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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38호

2018.04.19

또래들이 소녀소년이었던 시절, 어른들한테서 종종 "전쟁 때는...", "1.4.후퇴 때 말이야..."는 등의 대사가 들리곤 했다. 내용이 뭐였건 그 대사들은 나한텐 모두 흑백사진처럼 들렸는데, 뒤늦게 죄송한 얘기지만 내 방백은 늘 '뭐라는 거야?'였다. 그게 80년대이니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겨우 30년 전 얘기였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 80년대도 지금으로부터 또 30년 전이니, 소년시절 흑백얘기 듣던 얘기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지금의 소년소녀들이 어떤 방백을 하고 있을 지 생각해보면 자뭇 숙연해진다. 시간이 이전엔 그렇게 천천히 흐르더니.

어... 어르신!(출처: sbs.co.kr )

하긴, 모든 방학이 그랬다. 방학이 시작되고는 시간이 멈춘듯 심심하고 지루하다가,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 하는 순간부터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나머지 반이 후딱 지나가고 어느새 밀린 일기를 몰아 써야 할 때가 오고야 만다. 모든 주말도, 천금같은 연휴도, 휴가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처음 반절과 나머지 반절은 절대적으로는 같은 길이의 시간일 텐데, 느껴지기에는 이렇듯 상대적으로 길이가 달라진다. 한 살짜리에게 1년은 한평생이고, 두 살에게는 1/2, 일흔 세 살에게는 1년은 1/73만큼의 평생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기억이 시작하는 나이부터 매년 1/4, 1/5, 1/6, ... 이런 체감적 길이의 한해 한해를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작년이 1/n 만큼인 듯 시간이 지나갔다면, 올해는 1/(n+1)인듯 스쳐지나갈 것이다. 대략 그렇게 짐작하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건 다른 일일 테지만.

이런 맥락으로, 누구에게 어떤 10년은 삶의 1/4에 해당하는 시간이겠지만, 같은 시기가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에 해당하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체감하는 비율이 다르기에, 누구에게는 참으로 빨리 변하는구나 생각하게 하는 세월이 누구에게는 억겁의 시간인 듯 길고 변하지 않는 듯 느껴질 것이다. 누구의 시간은 별 일 별 생각 안하고도 쉽게 지나가지만, 누구에게 그 시간은 수많은 노력과 고통과 불안함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긴 시간이다. 그러니 아무리 "젊은이, 나도 다 겪어봐서 아는데, 힘든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네." 하고 말하더라도 듣는 젊은이 입장에서는 '뭐라는 거야?' 할 수 밖에 없다. 세계의 시간축이 다르기 때문이다. 안물안궁한 조언을 그토록 정성스럽게 해주는 이도 정작 자신의 현재만 알지, 듣는 이의 현재는 모르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같은 시간대를 살더라도 우리는 각자 다른 세계와 경험과 밀도를 가지고 살고 있다.

이렇듯 각자 인생 각자 사는 콩가루 인류에게 공통적인 상황이 하나 있다면, 바로 한치 앞 일도 모른다는 점이다. 여기엔 여지껏 10년을 살았건 100년을 살았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공통점이 모두의 평생을 같은 무게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모두의 삶은 한 번 뿐이고, 오늘까지가 바로 그 평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내일'은 우리의 예측이나 바람일 뿐, 그 내일을 볼 수 있을 지 없을 지 마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나고 보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내 그럴 줄 알았지'하겠지만, 지나간 복권번호 맞추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될 것이고, 현재의 모든 풍경들은 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기적일 것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언제나 모를 일이다. 그게 한강에 놓인 30개의 다리이건, 인터넷이건, 자율주행자동차이건.

넷플릭스 주식 사놓은 사람 손!(출처: theguardian.com )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한 자스민 혁명이 튀니지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고,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을 뒤엎고 리비아와 시리아까지 혁명의 열풍으로 휘감을 때, 우리는 트위터와 인터넷의 승리에 열광했다. 미니홈피 대신 갈아탄 페이스북이 내 지루한 일상을 채우고 친한 듯 안 친한 친구들에게 사사소소한 자랑질 하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 버락 오바마와 비욘세와 내가 동등한 한 명의 유저로 존재하는, 중동지방의 오래된 독재정권들을 무너뜨리고 최강대국 미국의 대선 판도를 바꾸는 바로 그 페이스북이라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신기하고 놀랍던 서비스들이 이젠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졌을 뿐 아니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에 밀려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기껏 익숙해진 서비스들이 구세대의 유물이 됐으니 세상 참 빨리 변한다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평생의 무려 절반동안 페이스북을 썼으니 이제 다른 것을 찾고 싶은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는 빠르게 바뀌는, 누구에게는 천천히 바뀌는 그런 세계에서 하루하루 쏟아지는 뉴스와 화제에 즐거워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희망을 찾고 하는 동안 계속 들렸던 소식이 있었다. 지구 어디선가의 내전에서 끝도 모를 대량학살과 보복학살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 그 지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고 건너고 있다는 소식. 그 중 상당수가 바다를 못 건너고 죽었고 죽고 있다는 소식. 겨우 바다를 건너서도 인종혐오와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 우리를 포함해 그 어떤 국가에서도 이 내전을 해결할 의지도, 구체적인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다는 소식. 그리고 며칠 전 시리아 동(東)구타의 한 병원에 대한 화학무기공격이 "또" 있었다는 소식. 그게 서방의 주장대로 시리아 정부군의 소행이건 러시아의 주장대로 영국 정보기관의 조작극이건 희생자의 대부분이 어린이라는 소식. 그리고 너무나도 엉겨버려 이제는 해결이 영영 불가능해 보이는 그 내전의 촉발점이 바로 그 자스민 혁명이라는 사실.

지난 8년 동안 그 곳에서 35만 명이 넘게 사망했고 그 중 2만 명은 어린이였다. 그 기간 동안 우리가 빠르게 살아왔건 느리게 살아왔건, 2만 명의 아이들이 경험한 8년은 우리의 8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2016년 8월 알레포 공급 직후 구출된 어린이.(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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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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