

연극이기에 가능한 흥미로운 지점도 있었다. 최근에는 예술가가 과격한 폭력묘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살피는 게 즐겁다. 작 중에 자살 등은 안무로 표현되었다. 완곡하게 상황을 전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돌파했다. 결말 부분에서는 현실을 환기하기까지 한다. 프리타가 취하는 행동에 갑자기 정치인과 보스, 라훌은 자신의 캐릭터를 내려놓는다. ‘뜨악!’ 하며 우스꽝스럽게 놀란다. 한숨에 날아갈 듯 익살스럽게 팔을 벌리고 줄 인형처럼 삐걱거린다. 이 부분은 극 전체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전환이라 황당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무대 위 뭄바이 도비가트에서 서울 대학로 나온씨어터로 순식간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슬픔을 잠시 걷어보려는 아득한 시도일 수도 있고 창작진의 비위를 가늠할 수 있는 궁리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상황에서 작품의 비극성을 옅게 만들고 결말과 기분 좋게 연결해서 착지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보였다.

<도비왈라>의 공연 사진. 무대 가운데에 밝은 조명이 비치고, 그곳에 한 남성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코에 가져다 대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 다섯 명의 사람들이 각자 팔을 벌리고 춤을 추듯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인다. 무대 주변으로 옷들이 가득 쌓여 있다.

극장을 나오면 여전히 눈앞에 많은 것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적인 믿음은 허상이었고 노동자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고 사랑은 없고 남은 건 새로운 르네상스, 새로운 흐름이 왔거나 올 거라는 소문. 무언가 자꾸 지워지고 멈추고 낯설어지고 문화가 사라진 터가 관광지가 되고 기회를 가진 몇 사람만 굴뚝 연기의 소용돌이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관객은 잠시 관광객이다. 왜 예정된 비극을 끝까지 바라보게 될까? 으깨진 꿈 이후의 희망을 살펴보아도 좋은 걸까? 마지막 장면은 복잡한 감정을 준다. 빨래로 가득한 뒷벽이 무너지고 나타난 희미한 빛은 정말 희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수많은 빨래터 중 단 하나의 이야기, 눈 앞에 펼쳐진 인생은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비극. 극적인 노력에 박수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건 무력한 일인가? 무력, 자신의 부족한 힘을 안타까워하는 일인가? 아니면 애초에 삶이란 아무 힘도 들일 필요가 없는 일인가? 언제 연극으로 희망을 보긴 했던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도만이 극장에 남아있고 그래서 극장은 멀리 돌아서 잠시 성스러운 곳이 된다. 우리는 질문을 기도문처럼 외는 사람이 된다. 만들어진 슬픔을 목격하면서 저기에 가 있거나 여기 있거나 한다.

[사진 출처: 도비왈라 공연팀 / 강상민]

극단 송곳 <도비왈라: 빨래하는 사람들>
  • 일자 2023.7.27 ~ 8.6
  • 장소 나온씨어터
  • 작·연출 이왕혁 출연 김민혜, 현혜선, 박진현, 이동혁, 전호현, 이홍재, 김범진, 심안나, 김다임 조연출 이창균 조명 강상민 무대 김혜림 의상·그래픽 신은혜 안무 임민정 후원 서울문화재단, 극단 송곳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09493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3년 남은 계획

8~9월 스튜디오 나나다시와 <스탠드업 씨어터> 진행 중
10월 신작 구상 중
12월 지금 아카이브와 코미디 캠프를 궁리 중

정보/문의 인스타그램 @mammothmermaid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