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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문 작성 가이드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40호

2018.05.24

* 아래 내용은 연극 <가해자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구자혜 연출,2017)>와는 그닥 관련이 없음. #제목은_당연히_표절

A: 우리 헤어지자 / B: 우리 사이가 그것 밖에 안돼? / A: 응 그런가 보네 / B: 내가 미안해 / A: 미안하긴 해? / B: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더 할 말이 없네 / A: 뭐가 미안한데? / B: 내가 한 일 / A: 니가 한 일 뭐? / B: 니가 상처받은 일 / A: 내가 뭐에 상처받았는데? / B: 내가 한 일 다 / A: 뭔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면 다야? / B: 다신 안 그럴께 / A: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 B: 내가 잘할께 / A: 필요 없어 / B: 그냥 좀 용서해주면 안 돼?

위 대사는 영화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 2001)>와는 그닥 관련이 없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살벌한, 혹은 자조적인 공감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개그코드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뭐가 미안한데?" 대화이다. 언뜻 들어보면 A와 B는 연인관계이다. A는 B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뭔가 화가 났고, B는 이에 대해 사과를 하고 화해하려는 중인가보다. 그런데 뭔가 의사소통이 안되고 대화는 답답하게 맴돌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다, 화해는 커녕 더 악화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A가 말꼬리잡고 늘어지는 예민한 사람으로 보여 통쾌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B가 말귀 못 알아듣는 둔한 사람으로 보여 통쾌할 것이다. 이 개그코드는 많은 경우 A를 여성, B를 남성으로 설정하여 공감을 자아내겠지만, 따지고 보면 남녀 문제만일 리 없다.

거창하게 장면분석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A와 B의 행동은 누가봐도 다른 전제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일단 각자에게 있어서 이 상황의 시작부터가 다르다. A는 B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는데서부터 상황이 시작되고, 변화가 있지 않는 한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즉, 변화 혹은 관계의 소멸이 행동의 목적이다. B에게 이 상황은 A가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선언에서부터 시작되고, B의 목적은 관계의 지속이다. B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사과'라는 방법을 택하고, A는 B의 사과가 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탐색한다. 계속 이어지는 B의 사과에도 A가 B의 목적대로 관계지속에 응하지 않자, B는 A에게 관계의 지속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사과는 용서를 강요하는 형식이 된다. "이렇게까지 미안하다는데 미래지향적으로다가 그냥 좀 용서해주면 안돼?"

흔한 개그분석에서 시작했지만, 여기에서 A가 받은 상처가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거나 부정하는 B의 폭력에 의한 것이고, A와 B의 관계가 연인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인 질서이며 A와 B가 간단하게 헤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상황이라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타인으로 인한 깊은 상처는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절박한 분노를 만들어낸다. 공존하려면 일방적 질서가 변화해야 하고, 질서가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서는 이러한 분노가 사라졌을 때 가능할 것이고, 그제서야 상처가 치유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이므로,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자의 분노가 잦아들게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화 내지 마."라는 말은 당연히 피해자의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다. 말하자면 사과라는 행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분노하지 않을 때 완성되는 것이지, 피해자에게 용서를 요청하거나 강요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유형별 오답노트를 살펴보자.

달리 1등기업이 아니다. (출처: 네트의 바다)

"저의 불찰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 번 깊이 사죄드립니다. 이번 일로 마음 아파하시는 국민 여러분의 모습을 뵈면서 저 자신 백번이라도 사과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 큰 실망과 분노를 다 풀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제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립니다. 국민 여러분. 돌이켜보면 지난 18년 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 했던 여정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1998년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늘 이 순간에 이를 때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 해왔습니다. 단 한 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 왔습니다.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입니다." - 2016.11.29. 박근혜 전대통령 3차 대국민담화 중에서.

"이처럼 모범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가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며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협력증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가길 희망합니다." - 2018.3.23. 한국 문재인 대통령 베트남 하노이 주석궁 정상회담 중에서.

"그동안 제게 피해를 입은 당사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정말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제 죄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포함하여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시 한 번 피해 당사자분들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연희단 거리패 출신들과 단원들에게도 사죄드립니다. 선배 단원들이 항의할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을 했는데, 번번이 제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큰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연극계 선후배님들께도 사죄드립니다. 저 때문에 연극계 전체가 매도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피해당사자 분들께 사죄드립니다. 피해 당사자 분들의 상처를 위로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죄드립니다." - 2018.2.19. 이윤택연출가 기자회견 중에서.

"저희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예술인들께 실망을 드리고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것에 대해 머리 숙여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는 예술지원 중추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였고 부당한 지시를 양심에 따라 거부하지 못하였으며 반헌법적 국가범죄의 공범자가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공정하지 못한 일처리와 원칙을 저버린 처사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이번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발표를 예술인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에 국민들과 예술인들을 모시고 아래와 같이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번 사과문 발표가 그간의 과오에 대한 속죄로써 이미 늦었고 너무나 미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를 계기로 어떠한 권력이나 압박에도 결국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힙니다. 앞으로 한국예술위원회가 그동안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 예술현장의 진정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 2018.5.1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회 초대장 중에서.

출처: 전윤환 연출 페이스북

"내가 이렇게까지 미안하다고 생각하니 용서하고 잘 지내자"는 말은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피해자가 더 이상 분노하지 않게 됐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아니면 질서를 뒤집어엎는 (헤어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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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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