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도 재미도 말고
프로젝트 나우주 <칼럼버스 프로젝트 (Project Column-bus)>
팔도
제246호
2023.11.30
언젠가 친구들과 ‘재미와 교훈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늘 수용자의 입장에 서 왔던 경험을 돌이키며 내린 잠정적 결론이란, 교훈이든 재미든 우연히 발생될 뿐이라서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하려는 의도적인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가르치기와 재미있게 하기, 이는 모든 사기들에서 나타나는 불길한 한 쌍”처럼 느껴진다.1)
하지만 대체 무엇이 재미있는 것일까? 알튀세르는 브레히트 연극의 기능이 “확고부동한 지반을 움직이게 하는 것”,
종국에는 “새로운 관객”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2) 굳이 브레히트까지 가지 않아도 나 또한 관객 안에 (거리라기보다) 차이를 생성하고
활성화하는 연극이 좋다고 범박하게 말해왔던 것 같다.
관객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버리려는 연극, 차이가 아니라 합일을 유도하려는 연극에는 영 흥미가 가지 않는다.
반성
이런 의미에서 세 명의 배우가 세 개의 신문 기사를 세 개의 극(<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A.I. 주토피아>, <선물>)으로 옮긴
옴니버스극 <칼럼버스 프로젝트>는 내게 재미가 없었다.
‘효율이나 생산성보다 인정과 공생을 추구하고 생명을 존중하자’는 교훈에 관객이 그저 “맞아, 정말 그렇지”하고 수긍하기를 원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진부한 교훈과 진부한 동의. 결국 그 끝에 연극과 관객 사이에는 얕은 자기반성과 자기반성하는 자신에 대한 자기만족, 자기긍정만 덩그러니 남아버린다.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직장인으로 추정되는 ‘나’의 독백과 극장의 하얀 벽면 위로 영사되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뉴스로 구성된다.
4평짜리 원룸에서 생활하는 ‘나’는 그곳을 걸어 나오더니 하얀 밧줄 위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움직이면서 자주 꾸는 꿈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벼랑 사이에 걸쳐진 다리 위를 오르는 수많은 이들 뒤에 ‘나’도 줄을 서고 건너가려는 꿈이다.
‘나’는 극 막바지에 밧줄을 자신의 목에 건다. 너무 지쳤다는 ‘나’의 독백은 자살을 암시한다.
이내 ‘나’의 손에 들려있던, 생명 활력, 희망 따위를 상징할 야광 탱탱볼이 바닥에 떨어진다. 극장은 암전된다.
<A.I. 주토피아>는 ‘희망 동물원’에 ‘사장2.0’이라는 A.I.가 도입되면서 쓸모를 잃어버린 인간 사육사의 사정을 그린다.
극 초입에서 영상 하나가 또 재생된다. 갖은 동물 사진들 위로 분홍색 하트가 뿅뿅 솟아오르는 ‘희망 동물원’ 홍보 영상인데, 믿기 힘들 정도로 허술한 만듦새다. ‘사장2.0’ A.I.의 이미지나 무대 위 다른 소품들도 마찬가지다. ‘사장2.0’에 의해 희망 동물원은 결국 인간의 육체노동이 필요치 않은 곳, 동물 냄새가 사라진 곳, 동물들이 영상과 이미지 자료로 아카이브된 후 죽임을 당하는 곳이 된다.
해고되지 않았지만 할 일이 없어진 사육사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 불안하게 울부짖지만 부질없어서, 결국 제 발로 동물원을 나오게 된다.
마지막 극 <선물>의 주인공은 초등학생 ‘은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네진 강아지 ‘선물’이다.
‘은주’는 부모님께 ‘선물’을 받고 처음에는 양껏 사랑해주지만 개학하면서 점차 소홀해진다.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선물’은 결국 은주 어머니에 의해 유기된다.
인형들을 사용해 ‘은주’를 제외한 등장인물을 연기하던 배우는 극 막바지에 갑자기 신문 기사를 오려 붙인 검정색 도화지를 들고 나타나 읽는다.
재기발랄하게 연기하던 배우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눈물이 맺혀있는 것처럼까지 보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린이가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이 강아지인데 아이들 선물용으로 구입된 강아지들이 빈번히 유기된다는 내용의 기사였던 것 같다.
막이 내린다.
내가 기억하는 객석의 공기는 대강 이랬다. 첫 번째 극에서는 모두 침묵, 엄숙.
두 번째와 세 번째 극에서는 간간한 폭소, 훈훈한 미소, 응원, 연민, 수긍, 반성⋯⋯.
나의 철저한 오해였을까? 적당히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로 합의된 듯한 극장 안에서 나는 따분함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고 외롭기도 했다.
연극은 정말 다 같이 교훈을 나눠 가지고 반성하기로 다짐하는 데 만족하려던 건가? 반성하는 ‘우리’를 확인했다고 착각하면서? 그걸로 충분한가?
나만 교훈도 재미도 없었나? 나도 반성해야 했나?
나도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칼럼버스 프로젝트>가 반성하기를 바라는 건가?
사라짐
<칼럼버스 프로젝트>가 “칼럼 속 이야기로 관객을 데려가고자”3) 하기보다 칼럼과 다른, 연극이라는 공연예술장르의 구체적인 조건 안으로
관객을 데려가고자 했다면, 연극 속 재현과 연극의 존재 양식을 칼럼의 그것들과 부딪히게 하고 그 부딪힘 사이에서 관객을 만나고자 했다면
우리 사이에는 교훈도 재미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현실에 대한 얕은 반성도 세상사에 대한 기만적인 관심도 아닌 무언가가. 교훈이나 재미라는 양자택일 안에서 단순히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연극이 칼럼 속 사건과 도덕적 명령들에 휩싸여있는 순간에도 오직 꿈을 거쳐 자신의 내몰린 상황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나’,
내가 필요하지 않냐고 소리치는 사육사에게 어떤 답도 돌려줄 수 없는 ‘호돌이’ 인형과 동물들의 사진,
순진하고 서글픈 목소리로 대변되는 목각인형 ‘선물’의 조형적 움직임 같은, <칼럼버스 프로젝트>만이
보여주기로 선택한 연극적 장치들은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칼럼버스 프로젝트>가 인간과 동물들의 ‘사라짐’을 호소할 때 정말 사라지고 있는 것,
잊혀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이 호소에 동원된 연극적 장치들인지도 모른다.
칼럼 속에서 재현되는 사건과 일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연극이 연극으로서 만들어질 때 무심코 발생해버리는 장치들,
연극의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지는 장치들.
반성하는 것에도 재미를 느끼는 것에도 실패한, 연극에 실망한 한 사람의 관객이, 한 편의 글이, 이것들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교훈도 재미도 아닌 사라짐을 “있게” 할 수 있을까?
[사진 제공: 프로젝트 나우주]
- 일자 2023.11.5
- 장소 예술청 프로젝트룸
- 출연 김나우, 이윤주, 최예나 제작 프로젝트 나우주 기획 최예나 후원 경기문화재단
- 관련정보 https://instagram.com/projectnaujoo
- 마크뱅상 올레, 황재민 역, 「알튀세르에게 연극이란 “허구적 위험”일 뿐인가?」, 『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153.
- 위의 글.
- <칼럼버스 프로젝트> 소개 책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