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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진실된 감동으로 화답하라

고재열_시사IN문화부 기자/블로그‘독설닷컴’운영

웹진 18호

2013.02.21

  • SBS 예능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의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출연자 박보영씨와 동행했던 연예기획사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때문에 촉발된 이 논란은 제작진이 홈페이지에 사과 및 해명 글을 올리면서 비난이 잦아들고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들이 받았던 감동의 근원이 최선을 다하는 출연자의 열정이 아니라 최고 시청률을 향한 제작진의 편집이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물론 예능프로그램에서 웃자고 하는 얘기에 왜 죽자고 덤비냐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맨 처음 떠올린 것은 바로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였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라고 했던 김수영처럼 대선 기간 중 ‘십알단’의 사이버테러나 국정원의 여론조작에 분개하지 않고 예능프로그램의 왜곡 편집에만 분개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때 떠오른 것은 SBS에서 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피디와 했던 인터뷰였다. 그 피디는 솔직히 밝혔다. 우리가 기대하는 원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원주민은 더 이상 지구상에 없다고. 원주민들도 평상시에는 반바지에 티셔츠 입고 산다고. 오직 관광객 앞에서만 원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한국을 좋아한다며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선다고.

    원주민들이 다시 원시의 기억을 되찾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돈이라고 했다. 돈을 주면 나뭇잎 옷을 주섬주섬 입고 뼛조각 장식을 둘러쓴다고. 그러면서 사냥을 원하면 사냥을 하고 축제를 원하면 축제를 해준다고. 오직 돈만이 그들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다고. 우리가 명절날 한복을 입듯이 그들도 카메라 앞에 그들의 ‘과거’를 연출해 준다고.

    그런데 그런 연출이 그들에게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이제 원주민들도 '타자의 시선'에 익숙해져서 여성들은 가슴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찍는 이유는 큰 섬에 나가서 학교에 다니는 자녀의 학비를 보내기 위해서라고. 남자들은 해본지 너무 오래 되어서 잘 되지도 않는 사냥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다고.

    결국 그 다큐멘터리 피디는 그런 인위적인 장면을 포기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거짓은 의미가 없다면서. 그런데 그가 포기한 원시적인 장면이 다른 채널도 아닌 SBS에서 매주 나왔다.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에서. 그 프로그램이 바로 <정글의 법칙>이다.

    다큐멘터리 피디가 10억 원 이상의 제작비를 가지고도 찍지 못한 화면을 예능 피디가 찍은 것일까? 그랬다면 그 다큐멘터리 피디는 정말 무능한 피디이고 그 예능 피디는 정말 유능한 피디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다큐멘터리에 요구되는 것은 '진실'이고 예능에 요구되는 것은 '웃음'이다. 그런데 '웃음'과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예능 피디가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집단 지성’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정글의 법칙>이 ‘리얼 다큐’를 표방하지 않고 덤덤하게 예능의 영역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면 시청자들도 받아들여 주었을 것이다. 비록 프로그램 이름이 <정글의 법칙>이지만 만약 정말 ‘정글의 법칙’에 따라서만 찍게 하고 출연자들을 위험에 노출했다면 이 프로그램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당장 징계를 받았을 것이고 시청자들도 비난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일정 정도의 ‘설정’, 즉 연출은 이미 내포된 것이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예능프로그램에서 프로그램의 진실성이 문제가 된 이번 논란은 2년 전 역시 예능프로그램에서 공정성이 문제가 된 MBC 예능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의 김건모 재도전 논쟁을 연상시킨다. 중견 가수인 김건모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준 것에 분개하는 시청자들에게 제작진은 예능프로그램에서 왜 그렇게 엄한 원칙을 요구하느냐고 불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레전드급 가수들의 극한 서바이벌! 한 사람은 탈락해야 한다!!!'라고 광고했던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시청자들이 웃자고 만든 프로그램에 죽자고 따지는 것을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 진실이 힘을 잃는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예능프로그램에서라도 진실된 감동을 얻고 싶었던 것 아닐까? 사회가 ‘공정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예능프로그램에서라도 공정이 구현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는 진실과 공정을 자신들이 애정을 준 방송프로그램에서라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을까?

    연예인이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일으키거나 폭언이나 폭행으로 입건되었을 때 ‘공인으로서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사실 그들은 ‘공인’이 아니라 단지 ‘유명인’일 뿐이다. 그들이 죄송할 일은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좋은 노래를 들려주지 못할 때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과 관심에 겸손으로 화답한다. 이젠 방송 프로그램들도 시청자들의 사랑에 염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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