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춘향제의 변신은 무죄

[고재열의 리플레이]

고재열_시사IN 문화팀장

제141호

2018.06.07

남원 광한루원에서 춘향테마파크까지 가는 길은 대략 1km 남짓으로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제법 넓은 그리고 잘 정비된 요천이 흐른다. 시내 중심에 이런 전통 있는 건물과 이런 경관이 있다는 것은 남원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88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남원춘향제는 바로 이곳에서 열렸다.

이 전통과 감성의 공간에서 ‘귀고문’을 당했다. 광한루원에서 춘향테마파크까지 가는 길에 스피커를 최대 출력으로 켜 놓고 트로트 음악을 틀어 놓은 곳이 4곳이나 있었다. 대략 300미터에 한 곳씩 있었던 셈인데, 광한루원 정문을 나서서 춘향테마파크 입구에 설 때까지 귀가 따갑도록 트로트의 향연을 ‘강제로’ 만끽할 수 있다. 남원이 동편제의 성지가 아니라 트로트의 성지가 아닌가하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음악도 엄연한 음악의 장르 중 하나다. 그리고 트로트 애호가들도 자신들의 취향을 누릴 자유가 있다. 취향에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말입니다. 행사장을 이 정도로 장악하는 것은 좀 심한 것 아닙니까? 트로트 축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춘향제 기간 중 행사장에서 ‘트로트 프리’인 공간은 광한루원이 유일했다. 그래서 주변을 산책하다가도 ‘소음 공해’를 피해 광한루원으로 피하기 일쑤였다.

88세, 미수(米壽)에 이른 남원춘향제는 올해 변신을 시도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음악감독인 원일 씨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한 것이다. ‘춘향제향’을 올리는 춘향제는 일반인들에게 ‘미스 춘향’을 뽑는 행사로, 국악인들에게는 ‘춘향국악대전’이 열리는 행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간에 남원을 방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존재감은 갖추지 못했다.

2박3일 동안 춘향제의 변신을 보러 간 여행에서 우연히 88년의 역사가 빚어낸 저력을 확인했다. 관람할 생각이 전혀 없이 커피숍을 찾아 시내 중심가를 헤매다 우연히 퍼레이드를 보았는데 장관이었다. 퍼레이드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참가한 시민들이 스스로 즐기고 있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퍼레이드가 아니었다. 저녁 때 남원이 고향인 지인에게 물어보니 태어날 때부터 해오던 ‘세시풍속’ 비슷한 것이라 남원 출신이라면 ‘퍼레이드를 즐긴다’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고 했다. 스스로 즐기는 행사라는 점에서 춘향제는 축제가 분명했다.

원일 예술감독은 전통과 현대를 함부로 섞지 않고 효과적으로 분리해 놓았다. 보물로 지정된 광한루 위에서는 ‘소리 보물’인 명인 명창들이 공연하고 소수(70명 내외)만 들을 수 있게 <더 광한루>를 기획했다. <더 광한루>는 마치 우리 음악 감상 방식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느낌이었다. 소리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다만 개막 공연은 아쉬웠다. 평소 “국악은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던 소신과 다르게 너무 한데 섞어 놓아 조근 어수선했다).

반면 방자프린지는 말 그대로 방자했다. DJ타마와 AUX(억스)와 같은 뮤지션을 춘향제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스와 인도네시아 일본 태국 아티스트들이 함께 해서 다양한 소리와 흥미로운 몸짓을 볼 수 있었다. 방자춤판(방자프린지 댄스컴퍼티션)에서 펼쳐진 스트릿댄스, 실용무용, 순수무용, 팀들의 향연에서는 춘향제의 가능성을 ‘확인’에서 ‘확신’으로 한 단계 올릴 수 있었다.

원래 춘향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남원춘향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다. 남성 중심 시각에서 ‘정절을 지켰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여성을 중심으로 ‘자기 주도 연애’를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춘향에 대한 미적 접근을 버리고 어르신들이 스스로 춘향을 재해석하는 ‘시니어 춘향 선발대회’가 열렸는데 후보자 어르신들이 몸빼를 입고 광한루원을 활보하는 모습이 역대 미스 춘향들이 하는 한복 패션쇼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원일 예술감독은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춘향제 행사를 해도 좋고 성소수자 축제가 되어도 좋다며 춘향은 얼마든지 재해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옆에서 안숙선 명창(제88회 춘향제전위원장)이 남원 분들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지켜낼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꾸자며 ‘속도 조절’을 주장했지만, 원일 예술감독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래서 기대가 되었다.

이렇게 춘향제가 변신하려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이를 못마땅해 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여전히 행사를 이권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보기엔 ‘굴러들어온 복’인 공연기획팀을 ‘굴러들어온 돌’이라며 공격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구태의연한 방식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원일 예술감독과 함께 행사를 바꿔낸 공연기획팀에 시비를 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춘향제의 전복이 계속되길 바라는데, 과연 이들을 내년 춘향제에서 볼 수 있을지 걱정된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고재열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시사저널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나 '삼성기사 삭제사건'에 항의해 6개월 동안 파업을 벌인 후 사표를 내고 동료들과 시사IN을 창간했다. 블로그 '독설닷컴'으로 인터넷 논객 활동을 시작했으며 요즘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트위터 @dogsul | 페이스북 facebook.com/dogsuldot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