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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울 땐 추위를 외로울 땐 외로움을

겨울 문화축제를 오가며

고재열_시사IN문화부 기자/블로그‘독설닷컴’운영

웹진 17호

2013.02.07

  • 지난 주말 철원군의 한탄강 상류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 그 전 주에 분명 얼음 트레킹을 했는데, 그 두꺼운 얼음이 먹다 만 아이스크림마냥 사르르 녹아있었다. 한탄강 급류가 얼음을 삼키며 가파르게 흐르는 것이, 얼음 트레킹이 아니라 얼음 래프팅을 해야 할 상태였다. ‘스위스 빙하 트레일 보다 낫다’는 내 말을 믿고 따라온 일행에게 머쓱했다.

    인근 육가공 공장 빈 논에서 겨울을 보내던 독수리 떼도 사라지고 없었다. 독수리들이 고기 부산물을 받아먹기 위해 비둘기처럼 떼를 지어 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라며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다 날아가고 없었다. 공장 일꾼들이 독수리들은 추울 때만 있고 날이 풀리면 다시 올라간다고 했다. 멀리서 여남은 마리 독수리들이 상승기류를 타고 유유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두 번의 허탕을 치고 애써 자연의 교훈을 얻었다며 자위했다. 그 두꺼운 얼음이 그렇게 맥없이 녹는 모습에서, 그 설치던 독수리 떼가 속절없이 떠난 것을 보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굳건해 보이는 것들과 지금 대단해 보이는 이들도 한 줌일 뿐이라는… 새로운 날이 풀리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것들이라는… 그런 희망을 품어 보았다.

    철원군에서 화천군으로 넘어가서 또 한 번 허탕을 쳤다. 화천 역시 풀린 날씨에 얼음이 다 녹았고 산천어 축제도 끝나 있었다. 아이들에게 산천어 낚시를 시켜주겠노라는 공약이 무색해졌다. 얼음이 녹은 강이라도 산천어들은 그대로 있을 테니 낚싯대를 드리워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화천군청 관광 담당자가 ‘바로파로 겨울축제’를 안내해 주었다. 강 상류 쪽은 기온이 낮아서 얼음이 아직 녹지 않아 조그만 축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파로 겨울축제는 화천 산천어 축제의 별책부록 같은 축제였다. 추운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다른 축제들 보다 더 일찍 시작해서 더 늦게 끝나는데 면사무소 직원들은 50일 가까이를 축제현장의 비닐하우스에서 지낸다. 기본 매뉴얼은 화천 산천어 축제와 같았다. 얼음낚시나 눈썰매는 체험료를 받되 일정한 금액을 농산물 상품권으로 되돌려줘서 화천군 농산물을 사가거나 군민들이 만든 먹거리를 사먹게 했다.

    화천 산천어 축제는 추운 곳에서 추위를 파는 행사다. 추워서 아무도 안 찾는 이곳에 얼음낚시를 하면서 벌벌 떨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매년 겨울 100만 명 이상이 추위를 사기 위해 화천에 온다. 그런데 바로파로 겨울축제는 화천 산천어 축제에 숟가락을 얹고 판을 벌인 것이었다. 큰 축제의 부산함보다 소박한 맛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화천 산천어 축제는 문화 아이디어 상품이다. 화천에 자연산 산천어는 한 마리도 없기 때문이다. 산천어는 연어처럼 회귀성 어종이다. 그런데 바다에서 산천어가 화천까지 올라오려면 수십 미터의 댐과 수 미터의 보를 여러 개 넘어와야 한다. ‘슈퍼 산천어’가 아닌 이상 이것은 불가능하다. 산천어는 모두 양식이다. 얼음 낚시터에 시시때때로 공급되는, 그 양식된 산천어를 낚으며 사람들은 야생을 맛본다.

    산천어 축제를 시작으로 축제에 자신감이 생긴 화천군은 여름에는 ‘쪽배 축제’와 ‘토마토 축제’로 사람들을 다시 부른다. 산천어 축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인프라 시설을 여름에도 고스란히 사용하는 것이다. 자전거 도로를 꾸려 봄과 가을에도 관광객을 유혹한다. 화천에는 군인들 말고는 분주한 사람이 없다. 그 한가로움이 바로 마케팅 포인트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맛보기 위해 화천을 찾는다.

철원공감
철원공감 [출처] 철원공감

  • 다시 철원군으로 돌아가 보자. 올해 얼음 트레킹 체험 행사를 처음으로 하기는 했지만 철원군은 철원을 팔 줄 몰랐다. 행사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기능성 아웃도어웨어로 무장한 ‘걷기 얼리어답터’들이었다. 그들이 왔다 간 뒤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 걸었던 한탄강 얼음 트레킹은 지난해 걸었던 스위스 빙하 트레일 못지않았다. 강추위에도 유유히 흐르는 계곡물 소리 들으며 뽀드득뽀드득 눈과 얼음을 밟으며 걷는 기분이 정말 일품이었다. 오감 만족 트레킹 코스였다. 두꺼운 얼음에서 한 겨울의 추위를 실감하면서도 그 얼음을 뚫고 흐르는 급류에서 또 다른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역설적인 트레킹 코스였다.

    더구나 한탄강은 우리가 지리 시간에 배웠던 대로,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U자형 계곡이다. 현무암질로 지면이 파여서 강이 만들어진 것이다. 약 20미터 정도 지상보다 낮게 흐르기 때문에 양쪽 단층이 기암절벽처럼 보여서 운치가 있다. 추운 지방이지만 파인 지형이기 때문에 기온도 상대적으로 높다. 그래서 걷기에 좋다. 그런데 그 보석 같은 곳이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군고구마라도 팔기 위해 나온 주민도 없었다.

    독수리도 마찬가지다. 한탄강과도 가까워서 겨울에 짝을 이룰 수 있는데 아무런 안내가 없다. 독수리 떼는 장관이다. 그래서 사진 동호회 사람들은 매년 겨울 이곳을 찾는다. 아이들과 함께 오면 겨울에 이만한 구경거리가 없다. 한탄강 얼음 트레킹과 묶으면 좋은 나들이 거리가 된다(얼음썰매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철원군은 아직 겨울 추위에 움츠려있었다. 어서 기지개를 켜기를…. 추울 땐 추위를 팔고, 외로울 땐 외로움을 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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