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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공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

고재열_시사IN문화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웹진 16호

2013.01.17

박타푸르의 아이들
박타푸르의 아이들
  • 많은 사람들이 '대선 멘붕'을 말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셀프 힐링 프로젝트로 네팔을 찾았다. 네팔을 가기에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 사진가 김형욱 씨가 네팔 오지에 짓는 '천 개의 어린이 도서관'에 책을 전달하는 것을 돕는다는 명분까지 확보했다.

    그냥 자연을 보러 온 것이었는데 와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산은 겸손을 가르쳐 주었다. 네팔에서는 5000미터 이하의 산은 산(mountain)이라고 불리지 못했다. 이유는 너무 많아서라고. 6000미터 이상 되는 산이 250 곳이 넘는단다. 8000미터 되는 산 중에서도 9곳은 주봉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로 이름을 얻지 못하고 1봉, 2봉으로 불린다. 주로 3000미터 급 봉우리를 다녔는데 그곳의 이름은 모두 언덕(hill)이었다.

    산을 통해 겸손을 배운다는 말을 절감했다. 2000킬로미터 히말라야 산맥 루트 중에서 내가 밟은 곳은 낮은 히말라야 지역의 20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했다. 네팔은 지난해 방문한 스위스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왜 독일이, 프랑스가, 이태리가 아니라 이들 셋이 각축한 스위스가 평화의 상징이 되었나 싶었는데, 힌두와 불교가 각축하는 네팔이 힐링 성지가 된 이유도 비슷했다.

    독일인과 프랑스인과 이태리인이 각축했던 스위스는 6대3대1이라는 힘의 평형상태를 만들고 그 중재능력으로 국제기구를 유치해 컨벤션 산업을 국가발전의 인프라로 삼았다. 인구 비율에 맞춰 기득권을 배분해 다툼을 막았다. 잉여 군사력은 용병화 해 부의 원천으로 삼았다. 스위스 용병은 프랑스혁명 때 고용주를 위해 끝까지 옥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네팔도 힌두와 불교가 공존하며 8대2 정도의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했다. 그리고 네팔에도 스위스 용병과 같은 구르카Gurkha, 네팔의 소수 부족의 이름, 주로 영국군에서 근무 용병이 있다. 스위스 용병이 유럽 최고, 네팔 구르카 용병이 아시아 최고로 꼽힌다. 그들 역시 공존을 택하고 군사력으로 외화를 벌었다.

    스위스와 네팔은 압도적인 자연으로 유폐된 육지의 섬 같은 곳이다. 그들이 승자독식 싸움을 벌였다면 고립된 그곳에서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스위스 종교개혁 때 내전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전쟁 대신 츠빙글리를 죽였던 것처럼 네팔에서 힌두교도와 불교도, 심지어 마오이스트Maoist, 마오쩌둥의 이념을 추종하는 네팔의 공산주의 정당 까지 공존을 택했다.

    네팔은 국민의 80%가 힌두교도이며 국교가 힌두교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네팔은 불교의 나라다. 그리고 불교여야 한다. 네팔이 힌두교라면 히말라야 로망은 없었을 것이다. 관광이 최대 산업인 네팔에서 힌두교도의 불교도 용인은 바로 부의 원천이다. 불교를 배제하는 것은 네팔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의 화두는 ‘분열’이다. 우리 사회도 대선 표심대로 '51.6 vs 48'의 갈등이 현실로 존재한다.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에 빈부갈등(유주택자/무주택자, 정규직/비정규직)까지 정확히 수치에 나타났다. 이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존재만큼 반영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지 않을까? 승자 독식구조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멘붕 이야기로 돌아가서…, 대자연 앞에서 진정한 힐링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공동의 비전이 진정한 멘붕 치료제라는 것을.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보고 멘붕을 벗어났다고 믿는 것은 타조가 위험을 잊기 위해 땅을 파서 머리를 묻는 것과 같은 짓이다. 국가의 밑그림이 내 것과 다르더라도 받아들이고 함께 채색해 나가야 한다. 선거는 악마와 싸우는 성전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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