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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이드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36호

2018.03.22

지난 세기 후반, 케이블채널이라는 신문물을 통해 "미드"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600만불의 사나이>, <기동순찰대>, <전격 Z작전>, <맥가이버>, <환상특급>, <천재소년 두기> 등 7-80년대를 수놓았던 수많은 드라마가 있었겠으나 이상하게 그 때는 그걸 "미합중국이라는 특정국가에서 제작 및 배포된 드라마"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아마 등장인물들이 모두 유려한 한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양지운 배한성 송도순 등 성우분들 목소리였겠지만) 케이블채널에서 더빙이 아닌 자막처리를 하면서 영어라는 언어와 미국이라는 문화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그 말이 생겨났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여튼 "미드"라는 말이 생겨나고 퍼져나가는데는 당시 동아TV(채널A 아님)에서 방영한 시트콤 <프렌즈>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시트콤 <프렌즈>(출처: CNBC.com)

참으로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해 다시 들여놓은 넷플릭스를 순례하던 중, 바로 이 <프렌즈>를 발견했다. 이 미드로 말할 것 같으면, 1994년부터 2003년 사이 20대를 보낸 대부분이 이 시리즈를 통해 ‘센트럴퍼크’ 소파에 앉아 친구들과 뉴욕식 유머로 수다를 떨고, 뉴욕 아파트에서 뉴욕 피자를 시켜먹고, 뉴욕식 파티와 뉴욕식 추수감사절, 뉴욕식 직장생활과 뉴욕식 휴가를 누리며 뉴요커의 뉴욕뉴욕한 연애와 우정을 뉴욕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도 경험하게 만든, 당대 우주최강의 히트상품이었다. 이 시리즈를 보면서 영어공부 하는 게 유행이었고, 등장인물들의 말투와 농담을 따라하는 게 놀이였으며, 10년 동안 이어진 시리즈의 엔딩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한 시대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런 <프렌즈>를 동아TV 방영시간을 기다리지 않고도, 막 보급되기 시작한 '초고속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 자막 따로 구해 일일이 싱크 맞추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 할 수 있다니, 역시 예나 지금이나 뭐든 미제가 최고다 하면서 1시즌부터 정주행 했다.

여전히 몇 에피소드 씩 몰아 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거의 모든 플롯과 상황, 대사까지 기억 그대로다. 15년 만에 봐도, 몇 번째 봐도 달리 <프렌즈>가 아니다. 인물들의 머리모양이나 의상은 지금 보기엔 다소 촌스러워도 '그래, 예전엔 그랬지'하며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생각보다 배우들의 연기는 다소 과장된 경향이 있으나, 직업상 생긴 기준이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딱 하나 전혀 기억에 없는 면을 발견했으니, 인물설정과 유머 코드의 상당부분이 호모포비아적인 피해의식과 이에 기반한 조롱이라는 점이다. 지금 새로 만드는 미드가 이런 유머코드를 운용한다면 아마 첫 시즌 끝나기도 전에, 아마 파일럿 프로그램부터 외면 받고 조기 종영할 지도 모른다. 이렇듯 삐걱거리는 유머가 그나마 유효한 이유는 과장된 연기와 촌스러운 스타일로, SD화질의 화면으로 하나의 형식으로 조합돼 여전히 우리를 '과거의'뉴욕으로 손짓하기 때문이다.

코미디와 유머의 내용과 형식은 당대의 문화적 맥락을 구석구석 포함하고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유머 역시 발 빠르게 반응하며 바뀐다.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을 추적해보면 그 빠르기와 맥락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제 넷플릭스에 예능까지 업데이트된다는!) 선사시대 꽁트는 생략하더라도, 한때 과장된 상황연기로 관객과의 상호반응을 이끌어내는 '공개코미디'형식의 시기와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출연자들의 예상지 못한 반응들을 담는 '리얼버라이어티'형식의 시기에 이어, 몇 년 전부터는 '관찰카메라'라는, 출연자들의 일상으로 카메라가 침투하는 형식의 예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이전 시기의 문화적 맥락이 과장 혹은 희화화된 출연자의 행동에 관객이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것이라면, 지금은 출연자의 일상 속 섬세한 반응과 행동을 보면서 관객 각자가 자신의 정서를 직접 채워나가고 싶어하나보다.

<효리네 민박>(출처: joins.jtbc.com)

이전까지 예능에서 출연자가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관객들에게 말을 걸었다면, 관찰예능에서는 출연자가 카메라를 보지 않는다. 간혹 카메라를 보더라도 설치형 무인카메라임을 드러낸다. 가끔씩은 특정 카메라에 잡힌 다른 카메라의 존재를 블러 처리하기도 하고, 집안의 다른 가구나 벽지에 묻히도록 카메라를 감싸놓기도 한다. 관찰예능에는 카메라 (혹은 카메라를 잡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숨기거나 지움으로써 화면 속 출연자가 카메라나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일상 속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지우고 출연자의 일상에 몰입하게 된다. 이 형식에서 관객(카메라)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출연자는 관객(카메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모른척 한다. 결국 이 형식은 자연스럽고 새로운 방식이지만 결국 연기임에는 변함이 없고, 여전히 화면은 하나의 환영이다.

카메라에 익숙지 않은 출연자는 카메라를 끊임없이 의식함으로써 카메라(관객)의 존재를 상기시키지만, 익숙한 출연자는 카메라(관객)를 신경 쓰지 않고, 그래서 더욱 내밀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엄연히 존재하는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그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연자가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며 오디오를 채우고 있다면 그게 증거랄 수 있겠다. (우리는 보통 혼자 있을 때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새로운 형식의 환영을 통해 관객은 출연자의 일상에 몰입하고 그 환영에 동기화한다. 관객은 출연자들의 귀여운 아이들을 (귀여울 때만) 키워보고, 연예인의 화려한 집에서 싱글라이프를 즐기기도 한다. 구라파의 어느 그림 같은 마을에 식당을 내어 매출에 연연하지 않고 슬로라이프를 즐기고, 화목한 메이저리거 가족이 되어 디즈니랜드 성 같은 집에서 아이들과 캐치볼을 한다. 우리는 뉴요커가 되고 싶고, 한가롭게 민박 치면서 제주도에 살고 싶다. 그래서 겨우내 넷플릭스를 페이스북을 인스타그램을 놓지 못했나보다.

참으로 긴 겨울이었고, 많은 이들에게는 미처 끝나지 않은 겨울이기도 하다. 아마 올 봄은 이제까지 어디서도 보거나 겪어보지 않았던 봄일 것이다. 이제 타인의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실을 대면하고 직접 만들어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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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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