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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제인

허윤_문학연구자

제158호

2019.04.25

남자가 없는 세계
남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 최초의 SF소설로 일컬어지는 『완전사회』(문윤성, 1967)는 1965년도의 한국 남자 우선구가 시간여행에 선발되어 161년 후의 미래에 깨어나는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그가 눈을 떠 처음 본 광경은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남과 여의 성 전쟁 끝에 지구에는 여성들만 남게 된 미래에서, 우선구는 유일한 남자로서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SF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남자가 없는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SF로 유명한 조안나 러스(Joanna Russ)의 female man(1969)을 떠올릴 것이다. 여성이 유일한 인간이 되는 미래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완전사회』는 female man과 상통한다. 그러나 female man이 세대, 지역 등을 넘나드는 여성들이 겪는 공통의 고통을 핍진하게 그린다면, 『완전사회』는 성 전쟁에서 여성들이 승리한 이후를 디스토피아로 그린다는 차이가 있다.
1916년생 한국남자가 상상한 남자가 없는 세계는 자유가 통제되는 독재 사회다. 여자들만 사는 ‘완전사회’에서 성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사회의 인간들은 ‘워시두’라 불리며,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여성이라는 신체적 특징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여성들만 살다 보니 젠더 규범이나 성별 분업도 없다. 여성이 정치인, 군인, 경찰, 교도관 등을 모두 담당한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성 전쟁에서 승리한 여성은 ‘진성’이 되고, 남성들은 화성으로 쫓겨나거나 수술을 통해 남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없으니 재생산 역시 달라진다. 인공자궁을 통해 아이를 출산하고, 태어난 아이는 사회가 양육한다. 임신과 출산을 거부하고 월경을 중단시킬 것을 요구하는 급진주의자 ‘두버무’도 있다. 이들은 ‘단신 종료사상’, 즉 단종주의를 선택한다. 사회의 재생산을 거부하는 것이다. 미래로 간 남한 남성 우선구는 인공자궁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회가 양육하는 상황에 대해 “인공자궁 속에 자신의 난자를 던져 주는데 그친 그런 어머니들”이라며 “그러다간 남성뿐 아니라 인류의 씨가 없어질 게 아니겠는가”라고 걱정한다. 남성이 없이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할 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도 남성의 ‘씨’를 생각한다. 우선구가 전 세계인의 대표로 선정될 만큼 ‘완전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장면은 재생산과 관련된 남성들의 근본적인 공포를 드러낸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부계 혈통 중심의 가족제도가 붕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옛적의 그것이(친족) 피처럼 진한 거라면 지금은 물 정도의 엷음이 있을 뿐이다”라는 우선구의 염려에는 여성 중심의 가족 구조와 공동 양육 시스템이 친족 구조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남자가 없으면 가족과 친족 등 사회를 이루는 기초 단위가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은 사회를 이루는 기초 단위를 남성을 중심으로 한 재생산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012년 병역법이 개정되어 3급 판정을 받기 전까지 무정자증은 4급 병역면제 사유였다. 무정자증이 군 생활을 수행하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 2급 현역 판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남성성을 곧 남성 중심의 인구 재생산으로 상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에 의한 재생산은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였던 셈이다. 그러니 남성 없이도 가능한 재생산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된다. 이는 인구 재생산의 시작과 끝이 모두 남성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No Future, 오지 않을 미래
리 에델만(Lee Edelman)은 자신의 책 No Future(2004)에서 호모포비아의 무의식에는 사회가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가 있다고 분석했다. 퀴어는 더 이상 가족이, 국가가 재생산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2019년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공포는 여성을 상대로 발생한다.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201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저출생 대책으로 고학력 고소득 여성들의 하향 결혼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발표하여 비판받기도 했다. 이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여성의 선택을 무시하고, 여성의 몸을 출생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7대 2의 의견으로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를 비롯하여 많은 수의 여성들이 모여 기쁨을 나눴다. 그날 밤 “아모르 파티”에 맞춰 거리에서 춤을 췄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여성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는 동안, 인터넷상에서는 낙태죄 합헌 의견의 몇 구절이 화제에 올랐다. “우리는 모두 태아였다.”, “고려장이 합법화될 것이다.” 합헌의견서는 오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며 미래 없음을 한탄하였다. 아마 이렇게 응수할 수 있으리라. 당신이 생각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낙태죄가 없는 세상에서 지금보다 더 잘 살아갈 테니까. 낙태죄를 폐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재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여성에게 오롯이 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여성들만의 세상에서는 친족이 약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성차가 가부장제를 강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임신과 출산의 분리를 통해 성차 없는 세계를 만들 것을 주장한다. 파이어스톤의 저서 『성의 변증법』(1970)은 출산과 임신이 여성을 “종족을 유지하게 해주는 노예계급”으로 만들었으며, 이성애규범성을 강화하여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여성 해방을 위한 첫 번째 요구사항으로 “여성을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양육의 역할을 여성뿐 아니라 남성, 즉 사회 전체로 확산시킬 것”을 주장한다. 생물학적 성차를 여성의 신체로부터 분리하고, 이것을 통해서 사회 구조를 개혁해나가자는 것이다. 양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 분업 등을 해소해야 가능한 상상이다. 그 첫 단추가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더 이상 제인은 없다
1972년 시카고에서 7명의 여성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임신중단을 시술한 여성들로, 전화를 걸어 제인을 찾으면 익명으로 수술을 진행해주었다. 2019년 한국에서 인터넷 게시판이 하는 일을, 1970년대 여성들은 제인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해결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은 임신중단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고, 은밀히 그 정보를 나누어 가졌다. 영화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Mary DORE 감독, 2014)는 ‘Calling Jane 콜링 제인’을 비롯하여 ‘제2의 물결’을 이끌었던 여성들의 어제와 오늘을 연결한 다큐멘터리다.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을 집필한 보스턴여성건강서공동체라든가 월스트리트에서 캣콜링(catcalling)하는 남성들을 미러링한 여성들, NOW의 결성과 집회까지 제2의 물결의 각 국면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 영화에서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것은 텍사스에서 열리는 임신중단 금지를 둘러싼 재판이다. 재판을 지켜보던 여성들은 자신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서 얻어낸 결과가 뒤집힐지도 모른다고 분노하고 있었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래시는 이제 막 작은 승리를 얻어낸 한국 사회에도 참조점이 될 것이다.

사진출처: https://www.imgrumweb.com/post/BpHdTDLFadY

어쨌든, 우리는 오늘 한 발 진보하였다. 낙태금지를 둘러싼 재판의 결과가 지난 시절 여성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될 것이라는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의 분석은 옳았다. 낙태죄가 없는 한국의 내일을 위해, Good bye, 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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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허윤 문학연구자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0년대 전후 남성성의 탈구축과 젠더의 비수행」, 「냉전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 「1950년대 퀴어 장과 법의 접속」 등의 논문과 『그런 남자는 없다』(오월의봄, 2017),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등의 공저, 『일탈』(현실문화, 2015) 등의 역서가 있다.
yunhe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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